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7. 미르셀라
18. 타흐마탄
19. 스피타만
20. 셀림
미르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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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한 하늘은 뚜껑처럼 무거워서, 허구한 권태에 신음하는 내 마음을 짓누른다.
나는 둥그런 지평**을 한 아름에 껴안고, 밤보다 음침한 검은 햇빛을 온 몸으로 받아낸다.
땅 위는 축축한 토굴로 바뀌고, 나의 희망은 박쥐와 같이, 겁 많은 날개로 담벽을 치고, 썩은 천장에 대가리가 부딪치며 날아간다.
그치지 않고 쏟아지는 빗발은 널따란 감옥 창살을 방불케하고, 말없는 거미들은 우리 골 속에서 나와서 촘촘한 그물을 친다.
그때 불현듯 만신전의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뿌연 하늘을 향해 아우성친다.
수의**를 입은 나는,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처럼 길을 걷는다.
그리고 노래도 춤도 없는 가녀린 시체들은, 나의 넋 속에 천천히 줄지어 잠들고, 희망은 패하여 운다.
포악스러운 고뇌는, 숙여진 내 정수리에 검은 깃발을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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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거세게 치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좋지 않아서 북부속령의 사람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창문과 대문을 걸어잠그고, 실내에만 쳐박혀 있었다. 이런 날씨엔 바깥에 나가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위험한 일이다. 총독 관저도 마찬가지다. 눈보라가 내리치는 험준한 날씨엔 두툼한 가죽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난로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서 앉는다. 어떤 이들은 재잘재잘 떠들고, 어떤 이들은 삭바느질을 하고, 어떤 이들은 말 없이 타닥타닥 소리나는 불씨만 쳐다본다.
마르셀라는 벽난로 속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녀 시모나가 따뜻한 음료를 가져왔지만, 미르셀라는 한 모금도 들이키지 않았다. 미르셀라는 손에 쥔 종이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문 앞에 종이쪽지를 발견한 뒤에도, 누군가가 미르셀라를 위해 쪽지를 보냈다. 이제 쪽지는 9장이나 된다. 9장의 쪽지는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다. 미르셀라 옆에서 열을 쬐고 있던 베샤카 여사가 말을 걸었다. "미르셀라 아가씨, 손에 쥔 쪽지는 뭔가요?" 미르셀라가 화들짝 놀라서 옆을 바라보았다.
3왕자 스피타만의 유모인 베샤카 여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 깜짝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미르셀라 아가씨께서 만지작 거리길래, 혹시라도 정인**이 보낸 쪽지가 아닐까~ 궁금했어요." 미르셀라는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며 해명했다. "아니에요! 제가 무슨 정인이 있다고요! 놀리지 마세요! 전 스피타만 전하의 약혼녀라고요!" 베샤카 여사는 쿡쿡 웃었다. 그녀는 미르셀라에게 짓궂은 장난이나 말을 많이한다. 그녀는 왕자의 유모이면서 동시에 재능있는 화가다.
또 그녀는 동부속령 바라즈 총독의 여동생이고 하그리아 외무대신의 아내다. 그녀는 자신의 두 아들들과 스피타만 왕자를 함께 키웠다. 스피타만 전하와 두 아들들에게 그림재료를 가지고 놀게했다. 스피타만 왕자는 유모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초상화를 아주 잘 그린다. 스피타만 전하는 시종들이나 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리셨다. 주로 초상화의 주인공은 시아버님이다. 소흐랍 총독 각하는 완벽한 조각상처럼 생겨서, 인체를 그리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뭐~ 아무렴 어때요~ 아가씨 나이면 사랑에 불타오를 나이죠~ 그런데 약혼자는 아직 14살 밖에 안된 꼬마고, 시아버님은 무섭고, 북부는 날씨가 요란하게 춥잖아요~ 여자들은 원래~ 멋진 애인이랑 불장난을 하고 싶은 법이랍니다. 여왕폐하를 보세요! 늠름하고 아름다우시니 잘생긴 남자들을 거느리잖아요! 미르셀라 아가씨! 결혼하기 전에 불장난을 쳐봐요~" 베샤카 여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벽난로 주위에 앉아있던 시녀들이 까르륵 웃었다. 미르셀라는 부끄러워서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랐다.
