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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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신호가 왔다. 꼬르륵거리는 뱃속은 가영을 재촉하는 듯 했다. 아오 이 놈의 식욕. 가영은 허름한 중국집의 문에게 공손하게 노크를 청했다. "똑똑. 들어가도 되나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가영은 문을 살며시 열었다. 낮은 천장에 테이블은 두 개 정도였다. 짜장면을 파는 곳인지 거지들이 사는 곳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다. "처자 들어오소. 멀거니 서있기만 하노." 뚱뚱보다는 통통에 가까운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주방장? 같은 사람이 손짓을 크게 했다. 거부하기 애매해서 가영은 대충 대답하고 앉았다. "아..네.." "뭐 시킬라우?" 딸랑~뒷통수에 차가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 몸을 비집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사장님 히터 좀 켜달라니까. 아후 헤헤반점이 아니라 헤헤베리아네." "정태야 넌 입만 다물면 인기 터질 상이라." 정태?직감적인 느낌으로 그를 알아챘다. 아까 명함을 주고 간 남자라는 것을. 가영은 불안한 마음에 눈을 요리조리 피했다. 가영은 쪽팔리는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 왔네? 나랑 나이 비슷해 보이는데 반말 한다?" "뭐요??" 몇분 기다리는 사이에 콧구멍에 진한 짜장면 냄새가 진입해온다. 가영은 마음이 설레어 왔다. "자아~~먹어보슈. 내 손맛에 반할테니께." 후루룩. 눈이 번쩍 떠지는 맛이었다. 면은 오동통하고 쫄깃했다. 짭짤하고 고소한 양념은 골고루 잘 베겨있으며 따뜻한 온도의 짜장면은 오장육부를 들썩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오우 퍼펙트!!!" 아차. 나도 모르게 함성이 튀어 나왔군. "사장님 나도 배고파요. 나도 짜장며언!!" 내 앞으로 뚫어지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중국집 아르바이트생은 짖궂게 말했다. "이름이 뭐냐?" 저 놈, 진짜 노답이네.. 초면에 반말이라니 이런 왕싸가지를 봤나? "반말 할거냐? 몇살인데 너." "우리 동시에 말하자. 그냥 말하면 재미 없잖아." 사장은 짜장면을 마하의 속도로 만들어 알바생 앞에 갖다 놓았다. 가영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둘 세엣! 사장의 카운트 다운이 끝나기 무섭게 두 남녀는 말을 뱉었다. 우리 둘은 똑같은 숫자를 외쳤다. "스물 일곱!!!!" 가영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마음 속으로는 건방진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욕설이 가득했지만. "맞구만 촉이 틀리지 않았어." "야. 입 닥쳐라." "근데 너는 이름 뭐야?" "가영." "가영아 내가 무서운 진실 하나 말해줄까?" "뭔데??" "조만간 너 취업한다." 마주보는 그의 눈 속에 내가 보였다. 자신없고 힘 없이 입에 짜장 양념을 가득 묻힌 초라한 내가 미래의 가영에게 물었다. 안녕? 미래의 김가영, 너는 무슨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어? 직장인이야? 아니면 하염없이 여전히 꿈을 쫓는 나약한 소녀야? 제발 말해줘.. * "하암..." 가영은 기지개를 쫘악 폈다. 전날 먹은 짜장면이 소화가 안됐는지 속이 부글부글거렸다. 지잉--- 어랏.. 전화벨이 울리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가영씨 , 여기는 00장애인 시설입니다. 최종합격하셨구요. 자세한 사항은 문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합격이요? 저 다 떨어졌는데.." "추가합격되셨습니다." 미친... "꺄오오!!!!" 가영은 전화를 끊고 함성을 질렀다. 가영의 인생에 드디어 봄이 찾아오는 것인가. "미쳤냐? 시끄러워 죽겠네." 언니가 문을 열어 젖히고 핀잔을 주었지만 가영은 귓등에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 소프라노 톤으로 소리를 꽥 질렀다. "나도 이제 직장인이다 씨발!!" "자." 취업 선물로 엄마가 돈봉투를 쥐어줬다. 돈 봉투가 제법 두꺼워서 가영은 흡족했다. "고생했다 김가영." 가영은 어깨에 셀프 토닥토닥을 손으로 가뿐히 한 다음, 절친 미숙과 술 약속을 잡았다. 미숙은 가영이 힘들때 늘 곁에 있어준 친구였다. "야 호잇포차에서 9시에 보자. 콜?"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12월 24일. 무교인 나지만 뭔가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려야할 것만 같았다. "하느님 부처님 감사드리옵니다. 찌질한 김가영에게 이런 미친 기회를 주시다니.. 으헝헝헝 존나게 감사해요." 가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터무니 없는 자신감에 불타올랐다. 띵- 폰이 밝아지며 문자가 떴다. 인사담당자가 보냈나 보다. 가영은 엄지손가락을 덜덜 떨면서 문자를 콕 눌렀다. - 6박 7일간 실습을 진행합니다. 수건 포함 개인 짐 챙겨오시길 바라고 제출 서류 지참해 오세요. "실습??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대학교 때 한 실습을 또 하라고? 미친..." 가영은 발끈했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히며 정돈했다. 지금 가야할 곳은 호잇포차였고, 생맥주를 나에게 선물로 내려줘야만 했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 오랜만에 예쁜 아가씨처럼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친구와 대학로 한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야 나 왔다." "축하한다 김가영. 이야.. 이제 사회복지사님 되신거야??" "근데 있잖냐. 6박 7일동안 실습인지 합숙을 한단다. 여기 이상한 곳 아니겠지?" "미친년 네가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야?? 무조건 고개 숙이고 개같아도 참고 그래." 미숙이는 중학교때부터 10년 넘게 알고 지낸 동네 절친이다. 