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흐라자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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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해를 두고 타흐마탄과 이스카는 비처럼 내리는 땀을 닦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오랫만에 검술 대련을 했다. 타흐마탄은 이미 완성된 상태지만, 이스카는 나날히 성장세를 보였다. 아마 이스카가 20살이나 22살 정도 된다면 검술이 최고 절정에 다다를 것이다. 타흐마탄은 아들에게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스카는 수통을 들이키며 벌컥벌컥 물을 마시다가 아버지의 미소를 보고 눈웃음을 지어 화답했다. "아직 아버지를 이기려면 멀었어요. 여태까지 승률은 47전 3승 44패 입니다! 제가 세 번이나 이긴게 진짜 용하네요!" 타흐마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석아! 나를 상대로 세 번이나 이긴 건 자랑할 일이야! 하그리아 장군들 중에서 나랑 호적수로 싸울만한 인간은 베라트 장군 뿐이야! 그 양반은 영웅 루스탐의 군대에서도 활약했던 사람이다!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직도 현역이라고!"
"베라트 장군은 저도 알아요! 제 유모의 남편이라서 저를 보러 자주왔어요. 저한테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영웅 루스탐 왕자와 내가 너무 꼭 닮았다고. 어마마마께서 왜 저를 후계자로 생각하시는지 알겠다고. 왕통을 이어야 하는 건 필시 내가 되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너를 아끼니까 그런 말도 하는 거지. 그게 다 관심이고 사랑이야. 아들."
"제가 왕이 되길 바란다고 말해주는 게 단순한 '관심' 정도인가요?"
타흐마탄은 수통을 바닥에 던지며 소리쳤다. "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그냥 평범한 애정과 관심이야! 네 유모인 나심 여사가 너를 키워준 것처럼! 베라트 그 양반도 똑같이 애정에 기반한 단순한 관심! 난 너와 부자간의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고! 너는 너야! 외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고, 너는 그냥 너일 뿐이야! 이스카!"
타흐마탄은 씩씩 거리며 소리쳤다. 그는 양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보며 말했다. 저녁노을을 등지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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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셀라 영애는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미르셀라의 대한 이야기가 없다. 미르셀라가 추운 북부 땅에서 적응은 잘 하는지, 가족과 떨어져서 슬픈지, 요새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같은 안부는 한 줄도 없다. 당연하다. 미르셀라의 어머니인 안나 부인의 관심사는 외동딸이 아니다.
안나 부인의 관심은 미르셀라가 스피타만 왕자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소흐랍 총독께선 북부에서 어찌 지내시는지만 편지로 물어볼 뿐이다. 어머니는 외동딸이 먼 북부속령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미르셀라의 마음속에서는 눈보라가 내리쳤다. 어머니까지도 미르셀라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하인들도 나보단 스피타만 전하나 시녀 시모나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미르셀라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시모나가 보거나 시아버님이 보셨다면 당장 눈물을 거두라고 다그쳤을 것이다. 예비 3왕자비는 채신머리 없게 울면 안된다는 말도 덧붙일 것이다. 하지만 미르셀라는 지금 자기 방에 혼자 앉아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미르셀라는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냈다. 누구도 미르셀라의 감정이나 상태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옛 모압왕가의 후손이자 서부 총독의 외동딸, 예비 3왕자비가 될 고귀한 아가씨. 그게 전부였다. 누구도 미르셀라 그 자체에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미르셀라를 낳아준 부모님마저도.
부모님은 여왕폐하의 명령으로 결혼하셨다. 두 분에게 결혼은 '의무'고, 자식을 낳은 이유는 고귀한 혈통을 이어야 하는 '책임'이었다. 두 분은 미르셀라가 태어난 뒤론 완전히 남남으로 살고 계신다. 후계자가 태어났으니 이제 자유롭게 살아도 무방했다. 어머니 안나 부인은 정부**를 두었고, 아버지 마르두스 총독은 측실을 두었다.
미르셀라는 그저 빨리 결혼시켜서 치워버리고 싶은, 그런 자식일 뿐이었다. 낳아주고, 키워주고, 고귀한 신분을 물려주었으니 충분히 부모노릇은 다했다는 것이다. 미르셀라는 침대에 엎어져 울었다. 눈물방울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도대체 나는 뭐하러 태어났을까?' 같은 자기혐오와 슬픈 생각들이 차올랐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미르셀라는 우는 걸 멈추었다. 누가 왔나? 잔소리 하는 시모나? 아니면 무서운 시아버님? 미르셀라는 재빨리 손으로 눈물을 닦고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했다. 목소리는 울었던 느낌이 나지 않게 가다듬었다. "...들어오세요."
미르셀라는 최대한 당당해 보이는 말투로 소리쳤다. 하지만 문 너머에 있는 인영은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미르셀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문 앞까지 걸어갔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못 들었나?'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러자 문 밑으로 종이 한장이 휭- 하고 날아 들어왔다.
미르셀라는 밑에서 날아들어온 종이를 발견하곤 몸을 숙여서 들었다. 거기엔 나를 찾아봐. 울보 아가씨. 라고 쓰여 있었다. 미르셀라는 문을 소리 나게 열었다. 하지만 바깥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