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2월 중순. 설 연휴를 포함한 2주간의 학원 겨울방학도 절반이나 지나갔다. 승주가 요 근래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 학원이 쉬는 동안 건강검진을 받아보라고 권하지 않았다면 마지막 정리조차 못하고 떠날 뻔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 지금껏 막역한 우정을 쌓고 있는 승주는 시원이 다니고 있는 ‘승리속셈미술학원’의 원장이자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강사다. 승주는 미대 졸업 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어머니를 돕다가 12년 전 어머니가 풍으로 쓰러져 돌아가시자 학원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방황하던 시원에게 대학 졸업을 권유하고 일자리를 준 사람도 승주였다. 덕분에 시원은 방송대를 졸업한 뒤, 지금껏 승주의 학원에서 8년째 아이들에게 속셈을 가르칠 수 있었다.
내일쯤 시원은 승주에게 들러 이 기막힌 얘길 전해야 한다. 다행히 일주일쯤 남은 방학 안에 그녀를 대신할 선생님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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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부모님의 뜻이 워낙 완강하셨기에 자취를 하던 곳에 들러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나간 김에 승주도 만나고 오겠다며 두 분을 겨우 설득시키고 나서는 길이다.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조금 넘게 나오는 거리에 시원의 집이 있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주인집에 미리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짐을 정리하기 위해 택시를 잡는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두르고 목적지로 가는 동안 자신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택시 기사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시원은, 지나가듯 훑어본 운전 면허증에 새겨진 이름과 사진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함노식?!’
그는 다름아닌 시원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 선생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택시 기사는, 역시나 하는 표정이다. 그는 시원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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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측은지심이 남달랐던 시원은 고등학교에 입학 후, 꾸준히 봉사서클에서 활동해왔다. 그녀가 몸 담고 있던 서클은 워낙 전 세계적으로 활동해 인지도가 높았고, 회장은 꾸준한 활동에 대한 특례로 고교 졸업 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학업성적을 유지하면 동(*)대학에 의대를 제외한 원하는 학과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일종의 수시 개념으로 당시엔 수능을 본 뒤, 정시와 특차 위주로 대학 진학을 결정하던 시기였기에 모의고사 점수보다 내신이 더 좋았던 봉사서클회장 시원에게 이 제도는 충분히 매력 있는 제안이자 미래로 다가왔다.
그녀가 1학년 학기 말을 앞두고 노랑봉사서클 회장으로 선출되자, 담임선생님은 개별 상담을 할 때 이 특전을 설명해주셨고, 주요과목을 중심으로 지금의 성적을 유지하면 충분히 가능하겠다며 대입 전략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주셨다.
일부러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침 K대 약학과를 지망하고 싶었던 시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고자 내신을 중심으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려 애썼다.
중학교 때, 약대 출신 과외선생님의 영향으로 약학과를 목표로 고교입시를 준비했던 그녀였기에 고1인 시원의 하루일과는 고3 학생들 생활 못지않게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채 흘러가곤 했다.
학교와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던 집에서 6시쯤 일어나 준비를 하고, 등교를 하자마자 영어듣기 평가를 한다. 이후 첫 수업시간인 9시 전까지 아침자습을 했다. 청소는 수업이 끝나고 하는 것이 아닌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바로 했었는데, 수업이 끝나면 연이어 주간 자율학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규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면 저녁 식사를 하기 전까지 주간 자율학습을 한다. 그리곤 저녁 식사 이후, 짧은 휴식을 취하고 나면 9시 45분까지 본격적인 야간 자율학습에 들어간다. 이마저도 시원이 1학년 2학기가 되고부터는 한 시간을 더 연장해 10시 45분까지 꽉 채워 야자를 시켰다.
학교에서의 일정이 끝났다고 하루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생들은 운동장 밖에서 야자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학원차량에 몸을 싣는다. 시원은 그 시간에 승주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소규모로 과외를 했다. 그렇게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지쳐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격주마다 서클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이후엔 죽마고우인 승주, 석희와 만나 일주일의 회포를 풀며 늦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일요일이나 돼야 가족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평일은 아침 식사할 때를 제외하곤 부모님과 쪽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는데, 간혹 배고플까 봐 간식을 챙겨두시곤 수고했다는 격려의 쪽지를 남기시는 것으로 소통을 대신하는 식이었다. 이렇듯 시원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은 고3의 생활만큼 빡빡했고, 이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내신 위주로 공들인 나름의 입시 준비였던 것이다.
