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4. 달리아
15. 샤흐라자드
16. 아이라만
17. 미르셀라
18. 타흐마탄
19. 스피타만
20. 셀림
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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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카락은 붉게 빛나는 금빛.
나의 목숨인 당신, 나의 가장 가까운 연인, 아름다움의 제왕인 붉은 공주.
당신은 나의 생명, 나의 천사, 천구 위를 날아다니는 나의 숨결이오.
당신은 나의 여름, 나의 진실한 사랑, 내 삶의 의미, 내 마음속 깊이 새겨진 조각 같은 나의 사랑, 나의 장미라오.
당신은 나의 행복, 내 안의 사랑스러움, 가장 밝게 빛나는 나의 별, 나의 금성이오.
당신은 나의 바다, 나의 진주, 나의 산호, 밤 하늘의, 노을의 빛이라오.
당신은 나의 구원, 나의 영혼, 나의 보물, 나에게 고통과 환희의 추억을 안겨주는 운명의 여인이오.
당신은 나의 이슬, 나의 눈물, 내 인생을 부숴버린 가장 잔인한 귀부인이오.
당신은 나의 궁전, 나의 왕국, 내가 다스리는 도시와 마을과 신전들이고, 나의 이스르엘이자 나의 예리고스와르디이자 나의 샤흐리아즈라오.
당신의 머리카락은 붉은 금발이고, 피부는 상아의 빛과 같고, 눈빛은 장난으로 가득하오.
나를 희롱하는 매혹적인 붉은 공주여,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라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가슴을 열어서 뜨거운 피를 뿜어내는 붉은 심장을 꺼내어 보이겠소.
오, 신을 믿지 않는 나의 사랑, 나의 사랑스러운 붉은 공주.
당신 앞에서 계속 그대를 찬양하리, 그리고 노래하리.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망가뜨린, 눈물과 아집으로 가득 찬, 나는 당신의 연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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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는 자신의 붉은 금발을 자랑스러워한다. 시인들의 노랫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환희와 칭송에 걸맞게 그녀는 항상 이목을 끌고 당당했다. 장밋빛 뺨과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훌륭한 교양을 갖춘 사랑스러운 숙녀다. 대대로 궁정학자를 배출하는 가문에서 태어난 달리아는 학문적인 소양도 출중하다.
19살이 된 달리아는 하그리아에서 손에 꼽는 명문가의 후계자다. 그녀의 어머니 파우지아 여사는 1왕자 전하의 유모이자 여왕폐하의 측근 중 한명이다. 어머니의 영향아래 달리아는 자연스럽게 궁정사회에 발을 들였다. 달리아는 하그리아에서 가장 지체 높은 미혼여성이다.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인간적인 매력은 달리아를 더욱 빛나고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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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의 아버지 자발 교수는 현재 마누셰흐르 대학교의 법학교수이다. 아버지는 시메야 왕의 아들이지만 서자라서 왕위계승권은 없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시메야 왕국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종종 해주신다. 시메야 국왕 길랍 8세는 달리아의 할아버지고, 그의 후궁이신 할머니는 아버지를 낳은 뒤에도 지속해서 왕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셨다고 한다.
왕비의 소생이 아니라서 왕위를 이을 적법한 왕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아주 유복하고 화목한 환경에서 성장하셨다. 19살이 되자 학자가 되고 싶어서 마누셰흐르 대학교에 진학했다. 부왕인 길랍 8세는 매년 학비와 생활비 외에도 각종 선물을 꾸준히 보내주셨다.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졸업을 한 뒤에도 길랍 8세는 자신이 총애하는 서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아버지는 마누셰흐르 대학생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금전적인 걱정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셨다. 교수가 될 때까지 마누셰흐르 대학교의 조교나 강사로 남아있다가 정 안되면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시메야 왕국의 궁정학자 자리를 달라고 청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동기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의외로 수재 중에 수재들만 모여있는 마누셰흐르 대학교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학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은 꽤 드물다고 한다. 아버지의 대학 동기 중에선 금전적인 이유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졸업증이 아닌 수료증만 받고 대학을 떠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이 교수가 될 수 있던 이유는, 스스로 똑똑한 것도 있지만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타고난 덕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달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감있게 말씀하셨다. "달리아,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란다. 너는 나를 닮아서 축복받은 환경을 타고났고 재능과 미모까지 가졌단다. 우리 가문은 왕실들과도 인연이 깊지. 너는 나만큼 똑똑하니까 여왕폐하의 시녀로 들어가도 잘 지내게 될 것이란다.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내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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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의 남동생은 누나인 자신보다 멍청하고 순종적이다. 달리아의 남동생 이스마일은 니스 자치령의 후계자 다나 영애와 결혼했다. 니스의 데릴사위가 된 이스마일은 처가살이로 고생하고 있다. 평생을 왕도에서 살다가 아내만 보고 니스 섬으로 이주했는데, 따뜻하고 온화한 니스 섬의 기후와 달리 이스마일의 장모님은 아주 까다로운 분이라 사위인 이스마일을 못살게 군다고 한다.
