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혁은 알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른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쭈욱 폈다.
오프여서 그런지 나른한 컨디션이었다. 입을 쩌억 벌려 하품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어제 기억이 하나도 안나네.."
폰을 들어 연락처를 꼼꼼히 살피는 진혁.
편의점 베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장이 되어 있네?
"김가영..."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녀의 이름이 낯설기도 하지만 오묘한 신경세포를 자극해 왔다.
지잉--
"여보세요."
"흠흠."
"아침부터 뭔일이에요?"
가영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틱틱거렸다.
"오늘 뭐해요?"
"도진혁씨 참 뻔뻔하네요."
"네???"
도통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걸까..
'이 남자 정말 모르는걸까.. 에이..모르는 척도 유분수지!"
"가영씨 오늘 시간 되면 드라이브 할래요?"
드라이브..?
낯선 남자와 드라이브라...
"됐네요."
진혁은 슬럼프에 진이 빠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신경을 툭툭 건드리고, 극도의 스트레스에 몸서리가 날 지경이었다.
"가고 싶어요. 가영씨랑."
가영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마음 한켠에 자리잡은 공허함을 남자로 채우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올 것만 같아서였을까.
"진혁씨 그거 알아요?"
"어떤거요...?"
"공허함은 사람으로 채우기엔 한계가 있어요. 물론 저도 그렇구요. 진혁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드라이브를 가는게 저한테 쉽지만은 않아요."
진혁은 가영의 말을 신중히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의외로 생각이 많고 진지한 그녀의 태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
"그럼 쉬어요 가영씨."
뚝.
전화가 끊겼다. 도진혁.. 나에게 연락한 이유가 뭘까? 단순한 호기심? 외로움? 호감은 절대 아닐거다.
가영은 캐리어에 짐을 한가득 싸고 있는 참이었다. 합숙 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앞섰다.
"가영아 들어가도 되니?"
"응."
"엄마가 할말이 있어서."
"뭔데?"
평소와 달리 차분한 차림새와 화장을 연하게 한 엄마는 어디를 나가는 것 같았다.
"네 삶을 살았으면 해."
의중을 알 수 없는 애매한 언어였다.
"어? 뭐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어. 가영이 네 인생, 아니 네 존재는 소중해."
"엄마도 참.. 오글거리게 왜그래~"
"아픈 손가락이야. 왠지 모르게 가영이가 엄마한테는 그래."
가영은 캐리어에 약을 집어 넣는 손길이 차츰 느려졌다.
"10년 전 김가영이 아니라니까. 걱정 마시오!!"
실은 나는 17살 때부터 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 성적의 급격한 하락과 은근히 어려운 친구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였을까.
*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가영이 네가 잘못한거야.."
담임은 차가운 말로 어린 나에게 비수를 꽂았다.
"쟤 정신병 아니야? 맨날 애들한테 시비나 걸고 수업 마치면 쌤들한테 상담받고 그런다더라. 미친년."
반 애들은 수근덕대며 나를 조롱했다.
유난히 나대는 성격이었지만 마음은 여렸다. 겉으로는 강했지만 집에만 오면 속앓이가 반복됐다.
"가영씨, 뭐가 제일 힘들어요?"
하교 후 상담을 받는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사람이.. 너무 무서워요."
상담소를 나서는 발걸음도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꿈이 생겼다. 사회복지사라는 꿈..
힘들어하는 세상의 약자들을 돕고 싶었다.
*
'어쩌면 도진혁씨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지잉--
"가영씨..?"
"도진혁씨는 뭐가 답답한거죠?"
진혁은 공격적인 그녀의 말투에 약간 조심스러웠다.
"인생이 재미가 없어요 가영씨. 근데 편의점에서 가영씨랑 컵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그리운거 있죠."
"사람을 믿기가 어려워요..진혁씨를 믿어도 될까요?"
타인을 믿는 것은 살면서 가장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도진혁이라는 남자를 믿고 싶다.
"전화부를 들여다보니 통화 버튼이 가영씨를 향하더군요. 가영씨에겐 자연스러운 이끌림이 있어요."
"별 보러 가고 싶어요. 바람 좀 쐐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거 같아서. 데리러 와줄래요?"
진혁은 얼른 패딩을 걸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추운 탓인지 입김이 하얗게 새어나왔다.
"김가영.. 알다가도 모를 여자네."
*
진혁은 6년 동안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조각가였다. 연극을 보다가 우연히 마주친 후 연인으로 발전했다.
"사랑해 서영아."
"영원히 사랑해!"
그녀는 새초롬하게 웃어 보였다.
서영의 집을 들어섰던 그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벽면에 빨간 페인트로 선명한 자국처럼 새겨져 있었던 글자.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사라진 그녀를 난 아직도 찾지 못했다. 실종인건지 자살인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단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영이를 무척이나 보고싶은 간절함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가요?"
가영은 고개를 까딱이며 슬며시 재촉했다.
"아, 가요."
차 안에는 어색함이 맴돌았다.
"아저씨 저 취직했어요."
진혁은 듣는둥 마는둥 딴생각에 열중이었다.
"도진혁!!"
