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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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만 (2) _ 파우지아 여사는 오랜만에 남동생을 만나러 재상 관저에 입성했다. 그녀는 남동생처럼 적발에 벽안을 가졌고, 우아한 자태와 큰 키는 명문가의 가주 다웠다. 남동생 아이라만보다 12살이 많은 중년의 귀부인이지만, 40대 특유의 푸근하고 부드러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아르샨 왕자의 대학입시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우지아 여사는 마누셰흐르 대학교가 위치한 예니사라이 자치령과 왕궁이 있는 왕도 샤흐리아즈를 오가며 바쁘게 살고 있다. 그녀의 남편 자발 교수는 마누셰흐르 대학교 법학교수이면서, 동시에 아르샨 왕자의 개인교사로서 공부를 직접 봐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아르샨 왕자의 실력으론 마누셰흐르 대학의 문턱을 넘을 가망이 없다. 마누셰흐르 대학교의 논술시험과 구술시험은 교수진 전원이 직접 출제하는 것이라, 매우 까다롭고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자발 교수가 아르샨 왕자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해버도, 다른 교수들이 낸 문제를 풀지 못하면 탈락이다. 학자로서 최고로 자부심 강한 교수들은 설령 왕족이라고 해도 실력이 모자라면 학생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자발 교수는 아르샨 왕자에 대해 "1왕자께선 고모인 마흐잔 박사나 아버지인 아이라만 재상을 전혀 닮지 않으셨어. 이런 쉬운 문제를 푸는 것도 버거워 하신다니까! 부인, 나는 차라리 1왕자비 마마를 가르쳐보고 싶소. 아르샨 전하를 마누셰흐르에 입학시키는 것보다 파리사티스 마마를 입학시키는 게 훨씬 쉬울 거요"라고 답했다. 파우지아 여사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8살 때부터 17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직접 키운 1왕자 전하다. 그분께 불손한 언행을 하는 자들을, 파우지아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남편에겐 허튼소리 말고 왕자 전하를 잘 가르치기나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르샨 전하는 하그리아의 1왕자이기 전에 파우지아에겐 하나뿐인 조카였다. 그래서 파우지아 여사는 예민해 질 수밖에 없다. 나심 여사가 키운 2왕자와 베샤카 여사가 키운 3왕자는 나날히 뛰어난 재능을 펼치고 있다. 하그리아의 왕위는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에게 상속된다. 고귀한 혈통을 가진 1왕자라고 왕위계승에서 유리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아직 수 많은 여정이 남아있다. 재상 관저의 근위병들과 시종들은 파우지아 여사를 확인하고는 절을 하며 예를 갖췄다. 시종들은 파우지아 여사가 찾아왔음을 재상께 고했다. 안내하는 시종을 따라 긴 회랑을 지나고 아이라만이 있는 내실로 들어왔다. 아이라만은 큰 누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누님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파우지아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귀부인 특유의 우아하고 근엄한 태도로 화답했다. "재상께서 저를 환영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니스산 포도주로군요. 귀한 물건을 손수 내주시니 저도 선물을 드려야겠지요." 파우지아는 품에서 붉은 비단주머니를 하나 꺼내었다. 아이라만은 반색하며 큰누나가 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주머니를 열자 곱게 빻아진 하얀 가루가 나왔다. 파우지아가 입을 열었다. "남편을 통해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 시메야 왕국에서만 생산되는 희귀한 물건이지요. 하그리아에선 유통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워낙 성분이 강해서, 함부로 쓰면 목숨에 지장이 생기거든요. 이것을 썼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아니 되어요." 아이라마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를 꼭 묶었다. "걱정마십시오. 누님. 이미 손을 써두었습니다." 아이라만은 포도주를 한모금 삼킨 뒤에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나라의 재상입니다. 여왕폐하 다음으로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게 접니다. 22살부터 33살인 지금까지, 제가 어떻게 이 자리를 지켰는지 누님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파우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스산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지만 불안한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남동생은 굉장히 재능있고 똑똑하다. 동생의 재능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해도 이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안다. 아이라만은 누나의 심정을 읽었는지, 파우지아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말했다. "누님, 이건 오직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천하고 어리석은 이들의 술수에 빠져서, 폐하께서 자신의 총명함을 흐리실까 봐 걱정하는 것 뿐입니다. 