이스마일의 배우자인 다나 영애는 차기 니스 태수가 될 몸이라 아주 공사다망하고, 장인어른은 왕도에 살고 계신지라, 장모님께서는 툭하면 사위를 불러서 별의별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며 처가살이의 애환이 절절히 담긴 편지를 식구들에게 보낸다. 달리아는 남동생이 보낸 편지들을 읽을 때 마다 '이 녀석도 참 고생이구나' 하며 불쌍한 남동생에게 심심한 위로가 담긴 답장을 써서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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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의 장모인 두나자드 부인은 니스 자치령의 태수이다. 그녀는 올해로 43살이 된 귀부인이다. 그녀가 까다롭고 예민한 성정이 된 것은 그녀의 인생을 들어보면 납득 할 수 밖에 없다. 두나자드가 6살이던 해에 니스 왕국은 영웅 루스탐에게 복속되었다. 니스 왕국의 후계자였던 두나자드는 니스 자치령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영웅 루스탐이 죽고 하그리아에선 폭정왕 라지한이 치세를 이어갔다.
폭정왕의 치세동안 니스는 독립해서 다시 왕국이 되었다. 두나자드는 21살 때 어머니에게 니스 왕국을 물려받고 니스의 새 여왕으로 즉위했다. 니스는 풍요로운 섬이었고 과일과 향신료의 생산지이다. 아름다운 왕국을 다스리며 사랑스러운 남편과 행복한 신혼을 즐기던 두나자드는 22살이던 해에 외동딸 다나를 낳았다. 니스 왕국은 대대로 딸에게만 왕위를 물려준다. 두나자드는 왕위를 물려줄 딸을 낳았다.
후계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앞으로 아무 문제 없이 평탄한 치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폭풍우는 예고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폭정왕 라지한을 몰아내고 강건왕 샤흐라자드가 정권을 잡았다. 샤흐라자드, 하그리아의 13대 왕, 강하고 무시무시한 여왕! 그 여자는 두나자드의 인생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 20살에 왕위에 오른 샤흐라자드 여왕은 자신의 아버지, 영웅 루스탐이 복속했던 과거 영토들을 다시 복속하여 하그리아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샤흐라자드는 가장 먼저 남부를 복속했다. 골레얏 왕조가 영웅 루스탐에게 무너진 후, 폭정왕 라지한의 치세동안 살아남은 왕조의 후손들이 후기 골레얏 왕조를 건설했다. 후기 골레얏 왕조는 하그리아의 반기를 들었다. 후기 골레얏 왕조의 람샤르 4세는 "샤흐라자드는 찬탈자이고, 반역자 루스탐의 딸이며, 하그리아의 정통한 왕은 오직 '라지한'뿐이다"라고 선언했다. 람샤르 4세는 샤흐라자드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후기 골레얏 왕조를 건설한 69세의 람샤르 4세에게 있어서 이제 고작 24살의 샤흐라자드는 애송이로 보일 뿐이었다. 람샤르 4세의 선전포고를 듣고 샤흐라자드는 직접 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군을 이끈 지 고작 4개월 만에 람샤르 4세의 목과 그의 자손들의 목을 깡그리 베어서 성벽에 매달았다. 아아, 정말 독하고 무서운 여자다. 샤흐라자드는 피로 얼룩진 수기 서신을 니스 왕국과 서쪽의 모압왕국으로 보냈다.
'자발적'으로 복속한다면 내정을 독립하여 자치권을 보장해 줄 것이지만, 복종하지 않는다면 람샤르 4세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이 람샤르 4세의 아들들의 잘린 머리가 담긴 상자와 함께 배송되었다. 두나자드의 남편은 람샤르 4세의 손자다. 남편은 아버지와 숙부들의 머리통을 보고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두나자드도 사람들의 잘린 머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샤흐라자드는 두나자드보다 고작 4살 어린 여자인데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를까?
