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5. 샤흐라자드
16. 아이라만
17. 미르셀라
18. 타흐마탄
19. 스피타만
20. 셀림
샤흐라자드
_
하늘의 혹독함과 심판의 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때로는 예리한 불꽃보다 더욱 세계를 불태우는 원한을 가지고,
영웅을 내던지고 백사자를 잡는 용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갑옷과 칼과 화살과 함께.
바다의 물결로 인해 그 건물의 돌이 마치 색유리와 같다.
태양의 열기로 인해 그 진흙 조각이 마치 이끼와 같았다.
수천 년 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수천 년 간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물방울 대신에 설령 천상에서 화살이 내린다 하여도, 변치 아니할 것이다.
왕들은 하늘에 닿는 것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용맹한 자들은 그 위로 올라 능력의 날개를 드리웠다.
그의 복종의 문으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왕관과 왕좌의 가치를 얻었다.
그의 명령의 문장을 외면한 모든 것들은, 마치 좌절과 죄책감의 갈대펜과 같았다.
너의 자리는 왕좌이다.
너의 생은 왕좌를 지키고, 너를 멸하려는 적들과 평생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적들의 자리는 먼지 구덩이가 될 것이다.
아아! 신의 권능에 질서를 부여하는 조약이여.
아아! 왕의 길을 걷는 필멸자의 조약이여.
신들의 왕은 축복받은 연회에서 보석을 흩뿌렸고, 하늘은 보석으로 가득한 술잔을 내렸다.
_
다마스 강철검의 칼날은 날카로운 은빛을 띄었다. 물결무늬를 그리며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은 무두질이 되지 않는 야크 가죽을 얇은 종잇장처럼 잘라버린다. 아버지는 이 다마스 강철검으로 아카샤족 대왕 카라우의 목을 쳐냈다. 샤라는 강철검을 손에 쥐고 휘둘렀다. 은빛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었다. 보통 강철검보다 훨씬 가벼운 다마스 강철검은 무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훌륭한 명검이다.
물론 이런 명검도 훌륭한 주인을 만나야 빛을 낼 수 있다. 수집가의 손에 쥐여주면 손님들 앞에서 구경시켜줄 공예품이 되고, 학자의 손에 쥐여준다면 물결무늬의 대한 유물로서 가치를 증명할 연구대상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다마스 강철검은 훌륭한 주인을 만난 것이다. 샤라는 훌륭한 군인이었다. 다마스 강철검은 그녀의 손에서 은빛 호선을 그렸다.
칼날이 매끄럽게 공기를 가르고, 물결무늬는 파찰음을 내며 날카롭게 울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검신을 비추었다. 은빛 검을 든 샤라는 춤을 추는 무희같았다. 그녀의 칼놀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샤라는 자신의 움직임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20대 시절 자신에 비하면 39살의 자신은 너무 둔해졌다. 몸이 가벼웠던 젊은 시절과 달리 이제 샤라는 40을 바라보는 중년이다.
당연히 예전과 완전히 똑같을 리는 없다. 세월의 흐름은 거친 돌멩이를 반질반질하게 마모시킨다. 샤라는 무기와 갑옷의 방에서 가만히 멈춰 섰다. 그리고 투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5살 시절에 천진난만한 얼굴이 비쳤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장난꾸러기였지. 그러다가 곧 17세의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라지한을 몰아내고 왕좌를 손에 넣겠다던 당차고 용감한 표정이다.
과거의 얼굴들이 잔잔히 사라지고 현실 속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처연, 고독, 분노, 그 외에 표정은 자신의 얼굴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과거의 자신은 꽤 많은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왕좌에 흐르는 피를 닦고, 피로 얼룩진 왕관의 무게에 짓눌리다 보면 자연스러운 표정은 사라진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감정과 애정은 휘발되는 물방울과 같다.
_
2왕자 이스카의 방에는 책이 많다. 네 방향의 벽면 전체를 가득 메우고 천장까지 높이 쌓인 책무더기들은 흡사 책으로 이루어진 숲과 같다. 왕궁 도서관처럼 웅장하고 정밀하게 책이 분류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스카는 자기 방에 있는 책을 모두 외워놓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분류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책들은 모두 이스카가 직접 쓴 것이다.
식물세밀화, 화성학, 명상, 건축, 경제학, 전략전술, 기보법, 물리학, 종교, 문화연구, 지도 제작법 등 종류는 아주 다양하다. 샤라는 둘째 아들의 방에 들어올 때마다 매번 이 책의 나무들이 점점 높게 자라는 걸 느낀다. 이스카는 종이 뭉치와 필기구만 있으면 두꺼운 책 한권을 하루 만에 만들어버린다. 샤라는 가끔 이스카의 방에 들어와서 책을 읽는다. 왕궁 도서관의 책들은 너무 방대하며 내용이 길고 어렵다.
하지만 둘째 아들 이스카가 쓴 책은 아주 쉽고 간결하며 행간의 문체까지 아름다워서 맘에든다. 샤라는 신참 관료들이 쓰잘데기없이 길고 두서없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하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럴 때마다 둘째 아들 이스카가 직접 쓴 책을 가져와서 "앞으로 나에게 문서를 올릴 거면 이렇게 쓰시오! 쓸데없이 길고 어렵게 쓰지 말고 핵심만 명확하게 쓰란 말이오! 바로 이렇게!"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면 신참 관료들은 샤라의 고함을 듣고, 물러나서 고개를 떨구다가 이스카 왕자가 직접 집필한 책을 몇장 펼쳐 넘겨본다. 처음엔 호기심에 제목과 목차만 대충 훑다가 집중을 하게 되면 뚫어저라 책에 시선을 꽂는다. 한권 다 읽고 나면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목을 읽는다. 다 읽은 관료들은 이 책을 누가 썼냐고 묻는다. 그러면 샤라는 대답한다.