가영은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으로 소리를 빼액 질렀다.
눈이 휘둥그레 확장되는 진혁.
"반말입니까? 나보다 나이 어리지 않아요?"
"어디서 꼰대질이에요..? 축하나 해줘요."
진혁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지치다 못해 포기한 표정이었다.
"백수 탈출이네요."
"근데 있죠. 아저씨는 항상 무언가 고민에 잠긴거 같아요."
진혁은 마음을 들킨 듯 당혹스러웠다.
"아니에요."
"에이.. 맞는데 뭐. 애인한테 차였어요? 아님.. 직장 상사의 괴롭힘???"
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정곡을 찌르는 가영의 말에 머릿 속에서 서영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그만해요."
진혁은 정색하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서영이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가영은 화제를 돌려 진혁에게 썰을 풀었다.
"저도 예전에 한의사 되는게 꿈이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군요."
"뭐라구요? 내가 얼마나 지적인 이미지인데."
평소에 남을 관찰하는 습관을 지닌 진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영씨는 개성이 강해서 예술 쪽이 어울려요. 예술 분야에 취직한거에요?"
가영은 말문이 막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때마침 나타나는 휴게소.
"핫도그 먹을래요?"
핫도그는 식어 빠졌는지 모양새가 초라했다.
"얼마에요?"
"거 앞에 적혀 있어요."
핫도그집 사장은 장사를 할 마음이 1도 없는지 매사에 퉁명스럽게 손님을 대하는 모양이었다.
"딴데 가요 그냥. 딱봐도 핫도그 튀긴지 5시간은 넘어 보이는데."
"가영씨.. 제가 좋아하는 베스트 쓰리 메뉴 중에 하나가 핫도그에요!!!"
핫도그만 4개째 우걱우걱 씹어먹는 중인 진혁.
"핫도그 못먹어서 죽은 귀신 들었어요?? 아오.."
그는 가영의 핀잔에도 입을 헤에 벌리며 핫도그 파편을 다 튀기며 말했다.
"맛있기만 하구만."
그의 현란한 입놀림 덕분에 가영의 눈에 케찹 국물이 튀었다.
"악!!"
다행히도 가영의 눈두덩이에 살짝 튀어서 눈을 뜰 수는 있었다.
"이제 갈까요?"
가영은 배에 급신호가 왔다.
"아..화..화장실 좀 갔다올게요."
진혁은 일단 차에 먼저 앉아있기로 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앉아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옷차림을 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서영아..'
그는 빠른 속도로 달려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서영이니?"
"어머 뭐야 이사람??"
고개를 돌린 그녀는 서영이가 아니었다.
'이젠 별 헛게 다 보이는구나..'
한편 가영은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보고 있었다.
"살거 같네.."
갑자기 아무 소리도 없이 화장실 불이 다 꺼졌다.
"뭐야 정전인가???"
두려움과 무서움에 다리를 덜덜 떠는 가영.
무서워...
*
"대학 안갈거에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빠는 내 뺨 을 세게 후려쳤다. 그 여느때보다 단호하고 굳게 얼어버린 표정이었다.
"엎드려라."
각목으로 미친듯이 두들겨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하고 싶은게 생겼다.
23살이 되던 봄날,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대의 마음을 감싸 안을테니
내게로 와요.
눈물이 나면 울어 버려요.
그 누가 뭐라 해도 난 그대 편이에요.
기타의 통통 튀는 멜로디가 아리따운 음색과 어우러졌다. 짧은 핑크브라운색의 단발머리를 한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자작곡인데.. 어떠신가요?"
정태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듣지 않는 광장에는 나와 버스킹을 하는 여자 둘 뿐이었다.
"..."
정태는 짐을 주섬주섬 챙기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네?"
"가수가 꿈이에요?"
그녀는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알싸한 비누향이 그녀에게서 났다.
"아니요. 제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 듣고서 희망을 가지는 단 한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요."
그녀는 하얗디 하얀 치아를 보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기타 가방을 어깨에 질끈 매고 사라지려는 찰나, 정태는 그녀에게 서둘러 말했다.
"10년 뒤에 만나요. 그 때는 가수로 만나요."
정태는 그 날부터 가수의 꿈을 품었다. 평소에 노래듣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노래 실력도 꽤나 있는 편이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노래로 전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몇년간 간간히 모은 알바비로 정태는 보컬학원을 다녔다. 의사 집안인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지원을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디션도 수차례 보러 다녔지만 그는 늘 거절당했다.
"나 같은 쓰레기는 죽어버려야 해."
정태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서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땅을 내려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짜피 죽을건데 내가 죽을 자리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환청인지 진짜 소린지 어떤 고함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 같은건 분리수거도 안되는 개쓰레기라고!! 으헝헝..."
정태는 순간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봤다.
정장을 입은 여자가 미친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나만 힘든게 아니였구나.. 저 사람도 나랑 같은 처지일까?'
광장에서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래.. 쓰레기도 분리수거가 되듯이 쓰레기 같은 나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저 사람한테도 말해주자.
"김정태 .. 죽어도 꿈을 이룬 후에 죽자."
정태는 나지막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