베샤카 여사는 옛 마르카니아 왕국의 직계후손이다. 마르카니아 왕국은 영웅 루스탐에게 병합되어 동부속령이 되었다. 라지한의 치세에도, 샤흐라자드의 치세에도 '동부속령 마르카니아'는 변심없이 충성을 다하고 있다. 베샤카 또한 하그리아 왕실의 대한 충성이 높다. 그녀는 스피타만에게 누구보다 헌신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스피타만 왕자를 모시기위해 남편과 아들들이 있는 중앙, 친정이 있는 동부속령과 멀리 떨어진 북부속령으로 자진해서 건너왔다. 스피타만 왕자는 14년 평생 동안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준 베사캬 유모를 어머니처럼 생각한다.
샤흐라자드 여왕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모성애를 유모인 베샤카가 보여주고 있으니까. 스피타만 왕자는 어머니를 가족이 아닌 일국의 군주로 생각했다. 미르셀라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안나 부인은 옛 모압 왕가의 후손이다. 자신이 모압 왕가의 혈통이란 것을 자부심으로 생각했다. 베샤카 여사도 왕족의 후손이지만, 그녀에겐 마르카니아 왕족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 "몇 십년 전에나 왕족이지, 지금은 아니잖아요? 사람 몸에서 나오는 피는 모두 붉은데 왕족이라고 뭐가 그리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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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님께서 왕도로 출타하신 뒤로는, 미르셀라의 마음은 약간이나마 안정되었다. 미르셀라는 원래도 유약한 성격이였지만, 북부에 온 뒤로 몸과 마음이 쇄약해졌다.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피타만 왕자의 약혼녀다. 미르셀라는 북부에 온지 2년이 되었건만, 스피타만과 직접 대면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스피타만 왕자는 바빴다. 북부 총독 대리로 공무, 그리고 칸페자 교수에게 사사받는 중이라 여유시간이 없다. 스피타만과 미르셀라의 관계는 '정략혼'이다.
미르셀라의 부모님도 정략혼으로 맺어지셨다. 두 분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남편과 아내 '역할'에 충실했고, 평소엔 각자의 연인과 어울렸다. 스피타만 전하와 나의 관계도 부모님처럼 되는 걸까? 스피타만 전하의 생각은 어떠한지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스피타만 전하는 바쁘다. 게다가 아직 미성년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엔 14살, 18살은 너무 어리고 미숙하다. 미르셀라가 16살 때, 스피타만 왕자는 12살이었다. 그때 스피타만은 그저 천사처럼 예쁜 소년이었다.
지금 14살이 된 스피타만은 소년에서 남자로 변하고 있다. 변성기가 찾아와서 목소리는 굵은 저음을 내고, 손과 키는 미르셀라보다 훨씬 커졌다. 아마 성인이 되면 지금보다 더 커질 것이다. 미르셀라는 스피타만을 볼 때마다 금새 바뀌는게 보였다. 은발머리에 흰 피부, 녹색눈을 가진 왕자는 소흐랍 총독과 샤흐라자드 여왕을 빼어닮았다. 시아버님의 외형을 더 많이 닮았지만, 시아버님처럼 차갑고 냉정한 성품은 아니다. 스피타만이 미르셀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아직 어른들이 하는 육체적인 접촉은 없지만, 열여덟이 된 아가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데엔 충분했다. 스피타만 전하를 떠올리며 부끄러운 꿈을 꾸는 데엔 충분한 자극이었다. 언젠가 베샤카 여사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스피타만 전하께서 16살이 되시면, 두 분은 공식적인 부부로서 같은 침실을 써야해요. 왕손을 낳아서 하그리아 왕실을 번창시켜야 하지요. 전하와 아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라면 정말 예쁠거에요~"라고 말이다. 전하와 왕손을 만드는 건 어떤 느낌일까?