"짐의 둘째 아들 이스카 왕자가 9살 때 집필한 국가정세에 관한 책이오. 라는 제목답게 화자인 '나흐르'가 청자인 '책 읽는 이'에게 간결하게 설명을 해주지요. 경들은 배울 만큼 배웠고, 나이도 과년하기 때문에 차마 책을 필사하라는 숙제는 내주지 않겠소. 하지만 적어도 잘 쓴 글을 모방이라도 해보시오! 내 앞에서 머저리처럼 어리둥절하게 굴지는 말란 말이오!"
_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밤의 여신이 기지개를 켤 시간이 되도록 샤라는 이스카의 방에서 이스카가 14살 때 집필한 를 읽고 있었다. 샤라는 신무기 개발에 관심이 많다. 투석기, 화약무기, 공성추는 적의 요새를 요격하고 함락시키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15년 전 후기 골레얏 왕조의 람샤르 4세를 부숴버렸을 때도 군사력과 더불어 새로운 전쟁병기의 도움이 매우 컸다.
그렇기 때문에 샤라는 전쟁병기 기술자들에게 큰 비용을 **하고 그들을 후원한다. 병기 기술자들은 위대한 여왕폐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들의 재능과 지식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샤라가 왕으로서 통치한 19년 동안 전쟁병기, 그중에서 특히 '하그리아 화포'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육전이건 해전이건 상관없이 화포는 아주 훌륭한 병기이다. 사정거리가 길고 위력이 강한 포탄을 쏘면 적의 함선을 격추한다.
또한 적의 성벽을 부서트리고, 적의 성루를 박살 낸다. 마치 팔랑카르 족의 두개골을 박살 내는 것처럼 짜릿하다. 쇠뇌를 쏘거나 망치로 깨부수는 것은 매우 수고롭지만, 화포는 한발만 쏘면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팔랑카르 족을 죽음 혹은 그와 비슷한 치명상으로 만들 수 있다. 북부 속령의 성읍들을 약탈하던 팔랑카르 족은 죽어 마땅하다. 이 야만족들을 초원으로 몰아내는데 13살 밖에 안된 이스카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샤라는 둘째 아들의 지략을 아주 높이 샀다. 샤라는 이스카의 전공을 노련한 장군들 앞에서 크게 치하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이스카의 표정은 매우 침울했다. 단 둘이 있을 때 이스카에게 왜 침울해하냐고 물어봤다. 이스카가 말하길 "팔랑카르 족은 하그리아에선 받아주지 않고, 초원의 아카샤족에게도 천시받으니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이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겠네요"라고 했다.
팔랑카르 족 소탕을 마친 뒤에 쓴 에서도 이스카는 팔랑카르 족을 하그리아의 신민으로 받아들여서 북부속령에 정착시키는 방안을 1개의 장*을 할애해서 서술했다. 샤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둘째 아들 이스카는 가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한다. 팔랑카르 족이 북부속령의 성읍과 마을을 얼마나 많이 약탈하는데! 매년 북부속령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사례가 속출하는지 다 알면서!
예전에는 팔랑카르 족의 땅이었지만 지금은 '하그리아 북부속령 벨리오사'다. 엄연한 하그리아의 땅이다. 이스카가 태어나기 전에 샤라가 군을 이끌고 직접 정복한 땅이다. 21살의 샤라는 친히 군대를 이끌었다. 샤라는 아버지이신 영웅 루스탐처럼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는 왕으로서 훌륭한 업적이오. 하그리아의 역사를 빛낼 공훈이었다. 다른 북부인들과 달리 샤라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야만스러운 팔랑카르 족 뿐이었다.
샤라는 자신의 통치를 따르지 않는 팔랑카르 족을 북부속령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팔랑카르 족은 자기네 고향이랍시고 북부속령에 발을 들이고, 하그리아 군대가 그들을 초원으로 쫓아내는 짓을 18년이나 지속하고 있다. 이스카는 에서 '팔랑카르 족에 입장에서는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이라고 서술했다. 샤라는 를 덮어버렸다. 둘째 아들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가끔 샤라와 뜻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팔랑카르 족에게 연민을 가진다든지, 왕이 되기 싫다고 하던지, 천한 무희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라든지.
_
여왕의 수석시종 하킴은 아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여왕폐하께선 오늘 정오기도가 끝나면, 저녁에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를 불러오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래서 하킴은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의 연구실이 있는 별관 건물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곳은 큰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_
여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내궁시녀장 할리메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궁녀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고는 있지만 이미 궁전에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1왕자비 마마와 2왕자비 마마는 항상 궁정을 시끄럽게 만든다. 그들이 벌인 크고작은 다툼은 여왕폐하의 귀까지 들어간다. 하지만 오늘의 소동엔 왕궁시종장 발라스 경과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도 포함되어있다.
때문에 폐하께선 지금 소동의 현장으로 직접 들르셨다.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의 연구실은 병사들과 시종들이 시립해있다. 자리에 앉은 여왕은 바닥에 꿇려놓은 며느리들을 바라보았다. 수석시종 하킴에게 상황을 전해 듣자 마자 근위병들을 이끌고 몸소 행차하셨다. 여왕은 사로잡은 포로들을 다루는 것처럼 며느리들을 대했다. 여왕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또 소란을 피웠다고 들었다. 왕가의 며느리로서 방정맞은 품행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자 파리사티스 왕자비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고 아뢰었다. "폐하, 제 이야기를 들어봐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