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는 죄가 아니야!
중세시절 흑사병이 창궐하던 때, 다 쓸려나간 밀밭을 수확하는 농부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그림리퍼. 서양에서는 죽음의 사신으로도 불린다.
1343년경, 중국.
"자오유팅! 이리로 오지 않겠느냐!"
자오유팅은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달렸다. 다이메이촌으로 가자. 잡히면 끝장이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다. 내가 사는 곳은 극동지역과는 거리가 꽤 많이 있는 푸젠성이다. 물이 찰랑거리며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을 비켜나갔다.
어느 순간, 자오유팅은 자신이 집에 놔두고 온 새참이 생각이 났다. 신경쓰지 말자, 어짜피 일을 도울것도 아닌데.
푸젠성 부근은 중국 화교 밀집지역이며 농촌 마을이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다.
"지긋지긋하다 진짜...후.."
퍽.
사람이다. 부딪힌 이마가 까져서 부어올랐다. 어떤 새끼야?
"아다만트의 낫을 너에게 주지."
"에? 뭔 개소리."
유령인가? 낫을 들고서 하얗고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검은 망토 복장이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이 낫으로 죽여, 미운 사람. 앞으로 너는 후대를 다스릴 농경의 신이다."
낫을 얼떨결에 쥐게 된 자오유팅은 분노와 화로 눈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무참하게 낫으로 죽여버렸다.
*
그리고 이제 약 700년 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019년.
띵-
"아쉽게도 불합격하셨습니다."
가영의 짙은 쌍꺼풀이 오늘따라 유난히 두꺼워 보인다.
나는야 김가영. 나이는 27세. 지금 현재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있으며, 기름진 피부가 나를 더욱 빡치게 만든다. 와인색 앞머리는 눈꼽 낀 눈알을 찔러댄다.
"아오 씨..또 떨어졌어."
탁탁-
"야 나와서 아침 먹어."
아침 9시, 기분이 잡치는 하루가 시작된다. 반복되는 인생 회전목마는 늘상 제자리다. 오늘 하루가 몇월 몇일 무슨 요일인지도 헷갈리곤 한다.
"알았어 갈게 간다고!!"
털썩 주저 앉은 밥상 위에는 밥, 그리고 김치가 가영을 반긴다. 가영은 신 김치를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아침 식사가 즐겁긴 커녕 잡생각이 더 유익한 것 같은 느낌은 뭘까.
"밥만 축내지 말고 알바라도 좀 해!!"
가영은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나머지 휴지 뭉치로 귀를 틀어막았다. 잔소리를 듬뿍 섭취한 가영은 고무장갑을 단단히 끼고 설거지를 한다. 가영은 보슬보슬한 촉감에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귀여운 반려견이 허벅지를 긁는다.
"오렌지 잘잤어?"
가영은 잠시 고무장갑을 벗어두고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오렌지는 혓바닥을 길게 내밀며 가영의 손을 핥았다. 나한테 잘해주는 ..단 하나의 존재는 반려견이다, 빼박 사실이다.
"운동 갔다 올게~~"
'제발 빨리 가..;'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탁구를 치러 간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 은퇴한 후로 노후생활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다. 가영은 짐을 챙기고 차키를 챙기는 시스터의 뒷모습을 묵묵히 쳐다봤다.
"언니 어디가?"
무심코 곁을 지나치는 친언니의 대답은 간결했다. 팩트폭격을 날리는건 여전하다. 어쩌면 김가영의 열등감이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드는 거겠지만.
"어딜 가겠냐? 출근하지."
출근..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 정장을 빼입고 지하철에서 서류가방을 뒤적거리는 모습조차 우아하기 그지 없다. 월요병이 싫다고들 하지만 월화수목금병으로 아프다 못해 환자로 입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가영은 대학 4년제 졸업 후 난 2년 째 백 to the 수 생활을 개같이 즐기는 중이네? 백수도 몇년째 지속되면 지겹다구. 가영은 애통한 마음을 속으로만 집어 삼키고 있다.
"다녀와."
티비를 보고 있는 아빠는 잠옷차림으로 편안해 보인다. 편안한 노후를 즐길 수 있는건 젊은 시절의 뼈저린 직장 생활을 겪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직장이라는 관문에 들어가기도 힘든 요새 시국에, 새삼 부모님이 부럽다. 가영은 깊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빠 오늘 머해?"
"티비 보지 뭐."
아빠는 몇십년 동안 회사원 라이프를 보냈다. 그 후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해버린건 안비밀. 제 2의 백수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어쩌면 나와 동지일지도 모른다. 상당히 다른 의미의 동지겠지만.
"재밌겠네."
비아냥대는 내 말투에 1도 신경쓰지 않는 마이 파파는 개그 프로그램에 배꼽을 잡고 웃는다. 가영은 티비에 흥미를 잃어버린지 오래라서 이해가 그닥 되지 않았다.
월월!!!
오렌지는 오늘도 짖는다. 반려견이 개소리를 하지 마라고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일까? 가영은 한숨을 쉬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개 같은 하루 오늘도 스타트다.
오렌지 미안, 근데 내 인생 개 같은건 어쩔 수 없다구.
*
뒤적뒤적.
"아씨 어디 간거야.."
가영은 무언가 찾는 듯하다. 그녀는 잔뜩 쌓인 책 사이 먼지를 툭툭 털었다. 가영의 손에 야무지게 잡히는 그 것은 토쏨 카페의 아메리카노 한잔 프리 쿠폰이다.