2학년이 되고부터는 회장으로써 여러 가지 서클활동을 하거나, 진선을 만나며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자연스레 공부시간이 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대학 측이 조건으로 내건 성적은 꾸준히 유지해왔다. 그렇게 3학년 1학기까지 내신을 중심으로 무사히 주요과목의 성적들을 지켜왔는데, 수능을 100일 정도 앞둔 어느 날. 학생주임의 호출로 불려간 교무실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뜬금없이 제2외국어 성적이 조금 부족한 탓에 특전을 진행할 수 없게 됐으니, 마음을 접고 지금이라도 수능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입시요강에 그런 조건까진 없다고 반박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되면 대학에 속해있는 우리 학교 입장에선 곤란하게 될 테니 지금껏 그녀가 봉사활동을 해온 이력을 적당히 조건이 맞는 다른 학생에게 붙여 그 애에게 입시원서를 대신 넣게 하겠다는 것이다. 억울하다며 1, 2학년 담임선생님 그 누구도 지금껏 아무런 문제가 없노라 말씀해주셨다고 얘길 하자, 함노식 학생주임은 시원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는 분하고 억울했다. 이제껏 성실함 하나로 학교생활을 해왔던 모범생이었기에 선생님에게 이렇게 비참하게 혼나고 맞은 적은 더욱이 처음이었다. 얼얼하게 부어오른 뺨을 움켜쥐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순간 짧은 정적이 느껴졌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시원과 눈이 마주칠세라 급히 고개를 돌려 도움을 청하는 학생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했다. 그중에는 자신에게 힘내라며 이 특전을 제시해준 1학년 때 담임도 있었고, 당시 시원의 반을 맡고 있던 고3 담임도 있었다.
함노식은, 내가 오죽하면 이제 와 포기하게 하겠냐며, 그러게 처음부터 세심하게 전 과목을 신경 쓰지 못한 너에게 책임이 있다고 시원을 몰아붙이곤,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윽박질렀다. 그날 시원은 맞았다는 수치심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른 선생님들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에 치를 떨어야했다.
이 사건은 교무실에서 ‘그날의 일’을 목격한 일부 학생들의 입을 타고 전교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문계 고등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대입이라는 좁은 문이었기에 부정한 현실을 목격한 학생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고, 금세 분노했다.
함께 7대 봉사서클을 꾸려왔던 다른 서클의 회장들은 이 문제가 자신들과도 무관치 않았기에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초록서클의 회장은 시원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며 이 사건을 공론화 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시원 대신 특전을 누린다는 그 학생이 고등학교 생활 내내 봉사는커녕, 이제 막 서클 회원으로 가입한 ‘3학년 신입생’이라는 불합리한 사실은 소문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대학입시에 한창인 고3 학생이 신입으로 봉사서클에 가입하는 전례는 처음 있는 일인 데다, 그 친구 이름이 함정희로 밝혀지자, 이 일을 주도한 학생주임 함노식과 개인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학교 내에는 점차 입에 담을 수 없는 소문들이 무성해져 갔지만 정작 당사자인 시원은 침묵한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믿었던 어른들에 대한 배신감과 꿈꿔온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한꺼번에 빼앗기고, 진실을 묵살하길 요구하는 시련까지 겪고 나자, 세상이 더럽고 두렵다는 생각 속에 더이상 공부에 의욕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수능 준비 대신 내신에만 매달린 채 공들여 관리해왔는데, 시험이 100일로 코앞에 다가온 지금,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하며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고 만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함정희와 함노식에 대한 이상한 소문마저 돌자, 서클 회장들은 수업 중 학생주임실로 끌려가 함노식에게 뺨을 한 대씩 얻어맞고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면 정학을 시켜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해야 했다. 그는 특히 시원의 뺨을 연달아 때리며, 니가 주범이냐고 소리쳤다.
뒤늦게 달려 온 수학 선생님의 만류로 겨우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날의 일은 시원을 포함한 일곱 명의 아이들에겐 씻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게 되었다. 울먹이던 아이들은 멍한 표정의 시원을 부둥켜안고, 달래주며 안쓰러워했다.
