목차
16. 아이라만
17. 미르셀라
18. 타흐마탄
19. 스피타만
20. 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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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인은 벌거숭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마음을 알기에, 나는 소리 나는 보석만 몸에 차고 누웠다.
그 호사스러운 보물은, 남쪽 섬의 계집종들이 즐거운 날에 보이는 호기로운 모습처럼 빛을 내어주었다.
춤추며, 흐느끼는 듯이, 찰그랑 소리를 울릴 때, 진주와 붉은 보석으로 빚어진 그 눈부신 세계는 나를 황홀하게 만들고, 나를 미치게 만든다.
소리와 빛이 한데 어울린 그것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그녀는 드러누워서 사랑에 몸을 맡긴 뒤엔, 긴 의자 위에 비스듬하게 앉아서 처연한 표정만 보여준다.
바닷물이 절벽으로 솟아오르듯 그녀에게로 솟아오르는, 바다처럼 깊고 아득한 내 사랑을 내려보면서, 나는 소년처럼 설레는 감정을 느낀다.
나의 여왕, 사랑의 여신이여, 당신께 환희의 송가**를 불러드리겠소.
길들인 사자처럼, 가만히 그녀를 내려보면서, 아련히 꿈꾸는 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팔과 다리, 그리고 허벅지와 허리는, 우유처럼 매끄럽고, 백조처럼 물결쳐,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녀는 성녀처럼 숭고하고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내 넋이 잠겨 있는 휴식을 깨뜨리고, 고요히 홀로 앉아 있었던 수정 바위에서 내 넋을 잃어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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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만 재상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니스산 포도주를 3병이나 비웠지만, 그의 감정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3주 전, 파라와 누르자한이 벌인 소란이 있고 난 뒤에 궁중의 판세가 바뀌었다. 폐하께선 2왕자비 누르자한에겐 얌전히 반성을 하라며 사흘간 처소에서 근신하라는 가벼운 처분을 내리셨다.
하지만 파라는 왕자비로서 처신없는 품행을 저질렀다며 파라의 왕족 연봉을 3할이나 삭감하는 비교적 강한 처분을 내리셨다. 파라가 이런 처벌을 받은 적은 처음이다. 거기다 새 애첩인 이사야를 폐하께서는 3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으셨다. 발라스나 다른 남자들은 폐하께 이 정도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
2왕자의 아비와 3왕자의 아비도 폐하께서 특별히 총애를 내려 주시지 않는다. 이사야는 고작 신참 궁정학자일 뿐이다. 예니사라이 태수의 막내아들이긴 하지만, 예니사라이 자치령은 예전부터 공화정이었고 지금도 태수와 주요 직위는 주민들의 선거로 뽑힌다. 태수의 아들로 태어난 게, 영속적인 신분과 혈통의 증명이 아니다.
마누셰흐르 대학교를 졸업한 건 지식인으로선 인정해 줄 업적이다. 하지만 하그리아 왕궁에선 수십명이나 되는 궁정학자일 뿐이다. 폐하께서 남자를 갈아치우던 버릇이 있으니 아마 몇 달 뒤엔 새로운 남자에게 관심을 뺏길 것이다. 이사야는 여왕폐하의 수많은 노리개 중의 한 명일 뿐이다. 그래, 고작 노리개일 뿐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울분이 가시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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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만은 소년이었을 때부터 여왕을 흠모했다. 여왕은 16살 성인이 된 아이라만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아들까지 낳아주셨다. 20살이 되자 폐하의 명령으로 니스 태수와 결혼을 했다. 폐하께서 전쟁터를 뛰어다닐 땐, 참모가 되어 지략을 짜냈다. 폐하께서 국정을 돌보실 땐, 재상으로서 든든하게 보좌했다.
여왕폐하를 위해서라면 아이라만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던 될 수 있다. 여왕께서 다른 남자와 혼인하던, 나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낳던, 그녀는 영원히 나의 여왕이다. 높은 산꼭대기의 설원처럼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다. 여왕은 영웅 루스탐의 핏줄이자 하그리아 왕실에서 태어난 용맹하고 존귀한 여성이다.
여왕은 수려하고 매혹적이다. 그녀는 미와 사랑의 여신 페라라의 현현**이다. 내가 13살 소년이었을 때, 당신을 처음봤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은빛 갑옷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19살의 당신은 전장의 성녀같았소. 강하고, 아름답고, 내 심장을 깊게 꿰뚫고 지나간, 나의 모든 경애를 담은 나의 사랑.
당신과 아르샨을 위해서라면, 나는 영혼을 더럽히는 악귀**도 될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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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는 자신에게 내려진 처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파라가 관료들과 인맥을 만들고, 시녀들에게 선물을 뿌리며 환심을 사기 위해선 왕족 연봉이 꼭 필요했다. 그게 3할이나 삭감된 것은 아주 큰 타격이다. 자신과 다툰 누르자한은 고작 사흘 동안 처소에서 근신하라는 처분만 내려졌고, 누르자한은 예전처럼 내궁을 활보하고 있다.
불여우 이사야는 발라스 오빠를 제치고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사야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이사야의 어머니와 네 명의 형들은 아주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다. 이사야의 어머니인 이리나 부인은 예니사라이 자치령의 태수다. 그녀는 예니사라이 주민 총선에서 5번이나 당선되어 20년째 태수로 연임하고 있다.
공화정의 전통을 가진 예니사라이 주민들은 지도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표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를 추방한다. 이리나 태수는 추방은 커녕 4년 연임제 태수 직을 20년이나 유지하고 있고, 그녀는 예니사라이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사야의 형들 또한 예니사라이 자치령에서 정치적인 위상이 높다.
이사야의 맏형 에녹은 예니사라이 민회에서 제1당 당수**를 맡고 있고, 둘째 형 엘리야는 예니사라이 평의회 의원이다. 셋째 형 이스마엘은 예니사라이 법원**의 재판관이며, 넷째 형 이삭은 예니사라이의 행정관이다. 이사야의 형제들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예니사라이 자치령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사야는 여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사야의 형들이 왕도 샤흐리아즈의 궁정사회에 관심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 발라스 오빠가 여왕폐하의 남총이던 시절엔 파라와 파라의 오빠들이 왕도에서 얼마나 위세가 높았는지 생각해보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위험하다. 이사야 이 불여우는 반드시 쳐내야 하는 기물이다.
안그래도 시녀들에게서, 2왕자비 누르자한이 이사야 박사와 친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장기판에서 절대로 함께두어선 안되는 조합이다. 상황이 너무 불리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사야와 이리나 태수, 이사야의 네 형들이 2왕자 이스카의 파벌로 들어가서는 곤란하다. 에라르타 자치령의 아미르 태수도 이스카 왕자를 지지한다.
덕분에, 아미르 태수의 여동생이자 폐하의 측근시녀인 아마리가 달리아를 제치고 여왕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니사라이가 이스카 왕자의 파벌로 들어가는 걸 잠자코 볼 수 없다. 뭔가 수를 써야 한다. 왕비 자리를 누르자한에게 뺏길 수는 없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하그리아의 왕비가 되는 건 바로 나, 파리사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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