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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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8. 타흐마탄 19. 스피타만 20. 셀림 _ 그대, 묻노니, 돌아갈 곳이 있소? 그대, 다시 묻노니, 돌아갈 곳이 있소? 세상 살아보니, 귀한 것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오. 당신도, 나도, 신께서 빚어주고, 어버이께서 잉태하셨지. 그러니 참척**과 천붕**의 고통이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것이오. 천고의 기쁨은 자식이 태어난 것, 만고의 기쁨은 자식이 무사히 성장하는 것,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자식이 자식을 낳는 것이오. 천상의 보물을 준다 한들, 자식보다 더 귀하겠소? 어버이가 태어난 땅에서 자식이 태어나고, 어버이가 죽은 땅에서 자식이 죽는다오. 모든 생명은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오. 이 세상에 부모없이 잉태한 열매는 없소. 그러니, 내 다시 묻소. 그대, 정녕 돌아갈 곳이 없소? _ 내가 9살이던 때,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을 하셨어. "타흐마탄, 너는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게 무엇이냐?" 당시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 도련님이었어. 그래서 할아버지의 물음에 그저 철없이 대답했다. "할아버지, 나는 귀족이에요. 나는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을 거에요! 할아버지의 가문을 이을 거에요!" 할아버지께서는 쓸쓸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어. "그런 것 말고. 네가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이 있니? 귀족이라는 것은 생독적인 신분이란다. 신분이란 것은 인간들끼리 만든 약속이야. 즉, 인간들이 만든 약속이니 인간들이 깨버릴 수도 있는 것이란다. 타흐마탄, 내 손자야, 너는 정녕 하고 싶은 것이 없느냐?" 당시 나는 아홉살 꼬맹이였어. 할아버지의 슬프고 간절한 눈빛을 보고도 전혀 뜻을 모르던, 한낱 멍청하고 어리석은 말썽꾸러기 손자였지. 하그리아 공용어를 처음 배울 때처럼 멍청했어. 살레굽 어로 다정하게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이게 마지막이었는데, 왜 이런 변변찮고 시덥잖은 대답을 했을까? 아직도 내 10살 생일을 기억해. 그날 할아버지는 참형을 당했어. 가신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지. 내 가문은 황태자 슐레이만을 지지했어. 그러나 새롭게 황태자가 된 무스타파는 자신의 정적인 슐레이만과 그의 수족들을 모조리 참살했지. 그 잔인한 황태자 무스타파는 황위에 올라 살레굽 황제 무스타파 3세가 되었어. 8명의 황비들과 22명의 후궁들을 거느리고, 23명의 황자들과 11명의 황녀들을 낳았어. 무스타파 3세의 치세는 굳건해. 그러나 내 인생은 완전히 짓뭉개졌어. 할아버지의 잘린 목을 바라보며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어. 무너진 폐허 속에서 나는 혼자였어. 내 유일한 혈육은 할아버지 뿐이었지. 부모님은 내가 태어났을 때 돌아가셨어. 할아버지의 가신들도 모조리 참수를 당했고, 가문의 노예들은 다른 곳으로 팔려갔어. 나는 갓 10살이 된 어린 사내아이라서 참형은 면했어. 하지만 나는 죄인의 가족이었으므로 천민으로 전락했어.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맨몸으로 살아가기엔 내 몸은 너무 어렸어. 나는 처음엔 거지들과 지냈지. 그들에게서 구걸하는 방법을 배웠어. 다른사람의 동정을 받으면 운좋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지. 그러다가 길을 가던 상인이 내 몸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나를 붙들고 노예시장으로 데려갔어. 노예시장은 씻기고 입히고 끼니도 챙겨주어서 좋았어. 물론 나는 상품이므로 손님들은 매번 상한 곳이 없는지 구석구석 내 몸을 확인했지. 40살 쯤 된 중년 남자가 나를 샀어. 그는 나를 노예 검투장으로 데려갔어.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소년들이 족히 100명은 되었어. 서로 죽고 죽이는 결투를 벌이기 위해, 하루종일 죽어라고 훈련을 받았어. 내가 어릴적 교양으로 배웠던 검술은 여기선 쓸모가 없었어.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검을 쥐었어. 오늘 살아남아야, 내일 아침에 식사를 할 수 있어. 오늘 살아남아야, 내일 밤에 잠을 잘 수 있어. 그저 살아남는 게 삶의 희망이고 소원이 되었어. 운명의 여신들이 인간의 삶을 짜낸다고? 그녀들은 가혹하게 물레를 돌리는 마귀할멈들이야! 내가 13살이 되었을 때, 검투장 주인은 나를 용병단에 팔았어. 미쳤어! 용병에 비하면 검투 노예는 안락한 직업이야! 검투 노예들은 모두 검투장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훈련도 시켜주지. 서로 결투를 벌여서 죽고 죽이는 걸 빼면, 학교랑 다를게 없어. 하지만 용병의 세계는 아주 지독해! 먹고, 자고, 입고, 싸우는 거 전부 스스로 해야 돼! 