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혁은 차에 돌아와서 가영을 한참 기다렸다. 1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그녀가 내심 걱정됐다. 진혁은 결국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어랏.. 화장실 불이 꺼져있네..뭐지..?
"가영씨 괜찮아요?"
"아저씨..불 좀 켜줄래요? 도저히 집중이 안돼.. 지금 1시간 째 변기에 앉아있다구요.."
그는 화장실로 잠깐 손을 내밀어 불을 켰다. 몇분 가량 지났을 즈음 가영은 어정쩡한 포즈로 뒤뚱뒤뚱 걸어나왔다.
때 마침 휴게소 관리자로 보이는 아저씨가 가영의 안부를 재차 물었다.
"괜찮아요? 아이고 정전이 있었구만.. 미안합니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왠지 가만히 있어야 할것 같은 쎄한 느낌이었다.
"갑시다."
가영은 냅다 자동차 조수석에 앉았다.
"가만히 있어요."
진혁은 고개를 기울여 가영에게 확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앞에 있는 남자다운 진혁의 손길에 괜시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안전해야 하니까."
가영은 진혁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눈웃음이 묻어나오는 그의 페이스가 오늘따라 잘생겨보인달까. 게다가 후진을 하며 운전대를 휘어감으며 울끈불끈 튀어나오는 팔뚝의 힘줄이 그녀의 심장에 무리를 줄 것만 같았다.
"멋있다."
아뿔싸..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네?"
가영은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마침 슈퍼맨 모형의 방향제가 만세 자세를 하고 있었다.
"슈퍼맨 멋있다구요."
"아.. 쿠팽에서 타임딜할 때 900원 주고 샀어요. 대박이죠?"
"아..."
"노래 들을래요?"
진혁은 블루투스에 폰을 연결해서 노래를 틀었다.
"평소에 제일 많이 듣는 노래에요."
그는 코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저음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뭐야 노래까지 잘하잖아..?'
"가영씨 아까 핫도그 한개 있는데 먹어요."
진혁은 포장지에 들어있는 핫도그를 가영에게 다정하게 내밀었다.
그녀는 입에 묻혀가며 먹방에 열중했다.
"귀엽긴."
휴지로 가영의 입 주위를 세심하게 닦아주는 진혁. 순간 둘은 눈이 마주쳤다. 가영의 눈이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내가 귀여워서 저러는거야? 뭐야 사람 헷갈리게..ㅠㅠ'
생각을 가다듬기도 전에 진혁은 가영에게 볼뽀뽀를 했다.
쪽-
"오늘 집에 못가니까 그렇게 알아요."
*
"네? 나 집가야 하는데.."
가영은 또렷한 진혁의 응큼한 말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진혁은 가영에게 잊지못할 윙크를 날린다.
"내 눈 반짝거리죠?"
그러고보니 그의 눈을 자세히 본건 처음이었다. 쌍커풀이 옅게 있으며 눈은 나보다 2배는 컸다. 동공의 색깔은 다크브라운 계열이고..음..보자.. 아니 나 뭐하는거지? 왜 저 남자 눈을 자세히 보고 있냔 말이야!!!ㅜㅜ
"블링블링하네요"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나머지 생각하고 있던 속마음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빨간불이 들어오자 차를 멈추는 진혁. 그는 가영에게 바짝 얼굴을 1센치 간격으로 초밀착했다. 그녀는 빤히 보는 진혁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가영이가 더 반짝거려."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난 침묵했다. 남자와의 대화가 오랜만인지라 러브러브한 분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최하점수였기에..
진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여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별은 왜 보고 싶었어?"
"초등학교 때 가족들이랑 천문대에 간 기억이 선명해. 별빛이 눈으로 쏟아지는 느낌이랄까. 별을 보고 있으면 머릿 속이 하아얀 도화지가 되는거 같아. 고운 물감을 풀어놓으면 금방이라도 물들것 같은.."
"우리 엄마도 별 좋아했는데."
자연스레 우리는 말을 놓고 있었다. 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힘든 상황에 처한 동지라서 그런건지 이유는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응?"
진혁은 딴청을 피우며 다른 얘기를 했다.
"별 말고 좋아하는거 또 있어?"
"아니..딱히!"
"오빠는 가영이의 순수함이 좋다."
가영은 순간 잘못들었나 생각했다.
진혁은 오므리고 있는 작디작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싫지 않은지 가영도 말없이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
"우와 잘 보인다!!"
망원경에 눈을 바짝 갖다대는 가영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신기해 하는중.
그녀의 발랄한 모습에 진혁도 덩달아서 한층 즐거워진 표정이다.
"귀엽긴."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저기에는 뭐가 살까?? 생명체가 있을까?"
가영은 올망똘망한 눈망울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없어 그런거."
"그렇겠지? 지구보다는 행복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가영이는 그럼 ..지금 안 행복해?"
진심어린 걱정을 내비치는 진혁은 누구보다도 진지한 목소리였다.
"행복하지..행복해!"
"그래..? 오빠는 별로 안 행복한데.."
"응? 왜..?"
