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흐마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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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탄신연회는 화려한 축제의 장이였다. 여기저기에서 여왕께 예물을 드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누르자한은 왕자비가 된지 반년도 안된 상태라서 황홀한 표정으로 탄신연회를 감상했다. 물론 무희출신인 누르자한은 으리으리한 저택이나 궁전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춤을 추고 흥을 돋구는 역할이었지.
내빈**으로 참석한 건 처음이었다. 누르자한은 왕자비이기 때문에 호화롭고 좋은 자리를 배정받았다. 연회장 중앙에는 여왕께 바칠 선물들이 연달아 쏟아졌다. 아름다운 목걸이, 화려한 귀걸이, 누르자한은 처음보는 진귀한 보석들이 많았다. 누르자한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여왕이 되면 이런 보물들을 매년 생일마다 받는구나!"
하지만 누르자한의 옆에 앉은 남편 이스카 왕자는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올해는 어마마마께 바치는 선물들이 형편없네. 백성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올해 탄신일은 검소하게 지낸다더니. 정말 수수하기 짝이 없구만." 누르자한은 깜짝 놀라서 옆에 앉은 남편에게 말했다. "어머! 전하, 이 연회와 선물들이 수수하다고요?"
"그래, 어마마마의 탄신연회 중에서 올해가 제일 수수해. 원래는 이것들보다 세 배는 더 많은 선물을 바쳐야 하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백성들이 힘들면 봉기가 일어나니까. 그깟 선물 조금만 받고 왕국이 평화롭다면 그게 어마마마께 훨씬 낫지." 이스카는 포도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탄신연회도 매년 보다보면 지겨워."
누르자한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왕족들의 세계는 누르자한이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사치스럽구나 싶었다. 그때 건너편에 앉은 파리사티스 왕자비와 여왕의 시녀 달리아 영애가 일어나서 2왕자 부부에게 다가왔다. 파리사티스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2왕자 전하와 2왕자비를 뵙습니다. 연회가 지겨우신듯 하군요."
이스카도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렇죠. 올해는 굉장히 소박하게 치뤄지니까요. 어마마마께 바쳐진 선물 중에서 그나마 괜찮게 봐줄만한 물건이라곤 소흐랍 총독이 바친 흑진주와 아버지께서 바친 다마스 강철검 뿐이네요. 나머지는 더 볼필요도 없는 하등품이잖아요." 파라는 감정을 누르고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라만 재상이 바친 선물을 하등품이라고 말을 하다니. 싱긋웃으며 파라와 1왕자를 물먹이는 소리를 하고 말이야. 이스카의 옆에 있던 누르자한은 풋- 하는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아보이자 달리아가 말을 이었다. "왕자 전하와 왕자비 마마를 위해 니스산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함께 음미하시지요."
달리아가 손뼉을 치자 궁녀가 황금 쟁반 위에 포도주와 황금잔을 바쳐들고 왔다. 달리아가 말했다. "파리사티스 마마께서 일전에 있었던 일에 사과드리고 싶어서. 힘들게 구해 왔습니다. 니스산 포도주를 같이 들면서 화해를 하고 싶으셔서요." 이스카가 말했다.
"저희에게 포도주를 청하는 것보다는 어마마마께 청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니스산 포도주는 당도가 높아서 어마마마께선 안드시지만, 니스산 포도주가 정말 극상품이라 저도 마셔본 적은 몇번 없지요. 하지만 재상 각하의 며느리이신 파리사티스 마마께서 힘들게 구할 정도는 아닌 것 같네요. 니스 태수가 재상 각하의 배우자니까요."
파라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기껏 생각해서 호의를 베푸려고 하는데 자꾸 이런 건방진 소리나 하고 있으니 참기 어려웠다. 이스카 왕자는 파라의 표정을 읽었는지 말을 멈추고 포도주와 잔을 든 궁녀에게 손짓했다. 붉은 보석이 상감된 황금잔과 녹색 보석이 상감된 황금잔은 화려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가졌다.
"이 두 개의 황금잔은 3년 전에 베라트 장군이 헌상한 물건이네요. 빛깔이 좋은 상등품이에요. 니스산 포도주를 담기엔 적격이지요. 마마께서 좋은 잔을 고르셨군요." 이스카는 우아하게 손을 들어 포도주를 황금잔에 담았다. "누르자한은 니스산 포도주 처음보지? 이건 하그리아 왕국령 남쪽에 니스 섬에만 생산되는 최상급 포도주야."
누르자한이 답했다. "저도 알아요. 전하, 마셔본 적은 없지만 귀한 술이란 것은 알고 있었어요." 이스카는 왼손으로는 녹색 보석이 상감된 잔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붉은 보석이 상감된 잔을 들었다. "어느 잔으로 마실래?" 누르자한은 붉은 보석이 상감된 황금잔을 들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요. 붉은 보석이 장미처럼 아름다워요."
이스카는 씩 웃었다. "그래, 너처럼 아름다우니까. 좋은 잔을 골랐네. 어서 한모금 마셔봐. 당도가 높고 색이 예뻐서 장미술 같으니까." 누르자한은 발그레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니스산 포도주는 달콤했다. 꽃향기처럼 좋은 향이나고 감미로웠다. 포도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마셔봐도 좋은 술이란 건 알 수 있다.
이스카가 피식 웃었다. "맛이 어때?" 누르자한은 잔을 비우고 대답했다. "근사해요. 달고, 좋은 냄새가 나고, 제 몸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요. 원래 포도주가 이런 술인가요?" 파라가 대답했다. "니스산 포도주는 원래 그런 술이랍니다. 아이라만 재상께서 자주 드시지요." 달리아가 입을 열어 말했다.
"제 남동생 이스마일이 니스 태수의 사위가 되어서, 니스산 포도주를 접할 기회가 생겼어요. 이스마일은 니스산 포도주를 마신 뒤로는 다른 술은 거들떠도 안보게 되었어요." 누르자한이 기꺼워하며 말을 했다. 그녀는 말을 잇는 것 조차도 어려워했다. "정말... 맛이 좋아요...이렇게 좋은 술은... 난생... 처음이에요..."
쿨럭
누르자한은 입에서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누르자한의 눈과 코에서도 피가 뿜어져내렸다. 붉은 피는 누르자한의 하얀 피부와 하얀 드레스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누르자한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포도주 쟁반을 든 궁녀가 비명을 질렀다. 연회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달리아는 입을 틀어막았고, 파라는 치료사를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이스카는 쓰러진 누르자한을 붙잡고 정신없이 흔들어보았다. 누르자한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인형처럼 생명의 온기가 차갑게 식어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