아니 잠깐, 스피타만 전하께선 아직 미성년자인데, 이런 생각은 너무나도 불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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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맛 로쿰과 뜨거운 커피는 환상적인 궁합이다. 이사야는 졸린 눈을 비비고 늦은 아침에 자신을 방문한 누르자한을 맞이했다. 여왕께선 새벽부터 정무를 보러 나가셨다. 이사야는 잠옷차림에다가 제대로 손님맞이할 기운은 없었지만, 누르자한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누르자한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달콤한 로쿰과 쓰디쓴 커피는 환상적인 조합이지요. 박사님을 위해 가져왔습니다." 이사야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로쿰은 두개 집어서 입에 털어넣었다.
"고맙습니다. 2왕자비 마마.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네요. 저는... 요즘들어 자꾸 혹사당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폐하의 처소는... 오직 폐하를 기준으로 맞춰져 있으니까... 폐하께선 커피를 싫어하고 단 걸 안드세요. 그리고... 저는 아침잠이 많아요... 그치만 폐하는 일찍 일어나시니까... 물론 폐하가 싫다는 건 아닌데...그리고...좀...그 뭐냐...관계도...너무 강압적이세요..."
"저런, 폐하께선 배려가 부족하세요. 세심함을 모르지요. 그분은 전장에서 자랐기 때문에 남자들이 모두 군인인줄 알아요. 무척 험하게 대하지요."
"...폐하가 아주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를 진짜... 하...뭐라 해야하지...종마? 남창? 딱 이정도로 부리시는 것 같아서... 제가 이래뵈도 궁정학자고, 마누셰흐르 대학교를 17살에 입학해서 25살에 졸업했거든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수재 소리 듣고 살았어요. 저는 제가 학자로서 이 나라와 폐하를 위해 봉사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 제가 몸으로 폐하께 봉사할 줄은 몰랐어요... 이럴꺼면 뭐하러 대학을 졸업했는지... 자괴감 진짜 많이 들고... 사람들도 저를 궁정학자가 아니라 남자애첩으로만 봐요."
"저도 그 심정 알아요. 저는 원래 무희였어요. 제 삶의 목표는 역사에 남을 훌륭한 무용수가 되는 거였어요. 남들보다 수 천배로 연습하고,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서 연습했어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최고로 춤을 잘 추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거든요. 30살이 넘으면 은퇴하고 무용선생이 되어 제자들을 양성하려 했고요. 그런데 제가 2왕자 전하랑 결혼하게 되니까. 더 이상 춤을 출 일이 없어졌어요. 사람들은 모두 저를 '왕자를 유혹해서 신분상승한 천한 여자'로 바라볼 뿐이에요."
"맞아요. 저도 비슷해요! 진짜... 저는 폐하를 유혹하거나 그런적 없어요! 그땐... 폐하인 줄도 모르고... 전 진짜 억울해요! 며칠 전에 발라스 경이 저한테 뭐라고 말했는 줄 아세요? 불여우래요. 학자라는 인간이 연구는 안하고 권력에 기웃거리기나 한다고!"
누르자한과 이사야는 서로의 인생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인생의 굴곡도 비슷한 둘은 정오기도 전까지 대화를 쭉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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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엔 샤흐라자드 여왕의 탄신연회다. 베라트 장군과 타흐마탄 장군은 그들이 가진 전리품들을 늘어뜨려 놓고 여왕께 바칠만한 적절한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타흐마탄은 그냥 단순히 아무거나 골라가면 된다고 했지만, 베라트 장군은 "허!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여왕폐하께 드릴 물건은 최상품 중에서 최상품으로 골라야지!"라고 호통을 쳤다.
