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열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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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인생은 노잼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군.' 진혁은 턱을 괸채로 볼펜을 돌렸다. 진혁은 환자에게 약처방을 내려준 후 진료실을 걸어나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혼밥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저번에 편의점 일이 떠올랐다. 편의점 친구를 하자고 하던 미친 여자. 왠지 오늘은 미쳐보고 싶다. 진혁은 식당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오 침 뱉으니까 배고프잖아. 보자.. 전 재산이.." 가영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았다. 달랑 천원짜리 두장이 잡힌다. 젠장.. 나는 오늘 샌드위치가 먹고싶은데, 500원이 모자라다. 정말 돈 한푼 없는 거지구나. 가영은 산책이고 나발이고 그냥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 지원을 200군데 이상 하고, 입사지원을 100군데 이상 넣었지만 어디에서도 가영을 불러주지 않았다.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지잉- 모르는 번호로 핸드폰이 울렸다. 설마, 합격 전화? 가영은 신이시여 하며 전화를 냅다 받았다. 전화 너머로는 능숙한 말솜씨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가영씨 검찰과 연류된 사건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딴거 없거든요?" 보이스피싱이다. 김가영은 이래뵈도 투명한 인생을 살았단 말이야. 검찰이라니...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내 인생은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거지같네. 2000원짜리로 살 수 있는 것은 진짜 거의 없는데. 일자리는 안구해지고 알바건 직장이건 들어가는게 바늘구멍보다 작으니..답답한 현실이다. 가영은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가영은 땅바닥만 보고 걷는다. 그러다가 고개를 살며시 들어 먼 산을 본다. 시선을 중간으로 낮추는 도중에 저 멀리서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흰가운의 남자? "저..저기요!" 진혁은 숨을 헐떡거리며 가영에게 다가왔다. 진혁은 잠시 진정하고서는 눈을 부릅 떴다. "컵라면.. 사주세요." 진혁의 눈망울은 간절했다. 가영은 애잔함을 느꼈다. 동질감이랄까? * "네??" "저번에 약속했잖아요." 진혁은 앙증맞게 입술을 샐쭉 내밀고 있다. 가영은 저 남자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귀여운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다. '돌아버리겠네. 전 재산이 2천원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보자.. 500원만 더 있으면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어!! 가영은 깊은 고민 끝에 샤우팅을 지르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500원 내놔요." "뭐라고요??? 사준다면서요." 진혁은 약속과 다른 가영의 태도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가영은 요리조리 진혁의 주위를 거닐며 훑어보다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 됐구요. 안 줄거면 주머니에서 빼갑니다?" "참나.. 그냥 내 돈 주고 사먹을랍니다!" 진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면서 지금 이 상황이 웃프다. "1500원이요." 진혁은 편의점 알바생에게 카드를 건넸다. 알바생은 무심한 표정으로 카드를 연거푸 긁었다. 진혁은 카드 칩이 인식이 되지 않는가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삐익- "잔액부족이라고 뜨는데요.." "우하하하학 완전 웃기네!" 가영은 배꼽을 잡고 고개를 젖혀가며 미친듯이 웃는다. 진혁은 심술이 가득한 볼을 슬며시 내리면서 가영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돈 빌려줘요. 제발.. 컵라면 먹고 싶다구요!" "아..알았어요. 여기." 가영은 어쩔 수 없이 전 재산을 한의사에게 기부했다. 심장이 타 들어갈 정도로 아까웠지만 동정심에 어쩔 수 없었다. 두 남녀는 바깥 벤치에 앉는다. "후루룩 짭짭." 저 남자 정나미가 없다. 한입도 안주고 자기 입 속에 쳐넣고 있잖아? "나도 한 입 줘요." 가영은 구걸하는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가까이 했다. 진혁은 가영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뭘봐?라는 생각을 품은 듯했다. "내가 왜요?" 헐..가영은 머리냄비 뚜껑이 치솟아 오른다. 가영은 화가 불쑥 치밀었다. "아니 내가 사줬잖아요. 한입도 못 얻어먹어요?" "젓가락 가져 오십시오. 간접 키스 허용 안됩니다." 가영은 나무젓가락을 얼른 가져와서 라면을 한 입 먹었다. 오장육부를 감싸오는 따스한 면발에 심취하고야 말았다. "와 대박 맛있다." 진혁은 먹는게 끝나기 무섭게 다시 라면 사발을 뺏었다. 가영은 진혁을 노려보다가 먼 산을 봤다. "치사해." 진혁은 국물 하나 안 남기고 그릇까지 먹을 기세다. 진혁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뭐라고요? 