돈 몇푼 때문에 목숨이 날아갈 뻔한 경험은 셀 수도 없어. 용병 중에선 노름에 미쳐있거나 술독에 빠져살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 놈들이 많아. 근데 그럴 수 밖에 없어! 완전 미쳐버리는 곳이거든! 전쟁터에서는 맨 앞 열에서 화살받이로 쓰이다가 죽어. 어느 미친 마술사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산 제물이 필요해지면 용병을 사다가 바치지. 산채로 내장을 꺼내서 점을 친단 말이야! 차라리 싸우다가 죽고 싶어. 아니 그냥 죽고 싶어. 자살을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 그냥 내 목에 칼을 들이밀면 할아버지가 생각났어. 할아버지는 내가 어른이 되면 뭐가 하고 싶냐고 물어봤거든, 그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내가 죽고 싶어질 때마다,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떠올라. 젠장, 그래서 자살을 못했어. 자살이 더 좋았으려나? 난 16살이 되었을 때 완전히 인간말종이 되었어. 목숨을 걸고 번 돈을 노름에 쓰고, 여자를 사는데 썼어. 하루 벌어서 하루 살이하는 인간들이 그렇듯이, 질나쁜 이들과 어울리며 살았지. 내 인생은 시궁창이었어. 그냥 이대로 살다가 운나쁘면 죽는구나 했지. 그러다가 내가 18살이 되었을 때, 난 미친 여자를 만났어. 샤흐라자드, 내 정신머리를 완전히 뜯어고쳐 준 무시무시한 맷돼지 같은 여자. 난 지금도 신기해. 샤흐라자드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나보다 더 강할까? 샤흐라자드는 공주님이었어. 나라와 왕좌를 되찾으려고 하는, 이를테면 반역자였지. 그렇지만 그럴듯한 군사력을 가졌고, 유능한 측근들도 있어. 나보다 고작 1살 많은 여자인데 어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주어진 내 인생을 따라가기만 했었는데, 샤흐라자드는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고 하잖아. 정말 신기했어. 사람이, 여자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말이야. 그래서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시비를 걸었지. 젊은 여자 대장이라고 말을 안듣고, 동료 용병들과 시비를 걸었지. 어떻게 반응할까? 씩씩 화나서 울거나 다른 남자 부하에게 혼내라고 명령하려나? 아니었어. 그냥 나와 내 동료들에게 다가오더니 우리를 맨주먹으로 개 패듯이 팼어. 진짜 아프더라고. 나도 꽤 강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는데, 샤흐라자드는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엄청 강했어. 내가 지금까지 겪은 사람 중에서 제일 강해. 진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 내가 19살이 되었을 때, 샤흐라자드는 반란에 성공해서 여왕이 되었어. 다른 용병들은 두둑한 수고비를 받고 하그리아를 떠났어. 난 하그리아에 남았지. 하그리아 공용어로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 "당신은 왜 이렇게 강한 사람인가요?"라고 말이야. 샤흐라자드는 또렷한 살레굽 어로 "왜 그대는 고향인 살레굽으로 돌아가지 아니한가? 그대의 동료들은 모두 넉넉한 보수를 받고 하그리아를 떠났소"라고 내게 말했어. 나는 투박하고 어색한 하그리아 공용어로 대답했지 "난, 돌아갈 곳이 없어. 난, 여기 있을래"라고 말이야. 샤흐라자드는 의아했지만 그냥 맘대로 하라고 했어. 그녀는 나에게 하그리아 공용어를 가르쳐 줄 선생을 붙여 주었지. 나는 왕궁에서 먹고, 자고, 하그리아 공용어와 궁중예법을 배웠어. 그런데 난 공부가 영 적성에 맞지 않았어. 난 귀족으로 태어나서 10살까진 도련님이었던지라 궁중예법은 쉽게 익혔어. 하지만 시궁창 인생으로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하그리아 공용어는 실력이 늘지 않더라고. 내 발음은 너무 어색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장은 머릿속에서만 떠돌고 입밖으론 잘 나오지 않더라고. 내가 하그리아 공용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게 된 건, 샤흐라자드의 연인이 된 뒤였어. 잠자리에서 서로 몸을 섞다보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언어를 습득하게 되더라고. 내가 22살, 샤흐라자드가 23살 때 이스카가 태어났어. 샤흐라자드는 내가 아버지라고 했지. 갓난아기인 이스카는 작고 약했어. 이스카. 모든 아기들이 그렇듯이 너도 아기였을 때 엄청 울었어. 성장하는 너를 두고 사람들은 천재네, 영웅 루스탐의 재림이네, 뭐라고 참 많이들 떠들더라.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너는 많이 울던 아기였어. 지금도 봐. 16살이 된 너는 쓰러진 아내를 붙잡고 울고 있잖아. 누르자한의 눈과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어. 이건 독에 당한거야. 누군가 네 아내를 독살한거야. 정신차려. 울지말고 일어나 이스카. 네 아내를 죽인 사람을 찾아내야지. 여왕의 탄신연회에서 2왕자비를 독살한 사람이 누굴까? 피눈물을 머금고 천천히 생각해. 인생이란 건 원래 가혹하기 짝이 없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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