오히려 폐하께서 좋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골칫거리를 치워주는 셈이니까요. 여왕이라는 위치는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합니다. 그분을 대신해서 손을 써드리는 게 신하가 할 일이지요." 아이라만은 기분 좋게 포도주를 또 한 모금 들이켰다. 파우지아가 오기 전부터도 그는 포도주를 들이킨 것 같았다. 아이라만은 기분이 아주 좋거나 기분이 아주 안좋을때 과음을 한다. 파우지아가 생각하기엔 후자에 가까울 것이라 느껴졌다. 아이라만은 미소를 지었다. 술의 기운이 들어가서 그런지 그는 기분이 약간 풀려있었다. "2주 뒤에 폐하의 탄신연회가 열립니다. 왕궁주방에서 분주하게 연회음식을 준비하고 있지요. 올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폐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바칠 것입니다. 누님께서도 왕도에 왔으니, 기왕 폐하의 탄신연회가 끝날 때까지 머무르시지요. 누가 압니까? 그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궁정학자들이 기록할 만한 사건이 되겠군요. 역사의 산증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_ 흑해를 넘어 온 선박은 항구에 정박했다. 드디어 육지에 발을 디뎠다. 소흐랍 총독은 열흘 뒤, 여왕의 탄신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부속령에서 왕국령까지 배를 타고 건너왔다. 며칠간의 항해를 마친 승무원들과 육지에 내려서 여독을 풀기로 했다. 현재 북부는 소흐랍을 대신해서 아들 스피타만 왕자가 총독대리로서 통치하고 있었다. 스피타만은 14살 밖에 안된 나이임에도 북부 토호들과 관료들의 신임을 받고 있고, 훌륭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북부속령을 맡기고 왔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북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란을 잠재우는데 문제없을 것이다. 소흐랍은 항구의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들이마셨다. 며느리인 미르셀라를 데리고 와서 여왕폐하께 인사를 드리려했었다. 왕궁의 훌륭한 숙녀들과 달리 미르셀라는 유약했다. 파리사티스 왕자비는 13살 때부터 궁정사회에 발을 들였다. 미르셀라는 18살이 되도록 사교회에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으니, 이참에 예비 왕자비로서 인맥을 쌓을 수 있게 데려오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피타만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와서 미르셀라를 북부에 두고 가달라고 청했다. 미르셀라는 지금 마음의 병이 있으므로 이곳에 남아서 치료를 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흐랍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르셀라가 18년 평생 무슨 고생을 겪었다고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인가? 미르셀라는 마르다스 총독의 외동딸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서부속령에서 성장했고, 내 아들이자 하그리아의 3왕자 스피타만과 약혼했다. 그리고 북부속령에 온 뒤에도 예비 왕자비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소흐랍은 18살 때 왕도의 빈민굴에서 시정잡배 같은 남자들에게 맞거나 강간당했다. 소흐랍이 6살이 되던 해에 그의 비천한 어머니는 아들을 매음굴에 팔아버렸다. 성인이 된 후에도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왕자 스피타만이 태어나고 난 뒤에야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났다. 그런 자신도 마음의 병을 얻어 본적이 없었다. 자신을 겁탈하고 모욕하던 자들을 죽여버리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자살할 생각은 품지 않았다. 그리고 소흐랍은 상당한 지위를 얻게 되자 통쾌하게 복수를 성공했다. 옛날에 소흐랍을 강간했던 남자들을 찾아내서 고통스럽게 죽여버렸다. 미르셀라는 자신과 달리 부유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매음굴과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옛 모압왕가의 후손으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별다른 고생도 한 적이 없는데, 왕궁에서 인맥과 교양을 쌓으라고 데려가는 게 뭐 그렇게 나쁜 일인가? 오히려 미르셀라에게 좋은 일 아닌가? 상류층 여성에겐 필수적인 소양인데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예비 며느리를 때리거나 구박한 적도 없는데, 왜 스피타만은 나보고 '미르셀라를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지? 소흐랍은 눈썹을 찢푸렸다. 자수정처럼 보랏빛 눈동자에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흐랍은 그림 같은 미남이었다. 항구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흘깃 훔쳐볼 만큼 소흐랍은 정말 잘생겼다. 찌푸린 얼굴마저도 신의 형상을 담은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소흐랍은 얼음처럼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여왕폐하면 모를까, 낯선 이들이 자신의 육체를 탐닉하는 짓거리는 참을 수 없다. 짜증이 치민 소흐랍은 자신의 얼굴을 관모**로 가렸다. 외모 때문에 눈에 띄는게 싫다. 마차로 이동하기 전까지 어디 실내에 틀어박혀 있어야겠다. 소흐랍은 손짓으로 하인을 불렀다. 항구 근처에서 제일 인적이 드문 숙소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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