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하그리아 왕국 12

목차

13. 아르샨

14. 달리아

15. 샤흐라자드

16. 아이라만

17. 미르셀라

18. 타흐마탄

19. 스피타만

20. 셀림

아르샨

-

사랑과 명예를 모두 손에 넣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왕실의 장남인 아르샨 왕자는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잘 알고 있다. 올해로 17살이 된 1왕자 아르샨은 적갈색 머리카락에 밝은 벽색 눈동자를 가진 순박한 인상의 청년이다. 아버지인 아이라만 재상과 어머니인 샤흐라자드 여왕은 전혀 순하고 착한 사람이 아니지만,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르샨은 순하고 착했다.

아르샨 왕자는 시종들과 하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동생 왕자들인 이스카와 스피타만을 잘 돌봐주는 큰 형이었다. 6살의 아르샨은 5살이던 이스카와 3살이던 스피타만을 데리고 온 궁전을 뛰어다녔다. 정원을 가로지르면 비단옷에는 흙과 풀꽃이 덕지덕지 묻고, 연못에 뛰어들어 수영하고, 나뭇가지를 들고 근위병과 전쟁놀이를 하고, 밤늦게 왕궁 주방에서 과자를 훔쳐먹었다.

"왕자님들 공부시간이 되셨느니 인제 그만 놀고 돌아오세요"라고 시종들이 잔소리하며 뒤쫓아오면 타흐마탄 장군의 허벅지를 붙잡고 그의 뒤에 숨었다. 타흐마탄 장군은 아르샨, 이스카, 스피타만 셋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요 말썽꾸러기들~ 이번엔 무슨 장난을 치셨습니까?"라며 씩 웃었다. 아르샨은 타흐마탄이 좋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아르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밌는 이야기를 해준다.

-

타흐마탄은 얼굴에 큰 흉터가 있고 행동과 말투가 거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다정했다. 피 한 방울 안섞인 나와 스피타만을 자신의 친조카처럼 대했다. 왕자들에게 순수하게 애정과 관심만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 아버지나 스피타만의 아버지인 소흐랍은 절대로 타흐마탄처럼 대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소흐랍과 마주치게 되면 소흐랍은 나를 정중하게 윗전으로만 대했다.

어머니는 항상 무심하셨고 아버지께선 나에게 "너는 제1왕자다. 장래에 왕세자가 될 몸이야"라며 끊임없이 내 위치를 상기하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엔 타흐마탄이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이런 심정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궁정은 소리없는 전쟁터다. 작은 말 하나가 큰 파도를 만드는 곳이다. 장난꾸러기처럼 굴지만 왕궁의 생리를 모를 만큼 난 바보가 아니다.

타흐마탄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1왕자인 자신이 그를 아버지라고 여기며 자주 만나면 타흐마탄의 입장만 곤란해진다. 안그래도 그는 2왕자의 아버지이며, 2왕자 이스카는 상당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내 아버지를 비롯한 하그리아의 중신들은 타흐마탄을 견제하고 있다. 이스카가 태어난 뒤론 권력에 욕심없던 타흐마탄은 자유로운 인생을 포기하고 왕궁에 묶여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내가 8살이 되었을 땐 타흐마탄 장군은 승마와 검술을 직접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타흐마탄은 다른 스승들과 달리 지겹고 이론적인 부분은 모조리 생략했다. 오직 실전에 필요한 것들만 가르쳐주었다. 타흐마탄은 하그리아에 정착하기 전까지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는 귀족 도련님이 교양으로 익히던 검술을 버리고 칼부림으로 먹고 사는 이들처럼 검을 다루었다.

그는 나에게 혹독한 삶을 이겨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가족도 친구도 하인도 없이 살아야하는 용병의 삶에서 타흐마탄 경은 지혜와 인내를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타흐마탄의 교수방법이 좋았다. 그는 다른 스승들처럼 나를 미래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결과물을 뽑아내려고 다그치거나 보채지 않았다. 항상 나를 기준으로 두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확실하게 기초를 다지도록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타흐마탄의 교수방식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셨다. 경쟁자인 2왕자 이스카는 어린나이에 어지간한 고수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재능을 꽃피우는데 반해, 이스카의 아비에게 사사받는 나는 재능의 성장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를 두고 "제 아들을 빛내기 위해 경쟁자인 너의 실력이 돋보이지 못하도록 일부러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야"라고 말씀하셨다.