그에 답해 타흐마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짜피 남들도 다 똑같이 생각합니다. 우리 여왕님은 되게 단순한고 직관적인 분이세요. 뭐 요란하고 화려한 거 말고, 그냥 적당히..."
"그냥 적당히? 자네 그게 가당키나 할 소리인가? 우리는 폐하의 신하고 하그리아의 장군이야! 폐하의 탄신연회엔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방문할텐데! 당연히 훌륭한 물건을 골라서 바쳐야지! 팔랑카르 족의 보물인 수정해골! 백색해에서 채굴한 흑진주! 동방에서 수입한 최고급 비단!"
"아 글쎄~ 남들도 다 똑같이 생각하거든요? 차라리 좋은 말 한마리 드리는게 나아요. 우리 여왕님은 뼛속까지 군인이라 승마 실력이 우리보다 더 뛰어나요. 그런 사치품을 바칠 사람이라면 백색해부터 마르카니아 국경까지 널리고 널렸어요!"
"타흐마탄! 자네는 2왕자 전하의 아비이지 아니한가! 자네의 품행은 이스카 왕자 전하의 미래에도 영향을 끼친다네. 차기 국왕의 아버지가 된다면 선물 고르기는 아주 중요한 문제야!"
"아오~ 쫌! 그만하세요! 영감님! 뭐 아직 1왕자, 2왕자, 3왕자 전부 핏덩어리들인데 뭘 그리 보채세요? 아직 누구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런 것도 없어요! 제가 18살 때부터 지금 이 나이 먹을 때까지 20년이나 우리 여왕님 곁에 있어서 잘 알아요. 괜히 안하던 짓 하지 마세요. 자기 눈에 거슬리면 숙청한다구요~ 영감님 61살이나 되셨는데 더 오래오래 살아서 증손주들도 봐야지요~"
타흐마탄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베라트 장군은 뭐라뭐라 잔소리를 했지만 타흐마탄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이런 순간에는 딴 생각을 하는게 최고다. 타흐마탄은 18살에, 처음으로 샤라를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당시 샤라는 19살이었다.
당시 타흐마탄은 샤라가 고용한 용병단의 두목이었다. 18살이 두목일 정도로, 용병의 세계는 수명이 짧다. 이 용병단에서 가장 어린 용병은 10살이고, 제일 나이많은 용병은 29살이다. 그만큼 용병은 오래 목숨부지 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이 당시 타흐마탄은 자신들의 고용주이자 갑옷을 입고 군대를 이끄는 대장이 여자라는 걸 알고 크게 놀랐었다. 평생을 살레굽 제국에서 살던 타흐마탄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살레굽 제국에선 여자가 군을 이끈다는 건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 타흐마탄은 여자가 갑옷을 입고 남자 노릇하는 꼴을 못보던 놈이었다. 그래서 이 여자 대장에게 시비를 걸었고, 맷돼지 같은 샤라를 건드려서 아주 제대로 맞았다. 살면서 이렇게 힘쎄고 무서운 여자는 처음이였다. 타흐마탄은 용병 중에서도 꽤 강한 축에 들었다.
하지만 샤라는 타흐마탄보다 더 강했다. 아니, 어자가 뭐 이렇게 힘이 쌘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걷어차이고 후드려 맞고, 어금니까지 뽑혔는데, 얼얼한 것은 몸뚱아리가 아니라 정신이었다. 아아, 세상엔 진짜 무지막지하게 강한 녀석이 있구나.
공주님이라길래 폼으로 입은 갑옷인 중 알았는데, 이 분은 실전형이구나. 밉보이는 짓은 하지말고 납작 엎드려야겠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해야겠다. 절대 개기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머릿속에 복종이 각인되어서 38살이 된 지금까지 붙잡혀 살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