공부를 잘한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중이다. "그래.. 그래야지..후.." "나도 애들이랑 학부모 목소리만 들어도 현기증나고 공황장애까지 왔잖냐.. 그래도 지금은 약먹고 있어서 괜찮음. 원래 아파야 성장이 있는거야 기지배야." 가영은 영 내키지 않았다.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합숙은 야생 정글로 돌진하는 위험천만한 느낌이었다. 둘은 술을 미친듯이 드링킹했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4시를 향하고 있었다. "즐거웠다. 힘들면 언제든지 이 언니한테 연락하고!!" 가영은 미숙의 배웅과 함께 택시를 탔다. 미숙에게 카톡이 왔다. 택시 번호를 찍은 사진이었다. 역시 내 친구 하며 가영은 피식 웃었다. "후..." 택시를 타고 한 10분 쯤 갔으려나. 그녀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지만 정신을 말짱했다. 창 밖을 보니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포착됐다. 한의사 아저씨??딱 봐도 그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게 분명했다. "기사님 여기서 내려주세요." 가영은 재빠른 걸음으로 진혁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려 보니 진혁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아저씨! 술 마셨어요?" 진혁은 방긋 웃었다. 순진한 아이처럼 티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네 마셨습니다..하하.." "새벽 4시에 ... 혼자 마신거에요??" 진혁은 가영의 물음에 대답하기는 커녕 딴 말을 연거푸 중얼댔다. 가영은 내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힘들어서...뭐 힘들어서 그래요." "아저씨..멘탈이 그렇게 약해서..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가영은 술에 만취한 진혁을 부축했다. 진혁에게서 술냄새가 확 났다. "아저씨 힘들어도.. 견뎌야죠.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진혁의 집에 다다른 가영은 그를 침대에 뉘었다. 진혁은 새근새근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나 갑니다. 위험하니까 새벽에 그렇게 마시지 말구요." 돌아서는 찰나, 진혁은 가영의 손목을 탁 잡았다. 가영은 아찔한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오늘만..같이 있어줘요." 가영에게 진혁의 체온이 짜릿한 정전기처럼 전해져왔다. 벽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만 방 안을 울렸다. "알았어요." 진혁은 자신이 누운 침대 옆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가영은 당황스러워서 발을 동동 굴렸다. "누워요." "미쳤어요?" 가영은 소리를 꽥 지르고 바닥에 냅다 누워버렸다. 가영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럼 나도 바닥에서 잘래요." 진혁은 바닥으로 꼬물꼬물 내려오고 있었다. 진혁은 셔츠를 풀어헤쳐 놓아서 가슴골이 다 보였다. '아..어쩌란 말이야..' 가영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 나의 순결아... * 서슴치 않고 침대 아래로 내려오는 진혁. 진혁은 가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가영의 양 볼을 쓰다듬었다. 가영의 볼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예쁘다." 가영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혹감에 휩싸였다. 한편으로는 생각을 알 수 없는 그의 깊은 눈망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지..' 순간적으로 진혁은 가영의 뒷목을 끌어 당겨 입술을 덮쳐왔다. 술기운이 확 느껴졌다. 진혁을 멀리 밀쳐버리는 가영. 가영은 금새 새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뭐하는거에요 지금?!" 진혁은 가영의 말을 듣지도 않은채 코를 드르렁하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어라..?" 정태는 상을 닦다가 바닥에 떨어진 동전지갑을 발견했다. 로즈골드빛을 띠는 예쁜 자수 지갑이었다. '김가영 걔건가..' 한참을 들고있는 정태. '기다리자.' **** 가영은 진혁의 집을 도망치듯이 후다닥 빠져나왔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후...큰일날 뻔했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그녀. "엥..? 내 동전지갑 어디있지.." 그러고보니 술마실 때도 현금만 들고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치겠네.. 김가영..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하.. 끼익-- 오토바이가 급정거하는 소리였다. "야 정신 좀 챙기지?" 짜장면집 알바생이잖아..? "내가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았냐? 너 혹시 스토커야?" 정태는 피식 웃었다. "동네가 워낙 작아야지. 땅꼬마같은 여자애는 너뿐이던데?" "고맙다. 한참 찾았는데.." 가영은 0.1초간 고민했다. 취업했다는거 말해야 할까... 눈치 100단인 정태는 단번에 알아챘다. "취업했어? 축하한다." "어...어..그래..고맙다. 이것도 갖다줘서 고마워." "간다." 헬맷을 푹 뒤집어쓰는 정태. "정태야." "뭐." "나.. 잘할 수 있겠지?" 그냥 묻고 싶었다. 아니, 힘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정태는 생각과는 달리 태연하고 무덤덤했다. "세상 원래 X같애. 뭐든지 흘러버려 김가영." 떠나간 오토바이 뒤로 홀로 남겨졌다. 동전지갑에 새겨진 하트모양 자수를 햇살에 비춰봤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만들어주신 지갑.. "할머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품어 주랬지? 할머니 말 새겨들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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