평소 시원을 예뻐하던 수학 선생님은 놀란 아이들의 마음을 진정시킨 뒤 교실로 돌려보내고는, 시원을 따로 남겨 신경 써주며 위로했다. 부당하다고 느끼겠지만 대학 측에서 문제로 삼자면 충분히 입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부분이라며, 노력해온 시간이 있으니 수능 준비를 열심히 해달라고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언제든 도와주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시원은 그제야 선생님께 안겨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학교는 근거 없는 루머로 면학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있으면 문제 삼겠다고 진화에 나섰고, 시간이 흘러 각자 자신들의 문제가 중요한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의 기억 속에 천천히 잊힌 사건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날의 충격으로 시원은 더 이상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 세상을 향한 알 수 없는 원망에 자신을 놓아버린 채 방황하며 서서히 망가져 갔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런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지금 시원의 옆에 앉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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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식은 알고 있냐? 네가 졸업하던 해에 학교에서 잘렸다.”
“...”
노식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얘기 시작했지만, 시원은 대꾸조차 하기 싫어 창밖만 바라본다.
“예전엔 정말 미안했다. 그땐 우리 아들이 많이 아파서 돈이 필요했어... 너한테 몹쓸 짓을 하고는 양심에 가책을 많이 느꼈다. 변명 같지만 착실한 너라면 이겨내고 열심히 살아 줄 줄 알았는데, 그 뒤로 공부에 손을 놓은 네 눈빛이 참 많이 공허하더라. 그런 너를 본 뒤로 선생이랍시고 날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의 눈조차 제대로 쳐다보기가 불편했다... 학교에서 잘리고 나니 차라리 숨은 좀 쉬겠더라. 이리저리 학원으로 떠돌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 같아 좀처럼 맘 편히 살지 못했다. 그 사건으로 어디서 뭘 하든 늘 내 발목을 잡아 제대로 취직도 안되더라. 식구들은 나를 부끄러워했고, 결국 아내와는 다투다 지쳐 이혼까지 하게 됐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며 살진 않을 텐데...”
“...”
“난 내 죄로 이렇게 마지못해 산다. 그래도 너만은 잘 지냈길 바랐다면 그마저도 욕심이겠냐?”
노식은 자신에게 아무 말 하지 않는 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떨군다.
목적지 부근의 마지막 좌회전 교차로 앞에서 멈춰선 택시는 조용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차 안은 규칙적으로 딸깍이는 깜빡이 소리만 요란할 뿐,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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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은 자신이 졸업한 뒤, 누군가 교육청에 이 사실을 신고해서 조사에 들어갔고, 결국 교감까지 뇌물로 연결되었음이 밝혀져, 이에 관여한 사람들이 학교에서 전부 잘렸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소문에 의하면 함정희도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지 K대 측으로부터 자퇴 권고를 받고는 입시를 위해 재수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 일이 사학비리와 관련해 tv뉴스에 토막으로 실려 보도되기까지 하자, 한 동안 여러 풍문들이 사실인 양 떠돌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묵과했던 선생들 중 누군가 양심에 찔려 신고를 했다거나, 서클 회장의 부모들 중 누군가가 자식이 이유 없이 뺨을 맞고 들어오자 이를 추궁하다 사실을 알게 되어 교육청에 고발했다는 등 확실치 않은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중엔, 대학 입시에 실패한 시원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신고했을 것이란 소문이 가장 그럴싸했는지 주를 이뤘고, 결국 이 소문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의 부모님까지 사건의 내막을 듣고는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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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다. 시원은 그날의 아픔을 더 이상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만나면 꼭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는 노식을 보자니, 삶의 마지막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그를 만난 건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우연은 아닌 듯싶다.
“아프다는 아드님은 괜찮으세요?”
“다행히 수술을 제때 해서... 작년에 결혼해 아이 낳고 잘살고 있어. 하지만 원망이 워낙 커서.. 이젠 남보다도 못해. 손주 녀석 얼굴도 아직 못 봤고... 다 내 죄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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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식은 지갑을 꺼내는 시원을 만류하며 그냥 가라고 말했다.
20여년이 지나 다시 만난 그는 너무나도 볼품없이 늙어 있었다. 비리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잘리고 학원가를 전전하다 끝내 가족들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그를 더 이상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시원은 이제 미움도 원망도 모두 내려놓고 싶었다.
그녀는 택시 문을 닫으며, 노식을 향해 말했다.
“지난 일은 그만 잊고, 편히 사세요.”
“...”
시원이 돌아간 뒤, 시간이 꽤 흘렀지만 택시는 그 자리에 선 채 오랫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