가영은 기분이 좋은지 신명나게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은 종잡을 수 없는 멜로디로 흘러가지만 가영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카페인 충전이 무엇보다도 급했기 때문이었다. 가영은 누더기 같은 검정 캡모자를 챙겨온게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모자는 피부 트러블을 조금이나마 가려주는 한줄기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랄까. 물론 마스크도 필수품이다. 가영은 누구도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소소한 희열감이 느껴졌다.
카페의 문을 열자 투명한 레드카펫이 깔린다. 이 구역의 스타는 나란 말이야. 가영의 발걸음은 유난히 힘차다.
지금은 오후 1시. 오후 한시면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업무에 들어갔을 시간이다. 가영은 한적한 카페의 공기를 들이 마시며 킁킁거렸다. 원두의 향이 오감을 자극하는구만?
집에서 빈둥대다 자격증 공부하러 온 나는야, 김가영.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산미가 가득한 맛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두뇌가 재빠르게 회전하고 글자들이 머릿 속에 쏙쏙 들어오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집에 있는 것보다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 들뜬 마음이 가득하다.
"음음!!"
가영은 잔기침을 하면서 조선시대 영감같은 자세를 취했다. 어라..극도의 꼰대 기질이 발동하면서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주변을 둘러봐도 카페 직원이 아무도 없다. 가영은 서비스 정신이 없구만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가영의 눈꼽낀 눈알에서는 빨간 광선이 나올 기세였다.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생과일을 들고서 스태프 공간에서 나오고 있었다. 가영은 이 때다 싶어서 시크한 매력을 뽐내며 쿠폰을 툭 건넸다.
"여기요."
"어...소..손님."
'왜 저렇게 말을 더듬어? 기쎈 언니 처음 보냐?'
"쿠폰 기한이 작년 12월까지여서.."
아르바이트생은 억지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미친...이게 무슨 한여름에 패딩입고 호떡 먹는 거지같은 소리야?가영은 목청 자랑을 할 시점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취준생의 진상이 시작되는 것일까.
"아닐텐데요? 그거 이번달까진데?"
김가영은 별명이 하나 있는데, 뻔뻔함으로 학창시절에 철판 김면상으로 유명했다. 실제 철판보다 더 두꺼워서 미워하는 사람의 머리를 툭 치면 기절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과장을 조금 보탠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급식 때 다른반 짱이 새치기를 하는 바람에 머리채 쥐뜯고 싸운 적도 있다 이 말씀이야!
"다음 손님 먼저 도와드릴게요..."
알바생은 난감한 표정에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영은 팔짱을 끼면서 한숨을 쉬었다. 김철판 가영은 소파로 가서 알바생을 노려보았다.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한잔 주세요."
가영의 뒤에 서있던 남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있다. 흰 색 가운을 입은 남자..?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가영은 애꿎은 초면의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톡톡
"저기요."
"네?"
"저도 아메리카노 땡기는데..사주떼요!!! 쀼쀼잉 쀼우!!"
'미..미친 사람?!'
흰색 가운의 그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카페 밖으로 도주한다. 가영은 남자가 귀여운 애교는 처음이라 튕긴다고 생각했다. 가영은 캡모자 사이로 눈을 깜빡거리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첫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친 여자와 정체불명의 남자, 그리고 구겨져 버린 아메리카노 쿠폰. 가영은 볼멘소리를 내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씨.. 빈대 붙기 실.패."
*
"동네가 미쳤나 보다.."
나는야, 올해로 서른셋 아재 나이인 도진혁. 입술이 워낙 도톰한 편이라 평소에 화났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무표정을 하면 지나가는 고양이조차 나를 피했다. 명색이 한의사지만 겁이 많은 편이여서 하마터면 미친 사람에게 걸려들 뻔했다. 진혁은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안녕하시우!"
청소부 김봉남 아줌마의 인사가 귀찮았다. 안그래도 정신 없는지라 아주머니의 말을 가볍게 패스했다.
다다다다다--
"뭐다냐 저 양반 왜 저래?"
간호사들도 진혁에게 점심 안부를 인사치레로 묻는다. 점심 메뉴가 부실했는지 집에서 가져온 바나나를 열심히 섭취하고 있다. 요새 드라마 이야기, 잡다한 일상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어머 선생님~~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다다다--
"역시 괴짜임. 내가 말했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상하다고."
수근덕 대는 그녀들의 수다 파티는 끊이질 않는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연차 최고봉인 간호사가 눈치를 줘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서야 조용해졌다.
진혁은 사무실 의자에 몸을 냅다 맡겼다. 사무실 의자가 오늘 따라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 준다. 잠깐의 명상시간을 가지다가도 아까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그는 곧바로 몸서리쳤다.
"소름 돋아!!! 아오 !."
진혁은 책상 앞에 올려진 펭귄모양의 탁상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다. 시간을 이런데에 낭비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진혁은 시간을 금쪽같이 여기는 습관때문에 몇초 몇분이 흐르는게 불안하기 일쑤였다.
도진혁, 얼른 진료하자. 한의사로서 본분을 다해야 마땅하다. 가만히 있다가는 내 정신도 그 여자처럼 돌아버릴 것 같아. 진혁은 오늘부터 검은 캡모자와 하얀 마스크를 쓴 사람을 기피 대상 1호로 정하기로 했다. 마지막 생각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눈 앞에 나타나지 마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