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하늘이 건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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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향님 보호자 되시죠?" "네..어떻게 됐나요?" 나는 그날, 세상 모든걸 잃었다. 서서히 미쳐가는 듯 했고 자아는 뒤엉클어지고 망가져서 심장에 가시로 박혔다. "진혁아 엄마가 네 곁을 떠나도 굳건히 살아야 한다. 알았지?" "엄마..." 2년 전 우리 엄마는 난소암 판정을 받았다. 퇴근 후에는 간병하러 오는게 여사였고 병원에서 밤을 샜다.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엄마를 보살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너도 옷 좀 사서 입고 연애도 해. 응?" "연애는 무슨.. 엄마 몸 관리나 잘하셔." 탁- "남친! 이거 마셔." 낭창한 저 여자... 아니 여자친구지. 나에게 무엇을 건네는 것인가? "뭐에요 이게?.. 아니 뭐야 우리 애기..?^^" "뭐긴 뭐야 소주랑 맥주랑 막걸리 다 태운 이른바 여친주다!!!! 크학학핫~" ...아뿔사..진혁은 애써 웃음을 지어보지만 썩소로 변모하는 중이다. "러브샷 어때? 내가 똑같이 쟈기한테 말아줄게~" 진혁도 미친듯이 액션을 취하며 바텐더의 손짓으로 술을 말고 있었다. 탁- 가영은 뭐야.. 나보다 더 한 미친 부류잖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오빠..?" "위스키와 막걸리와 소주 맥주 그리고 .. 와인까지 첨가한 22세기를 대비하는 맛깔스럽고 러블리한 금수저 술이지." 그 와중에 옆에서는 동창들이 미친듯이 외치고 있었다. 마치 걸그룹을 응원하며 떼창을 부르는 모습과 비슷했다. "우오오오오 러브샷! 러.브.샷! 가나요?? 가쥬아!!" "그래 인생 뭐 별거 있어? 도진혁 일로와! 누나랑 한잔 할꽈?" 진혁과 가영과 팔짱을 스무스하게 낀 다음 대야에 담긴 사랑의 알코올을 섭취했다. 진혁은 머리가 핑 돌면서 쓰러졌다. 철푸덕. ....뭐야. 진혁은 뻗어버렸고, 가영은 귓가에 들려오는 콧소리가 담긴 말에 놀랐다. "뿌에에엥...나 취했또..." 대야를 베개 삼아 술집 바닥을 이불 삼아 딥슬립하는 그는 바로 한의사 도진혁. 그리고.. 그의 뺨을 후려치는 김가영. "일어나 일어나라고!!!" 유정은 맞딱드린 장면에 의아했다. 커플의 모습 치고는 다정한 요소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쟤네 둘이 연인 맞냐..? 뭔가 수상해..수상하단 말이지..." * "반가웠다 얘들아, 조심해서 가고! 김가영 너는 남자친구 잘 데려다주고~" 동창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야 김가영! 너네 둘 애인 사이 아니지?" 가영은 흠칫 놀랐다.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맞거든? 안유정 너는 참 골칫거리다. 나 간다." "이상하단 말이지..유정님의 촉은 빗나간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아우 이 남자 왜 이렇게 무거운거야.." 진혁은 가영의 등에 업혀서 꿀잠을 자고 있다. 더군다가 드르렁 코를 골고 있다. "이봐요. 집 어디에요? 당신 집주소 말해봐요!!" "드르렁.." 가영은 이마에 참을 인자를 새겼으나 급기야 화날 노자를 입장시켰다. 가영은 도망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실제 연인사이는 아니니까. "아이씨 나도 모르겠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영하 4도 날씨였다. 공원 벤치에 진혁을 눕히고 줄행랑을 치려던 찰나. 진혁은 가영의 패딩 한자락을 끌어당겼다. "엄마...보고싶어..." '엄마..? 엄마랑 같이 사는가? 그럼 집 주소 알려주면 될것이지!' 가영은 뿔난 황소마냥 얼굴이 일그러진다. 마음 편하게 누워있는 진혁의 모습을 보자니 어처구니 없었다. "도진혁씨!! 알겠으니까 일어나봐요." 아참.. 그게 있었지!!가영은 술집에서 챙겨온 얼음장처럼 차가운 솜다수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진혁의 면상에 냉수를 들이 부었다. "아아악!!" 진혁은 눈을 번쩍 뜨고야 말았다. 벤치에 누워있다니... 한의사 도진혁의 체면이 말도 아니군..나를 내려다 보는 저 여인은 편의점 친구? "잘 주무셨어요 한의사님?" 저 여자도 괴짜의 기질을 가진 또라이임이 분명해. 진혁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왜 여기 있습니까?" "몰라요. 불필요한 말 하기에는 추우니까 집에나 찾아가요." "김가영씨.. 혹시 제가 실수한건 없나요?" 초롱초롱한 진혁의 눈망울이 무언가 애처로워 보였다. 진혁의 커다란 덩치는 오늘따라 가녀려 보였다. 엄마..보고싶다라, 가영은 생각을 접고 단호하게 말했다. "없어요. 오늘 감사해요. 그럼 이만." 진혁은 가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영은 멈칫하며 물이 뚝뚝 흐르는 진혁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왔다. "집에.. 데려다 주시면 안될까요?" 나 도진혁. 삶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오늘 가영에게 바래다 달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알았어요 어디에요?" 나 김가영.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게 낯설지만 꽤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 나에게는 4살 터울인 언니가 있다. 