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담은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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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공연이 끝났다. 소녀같이 웃는 그녀. 뻔한 말은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같이 있는 시간이 좋을 뿐. 이름 또한 묻고 싶지 않았다. 통성명을 하는 시간에 다른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인생을 음악에 비유하면 어떤 장르 같아요?" 정태는 바람에 몸을 맡겨 발레하듯이 춤을 추었다. 은하는 다소곳이 두 눈을 감고서 말했다. "발라드 아닐까요? 잔잔한 일들이 마음을 적실 때도 있지만 클라이막스같은 반전에 몸서리치게 되는 짜릿함의 연속이니까요.!" 정태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두 볼을 감쌌다. "당신의 발라드가 되고싶어요." 두 눈이 마주쳤다. 은하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그래요. 눈을 감고 있었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인생은 보잘것 없었죠.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마음의 눈은 이미 당신을 향하고 있었다는걸. 진심인가요? 그럼 당신을 바라봐도 될까요? 갈 곳 없는 내 작은 두 눈이 당신으로 가득차 있어도 되요? 정말 되요..? 노래가 끝났다. 은하의 자작곡이었다. 귀가 녹아내릴것만 같다. 달콤하고 향기로 비유하자면 장미꽃 향기가 나는 들꽃처럼.. 나는 그녀의 노래에 대답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성공하면 그 때 제대로 고백할게요." 우리의 만남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녀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정태. "아버지.." "네가 직장이 없으니까 이렇게 싸돌아다니는구나. 언제까지 아빠를 개새끼로 볼거냐? 애비 얼굴에 똥칠하고 싶어?" "그 놈의 직장 직장!! 지긋지긋하다고 시발..." "뭐?? 그게 부모한테 할 소리야?" "아버지는 나를 김정태로 본 적 있어요? 백수 김정태가 아니라 나는 아빠 아들 김정태라고...나도 사람이라고...씨발.." 정태는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친듯이 흐느껴 울었다. 정태는 야윈 얼굴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지잉-- "여보세요?" "보자." "뭐???야 미쳤냐? 지금 시간이 몇신데.. 그리고 나 지금 동네 아니야ㅠㅠ" "김가영..너무 힘들다...살기가 너무 힘들다..." 전화가 뚝 끊긴다... * "가야할 것 같아요." 가영의 불안한 눈빛에 진혁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가영아.." "친구가 힘들어 해. 오빠 서둘러서 가자." 어느새 진혁의 차는 골목에 도착했다. 어둠에 가려서 정태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영은 간절한지 그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정태야!! 김정태!!" 세 블럭 정도 걸어가서 만난 정태는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가영아. 나 좀 안아줄래..?" 정태가 성을 빼고 나를 부른건 처음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가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를 꼬옥 품에 안아주는 그녀. "울지마.. 인마 울기는 왜 울어.." 차 안에 있던 진혁은 뒷골이 땡기는 모습을 마냥 지켜보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거기." "에?" "좀 떨어지죠." 진혁은 둘을 슬쩍 떼어 놓은 후 정태에게 다가섰다. "뭡니까." "네..?" "우리 가영이한테 뭐하는 거에요. 내 여자친구한테." 엥...? 저 남자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지... 내가 여자친구라고?? 진혁은 정태의 뒷말을 듣지도 않은채 툭 말했다. "미래에 내꺼가 될 여자에요." 내가 잘못 들은거겠지...? 가영은 혼비백산이 된 듯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무슨 소리야.." 진혁은 성큼성큼 다가와 보란듯이 가영의 뒷목을 잡았다. 사선으로 고개를 숙이는 진혁이 그녀의 입술을 덥치며 현란하게 휘저었다. 가영은 온 몸이 저릿해져 왔다. "가자." 진혁은 힘줄이 돋보이는 손으로 강렬하게 가영의 손목을 끌어 당겼다. 또각거리는 그의 구두 소리만 들려왔다. 정신 없는 가영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차에 털썩 앉는 가영. "놀랬지. 미안.. 근데 가영아 네가 딴 남자랑 있으니까 미치겠더라." 진혁은 시동을 켜 운전대를 잡았다. "예약해놨어. 오빠만 따라와." "에?? 어딜 따라오라는 거야?" 가영은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불독처럼 볼이 빵빵해졌다. "요놀자 예약해놨지." 