"오빠는 꿈이 없어. 취업과 일에만 열중하던 6년이 허무하달까..진짜 도진혁은 무슨 꿈을 꾸고 살고 있는걸까?"
"뭔 헛소리야."
가영은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인데. 너는 꿈이 있어?"
나는 순간 생각했다. 꿈꾸는 사람이 늘 되고싶다는 내 삶의 좌우명..
"응! 힘든 사람들이 하루 빨리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게 내 꿈이야."
태어나서 가족이 아닌 남에게 꿈을 말하기는 처음이었다.
진혁은 별과 같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가영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너라면 잘할거 같다. 진짜로."
취업을 하기 전에는 몰랐다. 내가 취준생으로 살아간 2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건지.. 허무함에.. 그리고 사회적 시선과 압박에 몸서리쳤던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중한건 남이 가진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보석같은 지금 이 순간들이라는 걸..
"오빠도 잘해낼거야. 왜인지 알아? 멋진 여자 김가영을 만났으니까. 오빠 인생.. 빛나게 만들어 줄게."
발꿈치를 들어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분홍빛 입술은 이미 그에게 닿아있다. 멈칫하는 그의 얼굴이 그저 귀엽기만 하다. 그리고.. 난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것 같다.
*
"아싸 성공이다!!!"
정태는 하늘에 닿도록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시방 정태야 뭐하는 것이다냐? 배달 나가야제."
드디어 성공했다. 그토록 가고싶었던 가수의 콘서트의 최상급 좌석에 착석 가능하단 말씀이야~~
"사장님, 나 내일 쉬어요 알겠죠?"
정태는 중국집이 떠나갈 정도로 호통을 치는 사장의 삿대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지막 배달을 가는 정태.
도심 외곽에 있는 변두리의 한 아파트였다.
"배달이요~"
현관문이 스르륵 열렸다.
눈이 마주쳤다.
잔돈을 주섬주섬 챙기던 정태는 고개를 들더니 멈춘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당신은...그 때 버스킹...맞죠..?"
못 알아들은건지 안 들리는건지 그녀는 아무런 대꾸없이 눈의 초점만 흔들렸다.
짜장면을 잽싸게 받고 돈을 내던지는 여자.
현관문은 어느새 닫혀버렸다.
그녀는 4년 전 모습과 상당히 달랐다. 머리칼은 부스스했고 얼굴은 며칠동안 씻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저기요.. 저기요 할 말 있어요.!!"
정태는 애타는 마음에 문을 똑똑 두드렸다.
"꺼져."
선명하다.
'꺼져.'라는 말?
아니.. 몇년 전 그녀의 청아한 옥구슬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다.
정태는 몇시간이고 쪼그려 앉아서 현관문 앞을 지켰다.
끼익-
그녀다.
"저기요."
다 먹은 짜장면 그릇을 턱하고 놓는 그녀의 팔목을 긴장 풀린 찰나에 잡았다.
"뭐."
"우리 뭉칠래요? 꿈 같이 이루자구요."
가슴 속 한켠에 뜨거운 무언가가 솓구쳐 오른다.
정태는 티켓을 그녀의 작은 손에 쥐어줬다. 혹시 몰라 두 개로 끊어놓은 표가 유용할 줄이야..
"내일이에요. 온다면 긍정의 의미로 알게요."
그녀는 어떤 말을 내색하지 않고 꾹꾹 참는 듯 보였다.
"..."
나는 오토바이를 타는 내내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바람이 향긋하고 따사롭다.
*
정태는 손목시계에 눈을 떼지를 못했다.
'그녀가 올까.'
7시 58분.. 2분이 남았다.
그 순간, 가녀린 손이 그의 팔목을 잡았다.
"가요."
그녀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음악으로 만났던 우리.
우리라는 단어가 무색할만큼 지금 이 순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관객들의 환호 속에 등장하는 뮤즈같은 존재.
그녀는 생각하며 흥얼거리는 정태의 옆모습을 지켜봤다.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 속에 와닿아.
내가 오랫동안 원했던건 이 남자를 다시 만나는거였을까.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
그는 들어주었지.
지금부터 당신의 주위를 맴돌아도 될까요..?
내가..늦지 않았다면 고맙다는 말 대신 당신 곁에서 지켜줘도 될까요?
그녀의 이름은 조은하.
음대를 졸업하고 가수의 길을 향해 달렸지.
버스킹 공연 이후..
까맣고 타들어가는 세상에서 나를 나타내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렇게 4년간은 패배자처럼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마약에 찌들어가며 환상속의 나에게 취하며 살았다.
"그때 버스킹 맞죠..?"
현관문 사이로 보였던 그의 얼굴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4년 후인 지금도 꿈을 열망하는 사람. 멍청할 정도로 착한 사람. 다른 사람을 어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려는 사람.
은하가 보고 있는걸 눈치챈 정태. 그는 걱정어린 마음을 내비쳤다.
"지루해요?"
"진짜 좋아요."
"웃으니까 이렇게 예쁜데."
경계심이 풀려버린 은하는 노랫말을 크게 따라 불렀다.
정태는 어색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 한편에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이에요. 꿈을 잃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