두나자드는 공포에 떨었다. 그렇지만 일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인 두나자드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우선 막료들을 모아서 니스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웃 나라의 사례를 보고 판단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두나자드는 자신의 사촌오빠가 데릴사위로 들어간 서쪽의 모압왕국 사정을 살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서쪽의 모압왕국은 샤흐라자드에게 복종의 뜻을 밝혀서 모압왕실의 명맥을 유지한 체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모압 태수가 샤흐라자드를 독살하려던 계획이 탄로 나서 모압 자치령은 속령으로 강등되었다. '모압'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백색해 일대의 서쪽 땅은 '하그리아 서부 속령 타브리즈'라고 명명되었다. 모압 태수 일가는 처형되고 태수의 조카딸 안나는 샤흐라자드가 임명한 서부 총독 마르다스와 강제로 결혼했다. 이제 모압 왕가의 피를 이은 후손은 안나와 그녀의 외동딸 미르셀라 영애 뿐이다.
남부와 서부의 상황을 파악한 두나자드는 복종 밖에 답이 없음을 받아들였다. 매년 포도와 석류와 사프란을 공물로 바치고 하그리아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26살인 샤흐라자드 여왕과 30살인 두나자드 '태수'는 하그리아 왕국과 니스 '자치령'의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그리아는 군사적인 보호를 해주고 니스 자치령은 정기적으로 세금과 공물을 바치는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즈음 쓰러져서 병석에 누운 남편은 세상을 떠나버렸고 하나뿐인 딸 다나는 8살이 되었다. 샤흐라자드 여왕은 과부가 된 두나자드 태수에게 재혼을 권유했다. 물론 두나자드가 느끼기엔 '권유'가 아닌 샤흐라자드 여왕의 '명령'으로 들렸다. 여왕이 소개한 새로운 남편은 두나자드보다 10살이나 어린, '아이라만'이라는 이름의 20살 청년이었다. 하지만 청년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아이라만은 하그리아 상비군의 참모이자 1왕자 아르샨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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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만과 두나자드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사이가 좋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애정에 기반한 부부관계가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지에게 연민을 가진 동료 사이였다. 처음에 두나자드는 여왕이 니스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아이라만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라만은 훤칠한 키에 적갈색 머리카락과 밝은 벽색 눈을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이다.
아이라만과 달리 두나자드의 죽은 남편은 순하고 착하고 사랑스러웠다. 다나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어쩔 줄 모르고 귀여워했다. 하지만 아이라만은? 그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여왕과 사이에서 4살이 된 아들이 있지만 여왕과 아들에게 특별히 가족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몇 년 같이 살다 보니 아이라만이라는 남자에게도 좋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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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에겐 궁정학자인 이모 마흐잔이 있고, 재상인 외삼촌 아이라만이 있다. 이모 마흐잔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부모의 뒤를 이어 궁정학자가 되었다. 이모는 40살이 되도록 독신이다. 마흐잔 이모는 어린아이들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달리아와 이스마일은 이모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손에 꼽는다. 아이라만은 달리아와 이스마일의 외삼촌이지만 어머니와 외삼촌의 나이 차가 15살이나 되다 보니, 달리아가 느끼기엔 외삼촌 보다는 큰 오빠로(이스마일에겐 큰 형으로) 느껴졌다.
달리아가 10살 생일을 맞이 했을 때 외삼촌은 고작 24살이었다. 외삼촌은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똑똑했지만 학자보단 관료로서 능력을 펼치기를 원했다. 어렸을 때 부터 외삼촌의 목표는 한결같았다. 출세, 권력, 그리고 강한 군주를 원했다. 외삼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은 셈이다. 외삼촌은 하그리아에서 여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관직인 재상이고, 1왕자의 아버지이고, 왕족(이었던) 여성을 배우자로 두고 있으니까. 이변이 없는 한 외삼촌은 우리 가문에서 가장 반석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파리사티스 1왕자비마마를 몇 차례 뵌 적이 있다. 그 분은 우리 가문의 도움이 되면 되셨지, 흠 잡힐 일은 단 한가지도 없을 사람이다. 그러니 외삼촌은 왕궁에서 무너질리 없는 단단하고 견고한 벽돌을 세운 것이다. 니스 산 포도주를 음미하며 왕궁을 관철하는 재상, 1왕자 전하와 1왕자비 마마의 든든한 후견인인데, 설마 외삼촌과 아르샨 왕자 전하, 파리사티스 왕자비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