가영은 어이없는 나머지 진혁의 볼따구를 세게 후려쳤다. "내가 만만해 보여? 원나잇 상대는 딴데서 찾아." 차 문을 여는 가영은 정태에게로 달려간다. '바보야, 도진혁 마음 좀 눈치채주라.' 사실 나는 다가가면 멀어지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가영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그녀가 철없는 소녀같지만 속이 깊다고 생각했다. 백수여도 상관없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고, 맛있는 음식과 예쁜 것을 보면 가영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퇴근한 후에 눈여겨 보았던 악세사리샵에 들리는 진혁. "예쁘다. 이걸로 주세요." 실반지.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늘 하던 말이 있다. "진혁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반지를 선물해줘." "반지?" 사실, 아빠는 살아있을 때 모두가 선망하는 소방관이었다. 치솟는 불길 사이로 나타난 사람들 속에 우리 아빠만 없었다. 타인을 구출해주고 혼자 남기로한 그의 선택이었다. "아빠가 가기 전에 반지를 주고 갔단다. 결혼 반지 이후로 처음이었어. 주면서 아빠가 뭐라 말한지 아니?" "..." "당신이 좋아하는 별이 반짝이면 반지 안에 저 멀리 있는 별을 넣어 보라는 거야.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는것처럼." 진혁은 가방에서 반지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서투른 표현때문에 가영이가 실망했겠지.. 그래도 전해줘야겠어. "가영아." 가영은 멈칫하며 뒤돌아봤다. 정태와 진혁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진혁은 가영에게 뚜벅뚜벅 다가와서는 반지를 슬며시 쥐어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별이 비추면 여기 안에 별을 담아봐. 그리고.. 김가영 너는 나한테 항상 별이었다." 가영은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진혁의 눈은 거짓 한 점 없었다. 의미심장한 눈망울은 씁쓸한 웃음으로 차츰 작아졌다. 그가 나를 본다. 내 눈을 빤히 본다. 그저 호수같이 깊고 잔잔한 표정이다. 차가 떠났다. 진혁도 떠났다. 별빛이 머릿결에 반사되었다. 가영은 실반지를 조심스레 들어 반지 사이로 반짝이는 별을 보았다. 가영은 문득 생각했다. '별은 참 가까이에 있구나.' * 시간은 잔인하게도 빨리 갔다. 12월 31일은 나에게는 특별하지 않았다. 집에서 티비로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게 다였다. 그저 하루가 지나가는 것처럼 1월 1일이 되었다. "잘 다녀와라." 캐리어를 질질 끌고 차에서 내렸다. 해가 서쪽에서 떴는지 아빠의 다정한 미소는 역겨웠다. 집에서 차를 타고도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출퇴근 조건 최악인 곳이다. 바로 뒷쪽이 산이라서 그런지 공기는 더럽게 좋네. 내가 입사한 곳은 장애인생활시설이다. 자격증 하나 제대로 갖춰진게 없는지라 닥치고 취업해야 했다. 화려한 번화가 길거리는 잘 쏘다니지만 원래 길치라서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약도를 본다. 봐도 모르겠다 젠장. 그나마 친절해보이는 직원(?)같은 남자에게 길을 물어봤다. "아 여기요? 저기 위로 올라가시면 첫번째 건물이에요." 하필이면 제일 꼭대기에 우뚝 솟은 건물이 내가 일하게 될 곳이었다. 여행길에 휘파람이 저절로 나는 깃털 같은 발걸음 따위는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도착해서 머뭇거리고 있는 가영에게 사십대 아줌마직원이 상냥하게 안내한다. "여기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사무실 소파에 일단 앉았다. 내가 첫빠따로 도착했네..불편해서 죽을꺼 같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5시간으로 느껴졌던 나에게는 나름 구세주같은 사람이 등장했다. 얼핏 보니 나랑 동갑처럼 보인다. 머리를 질끈 매고 단정한 복장을 한 여자도 나처럼 어색한지 폰만 보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아줌마가 태워준 녹차만 홀짝이며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하..존나 집가고싶네..' 모일 시간이 다 되자 하나둘씩 합격자들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나를 포함해서 6명이네. 여자 셋, 남자 셋이었다. 갓 졸업한 20대 초반도 있고, 나랑 어색하게 허공만 보던 여자는 스물네 살이었다. 알고보니 다른 복지관에서 몇 년 동안 일하다 온 경력자였다. "자.. 선생님들! 오늘부터 일할꺼니까 여기 옷 입으세요." 상냥한 아줌마직원이 체크무늬 옷을 휙 던지듯 탁자에 놓았다. 짜증나게도 사이즈는 딱 맞다. "여기가 가영쌤이 배정된 방이에요." 드디어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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