언니는 타고난 머리로 학창시절 전교 1등을 휩쓸었다. "너도 네 언니처럼 하면 00대학교 갈 수 있어." "언니의 반 만큼이나 해봐라." 언니는 수능 만점으로 전국 탑 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나는 김가영이 아니라 언니 김은솔의 동생으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저런 과거 생각을 하다가 진혁에게 물었다. "그래서 집이 어디에요?" 진혁은 예상치 못한 발언을 했다. "가영씨.. 내 직업 좋아 보여요?" "네..??" "저에게는 남동생이 있었어요. 지금은 없어요. 왜인지 알아요?" 뭐지? 가영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저 남자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대체.. "자살했어요. 우울증 때문에. 제가 정말 한스러운건 그 때 책 한자 더 볼 시간에 동생한테 말 한마디 걸어 줬더라면 지금은 제 곁에 있었을텐데.. 너무 슬퍼요..슬프네요. 가영씨 .."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가영은 바닥에 주저 앉아버린 진혁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요. 진혁씨.. 집은 가야죠." 가영과 진혁은 나란히 걸었다. 가영은 칼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얼굴이 까슬해졌다. 진혁의 집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작은 원룸이었다. 그는 사뭇 아쉬운 기색이다. "가영씨. 편의점 친구 말고 우리..그냥 친구 할래요?" 정돈되지 않은 더벅한 검은 머리칼이 진혁의 눈을 가렸다. 가영은 그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올려 촘촘하게 정돈해 주었다. "좋아요. 얼른 들어가서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자요. 알았죠?" 가영은 진혁이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친구가 되어 줄게요.'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가영씨 맞으시죠? 00복지관입니다. 1차 서류 합격하셨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문자 보내 드릴게요." 가영은 부스스한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뭐시라...?개같은 김가영 인생에 한줄기의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냐...? "개 신난다 얏호!!!!" "야 김가영 시끄러워. 엄마 운동 갔다 온다." 가영은 4년제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졸업한 후에야 알았다. 도움 받을 사람은 김가영 나 자신이라는 것을.. 똑똑.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면접관은 총 다섯 명이었다. 같이 들어간 지원자는 나 포함 네 명이었다. 면접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가영에게 질문할 차례가 되자 면접관은 서류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말했다. "김가영씨는 졸업한지 2년 되셨네요? 그 때 동안 뭐하셨어요?" 난 진짜 뭐했을까..가영은 허탈한 무력감에 온몸이 저려왔다. 사실 국가 자격증 하나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할말이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변명으로 밖에 안들렸다. 내가 면접관이라도 나를 뽑아주진 않을거라며 자책했다. "자..자격증 준비하고.. 그..그리고.." "네 알겠습니다. 00씨에게 질문 드릴게요." 그렇게 처음으로 본 면접은 끝났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먹었던 청심환 병을 길가에 던져 버렸다. 가영은 풀이 죽은 나머지 버스 정거장에 주저 앉고 말았다. "흐엉 흐어엉.. 난 쓰레기야..분리수거도 안되는 개쓰레기같은 존재라고.. " 가영은 미친듯이 울었다.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개쓰레기라뇨... 왜 그렇게 비하 하시는지.." 가영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을 흘겼다. 대충 들어도 같은 또래의 목소리였다. 이상하게도 뜬금없는 참견이 싫지는 않았다. "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남자였다. 얼굴은 새하얗고 갸름하며 눈은 쌍꺼풀이 살짝 있는 공룡상이다. 바가지머리가 오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는 오토바이에 내리더니 주머니를 뒤적 거렸다. "여기요. 저 앞에 짜장면집 명함이에요. 우울할 때는 짜장면이죠." "저기요." "네?" "저 짬뽕 좋아하거든요?" 그는 내 말을 씹은채 오토바이 헬맷을 뒤집어 썼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뒤에 놓인 중국집 철가방이 덜커덩 거렸다. 부르응~~ 가영은 조그마한 명함을 조물딱 거렸다. 명함에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헤헤반점. "기분도 거지 같은데 짜장면이나 처먹어야지." 구름 한점 없는 겨울 하늘 아래로 검은 정장의 27살 소녀가 있다. 취준생이 아닌.. 그저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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