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이 도한 네 가정부 아주머니의 안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자, 도한의 어머니, 선주가 곧바로 마중을 나왔다.
"유정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그녀는 유정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오랜만에 본 선주는 유정이 기억 보다 많이 늙어있었다. 평소처럼 화려한 화장도 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와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네, 어머님. 요즘 너무 바빴어요."
유정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선주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 지낸 수년간, 그녀가 자신에게 불평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엄마! 요즘 세상에 무슨 옛날식 약혼이야? 왜 내가 그 뜬금없는 고아랑 결혼해야 하는 건데?"
"엄마도 알아. 엄마도 걔 싫어. 우리 아들은 잘생겼으니까, 당연히 집안 좋고 예쁜 여자 만나야지."
과거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는 유정의 부모님을 이 세상에서 앗아갔고, 그녀만을 홀로 남겨두었다. 당시 유정의 집은 부유했기에, 그녀의 아버지는 임종 직전 자신의 양 변호사를 주식을 처분해서 그중 절반은 유정에게, 나머지 절반은 도한 네에 주었다. 그의 집안에서 자신의 딸을 잘 돌봐주고, 장성하면 가족으로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녀 아버지의 돈 덕분에 도한의 아버지 임태구는 사업을 점점 더 키워나갔고, 그럴수록 아무런 배경도 없는 고아인 유정을 더욱더 하찮게 여겼다. 그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다했다고 생각했다. 유정 역시 더 이상 무엇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평소 자신에게 무관심하던 이 집안이 갑자기 자꾸 집으로 불러들여 밥을 먹이는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 사업이 힘들다고 듣긴 했다. 계속되는 투자 실패와 금융 위기가 겹치면서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그녀가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자, 임태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정아, 무척 오랜만이구나."
"네, 안녕하세요."
유정은 인사를 하며 슬쩍 한쪽에 앉아 있는 도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 네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았고, 가정부는 유정이 좋아하는 온갖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차려냈다. 그녀는 이 집에서 이렇게 다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도한이 자신을 싫어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가정부 아주머니와 함께 부엌에서 밥을 먹었고, 태구와 선주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이 모두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은 당연했다. 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고, 분위기는 다소 어색했다. 그때, 선주가 입을 열었다.
"유정아, 지금 남자 친구 있니?"
"아니요, 어머님."
그녀의 얼굴에 곧바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마침 잘됐구나. 우리 도훈이도 여자 친구 없는데, 둘이 예전부터 아주 잘 어울렸잖니."
선주는 유정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 있을 때, 두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유정은 늘 도한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물론 그는 그녀를 귀찮게 여겼지만.
유정은 도한을 흘끗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 집안의 재정난이 심각해서, 한때 가장 싫어하던 그녀에게까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업가로서 잔뼈가 굵고 눈치가 빠른 태구는 선주를 나무라는 듯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녀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유정에게 수육 한 조각을 집어 주며 말했다.
"유정아, 많이 먹거라. 너무 말랐구나. 유진 그룹에서 일하는 게 힘든 모양이지?"
"감사합니다, 아버님."
유진 그룹이라는 말에 유정은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임태구는 그녀 손에 남아 있는 주식을 팔아 돈을 마련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해 유현우에게 접근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을 떠올리자 갑자기 격렬한 고통이 몰려왔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그때, 도한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최유정, 잠깐 할 말이 있어."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한을 따라 거실 구석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는 어릴 적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소녀였던 그녀를 시간이 훌쩍 지나 지금에서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답고 작은 얼굴은 희미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크고 동그란 눈망울은 촉촉하게 빛났다. 양 볼에는 아직 통통한 젖살이 남아 있어 순수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렸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그녀가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마 남자라면 누구나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무슨 일이야?"
그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부모님이 왜 너를 불러서 밥을 먹였는지 알고 있지?"
도한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응, 그래서?"
"그래서 생각은 어때?"
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 한번 잘해 보자."
유정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의 집안은 그녀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정은 정말 그들을 친부모처럼 여겼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끊임없이 실망감뿐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책가방과 공책을 찢고,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장염으로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를 때도 약이나 대충 먹이고 나 몰라라 했다. 또 그녀에게 용돈도 거의 주지 않았고, 심지어 그 날 그의 생일 선물을 사는 것도 그녀가 몰래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해결해야 했다.
만약 마음씨 착한 양 변호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녀의 재산을 관리해 주지 않았다면, 그 돈마저 이들에게 모두 빼앗겼을지도 몰랐다.
"너 미쳤어, 임도한? 차라리 신지윤한테 가서 매달려. 너희 둘은 그래도 옛정이 있잖아. 왜 하필 나한테 이래? 너희 눈에 난 개만도 못한 존재잖아."
"내가 잘못했어. 예전에 내가 어리석었어. 눈이 멀어서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없겠니?"
그는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뻗어 유정을 붙잡으려 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과거의 그녀는 너무 어리석었다. 그래서 임씨 집안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었고, 그녀의 마음은 몇 번이고 짓밟히고 무시당했다.
이제 유정은 더이상 그런 바보가 아니었다. 진심과 가식을 구분할 줄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의 주식 절반을 팔아 받은 돈으로 그들에게 진 빚은 충분히 갚았다.
"착각하지 마. 야, 나와 너희 집과의 관계는 이제 끝났어."
도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유정의 동경의 대상이며, 그녀를 마음대로 부리고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유정이 단호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는 자신이 유정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다시는 그녀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정은 그대로 돌아서 식당으로 향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을 내려다보니 유현우였다.
"죄송해요, 아버님, 어머님.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
그녀는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시는 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들은 유정의 뒷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안한 예감이 밀려왔다.
"도한 아빠, 설마 쟤가 그때 그 일을 알아낸 건 아니겠죠?"
태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그럴 리가. 걔가 어떻게 알아. 절대로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