9살이 되던 때에 나는 타흐마탄 경과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얽힐 접점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미래의 왕이 되어야 한다며 나의 수업량은 이전보다 배로 늘어났고, 검술과 승마를 지도하는 스승은 타흐마탄 경이 아닌 아버지의 측근으로 교체되었다. 동생들과도 더 이상 만날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2왕자와 3왕자는 경쟁자이니 그들과 어울리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내 또래의 놀이친구들을 데려왔다. 앞으로는 그들과 붙어서 공부하고 그들과 어울려 노는 것만 허락하셨다. 아버지가 정해놓은 세계에서만 삶이 허락되었다. 올바른 삶, 모범적인 삶, 장차 왕세자가 되야하는 1왕자,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한낱 범재**였다. 내 동생들인 이스카와 스피타만은 언제나 나보다 뛰어났다.

왕실의 장남으로서 나는 앞으로 많은 것을 짊어져야 하는데, 내 어깨에는 앞으로 수많은 것들이 쏠리게 될텐데, 동생들보다 한참 못난 내가 국가와 권좌와 만백성의 피와 땀을 견딜 수 있을까? 잠에 들기 전에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생*은 계속 이어지고 인생이라는 길을 걷다보면 항상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 찾아왔다.

-

파리사티스, 나의 사랑, 나의 바람, 내가 숭배할 오직 하나 뿐인 봄의 여신, 왕비의 보관**을 쓰고 싶은 소녀. 봄꽃이 만개한 계절에 너는 나에게 찾아왔어. 금잔화를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나를 기다렸던 13살의 너를 똑똑이 기억해. 너의 눈빛은 호박석처럼 반짝였어. 내가 바보같이 아무 이야기를 마구 늘어뜨려도 너는 나를 향해 그저 부드럽게 미소지어줘. 항상 나를 안아주고 상냥하게 대해줘.

-

너의 빛나는 눈동자와 미소는 내 유모를 떠오르게 해.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어. 하지만 8살때 내 유모가 파우지아 여사로 바뀌었어. 파우지아 여사는 아버지의 큰 누님이야. 그녀는 아버지보다 더 깐깐한 성격이지. 파우지아 여사의 아들도 내 놀이친구 중 한명이야. 내 사촌형제가 되는 그 아이는 파우지아 여사를 쏙 빼 닮았어.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기 힘든 사람들이야.

-

너는 내가 아주 어려워하는 사람들과 나를 징검다리처럼 이어주었어. 너는 항상 똑똑하고 자신감이 넘쳐있어. 아버지에게 있어서 너는 좋은 대화상대야. 나는 17살이 되도록 어머니가 어려워. 하지만 너는 어머니께 어떤 말씀을 올리면 되는지 잘 알아. 너의 눈빛은 항상 내 심장을 한번 꿰뚫고 지나가. 파라, 너의 오빠들은 아버지가 붙여준 놀이친구들보다 훨씬 각별해.

나는 가족애라는 감정을 몰랐었어. 나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서로 일정하게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야. 나와 각별했던 동생들은 나의 경쟁자이고, 내가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타흐마탄 경은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면 곤란해져. 내가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유모는 이제 내 곁에 없어. 나의 어머니 샤흐라자드 여왕과 나의 아버지 아이라만 재상은 공식적으론 부부가 아니야.

두 분 모두 법적인 배우자는 따로 있어.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를 사생아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에겐 부모님이 계시면서도 부모님이 없는 것 같아. 나에겐 형제들이 있지만 형제들이 아닌 것 같아. 나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꼈어. 적어도 나는 그랬었어. 나에겐 '가족'이라는 단어와 '애정'이라는 단어는 서로 조응될 수 없었어.

하지만 너와 약혼한 뒤로는 그게 가능해졌어. 너와 가족이 되자 너의 오빠들은 내 형님들이 되었어. 파르잔 큰형님과는 취할 때까지 함께 술을 마셨어, 다스탄 형님과는 함께 미복을 하고 왕궁 밖을 유람했어, 발라스 형님은 항상 연애시를 읊조리셔, 자한기르 형님은 처가식구들과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자한기르 형님처럼 너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너와 나의 관계는 영원히 공식적이고 적법했으면 좋겠어. 너와 나는 가족이고 부부야. 나에게 없는 것은 네가, 너에게 없는 것은 내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줄 수 있어. 그래서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 너와 나의 관계가 영속적이었으면 좋겠어. 사람이 사람을 자연스럽게 사랑한다는게 어떤건지를 너를 통해 알게 되었어. 너와 함께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꾸리고 싶어.

깊은 나무처럼 단단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 나는 네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남편이 되고 싶어.

언제나 너를 사랑해. 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