이봐요.!!" 가영은 진혁의 팔목을 잽싸게 붙잡았다. 기브앤 테이크 방식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하며 김면상의 후계자로 적절하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네?" "편의점 친구잖아요 우리. 다음 번에는 님이 사주깁니다?" "무슨 허접 쓰레기같은 소리에요?" "아니 내 전 재산 다 갉아먹어 놓고는!! 아저씨 참 뻔뻔하시네!" 아저씨..?진혁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다. 진혁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썹은 뒤틀려졌다. "내기 할래요?" "에?? 뭔 내기요?" "내가 아저씨란 증거 있어요? 아저씨 아니면 어떡할껀데요?" 뭐지 이 남자...장난을 진담처럼 받아들이잖아..?가영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몇일 뒤에 고등학교 동창회잖아..? "아저씨 아니면 나랑 1일 애인 해줘요. 오키?" 진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반면 맞은 편에 서 있던 가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표정이 활짝 폈다. 찌질 남녀의 앞날의 행보를 지켜 보시라. *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망의 동창회 날이다. 동창회는 자신을 뽐내는 장이 열리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영은 가진 것 하나 없지만 아저씨를 믿기로 했다. "오우 김가영 아니야?" 저 새끼는 바로 고등학교 시절 나를 졸졸 따라 다니며 귀찮게 했던 김문수, 옆에는 그의 시다바리 역할을 톡톡히 맡고 있는 배강욱도 있군. "오랜만이다." 가영은 고개를 까딱했다. 시크함의 절정을 보여주며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혼자 왔냐? 다른 애들이랑 안오고?" 남의 기분 구리게 만드는 능력은 여전하구만..?아저씨 왜 이렇게 안오는거야. 동창회에 같이 가달라고는 했지만 설마 올까하며 불안초조하기만 했다. "끼야아아아 얘두라 왔오? 오랜만이댜아~ " 희대의 썅년. 우리 반에서 면상 탑이었던 저 년의 이름은 안유정. 집안이 금수저라 취직의 '취'자도 모르는 씨댕같은 년이다. "어머! 가영이도 있네에? 요새 뭐하고 지내? 취직은 했어?" 역시.. 밥맛. 아니, 밥맛보다 못한 애다. "했지." 유정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 저런 질문 스킬은 어디서 배운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어디서 일하는데?? 연봉은 얼마?" 가영은 이를 꽉 물었다. 진정하자 김가영, 아니.. 못참겠다. 한 방 날려야겠군. "네가 1년 동안 성형에 투자하는 금액 정도는 벌껄..?" 유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더불어 팔을 번쩍 들더니 가영의 뺨을 때렸다. 가영은 한쪽 뺨이 얼얼해져서 손으로 감쌌다. "이년이..?" 가영은 고개를 들자 저 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게 보였다. 편의점 아저씨였다. 진혁은 진심어리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진혁은 가영의 두 볼을 따스한 손으로 감싸주었다. "가영아." "누구...?" 고등학교 동창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주목 되었고, 진혁은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가영이 남자친구 한의사 도진혁이라고 합니다." 가영은 흘려 들으며 진혁의 나긋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멋있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말을 떠올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의사...?그토록 되고 싶었던 내 꿈을 이룬 사람이 편의점 친구, 저 아저씨? 가영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이야 김가영.. 출세했다? 남자 잘 만났네!" 가영은 겉옷을 챙겨 술집을 후다닥 나갔다. 가영은 무표정이었으며 냉정한 온기의 사람처럼 보였다. 진혁은 그녀를 뒤따라 계단을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가영아!" "왜 그럽니까? 약속 지켰는데.." 가영은 울적한 표정이었다. 가영은 한숨을 푹 쉬면서 진혁을 향해 말했다. "부러워서요. 부러워서 그래요." 정말 부러웠다. 금수저로 태어나 고생한 번 안한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고,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며 모든 사람의 관심과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그런 존재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김가영씨." "네?" "부러워할거 하나도 없어요." 진혁의 표정도 밝아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근심에 가득찬 느낌이었다. "다 가진 사람보다 가진 것 속에서 행복한게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다시 들어갑시다." 가영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영은 입술을 깨물며 서 있다가 다시 새침하고 뻔뻔한 스타일로 돌아온다. "알았어요." 진혁과 가영은 손깍지를 꼈다. 오늘따라 유난히 춥다. 차디찬 공기만이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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