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간다..

#1

[후회Ⅰ(‘해버린 것’들에 관한 후회)]

“젊은 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간암 말기입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자신이 죄인 인양 환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채 읊조리는 의사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시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되묻는다. 그녀는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덜컥 내려앉은 가슴에 놀란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는 탓에, 크게 두근거리는 그 박자에 맞춰 온 몸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것만 같다. 시원은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선생님, 저 멀쩡해요. 지금껏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갑자기 암이라뇨? 게다가 말기라뇨! 이상하잖아요!!”

의사는 황망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울먹이며 절규하는 시원을 향해 티슈를 건네주곤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간을 흔히 침묵의 장기라고 말합니다. 간암 초기에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간혹 생활하시는데 큰 지장이 없어 모르시다 말기가 되어 손쓸 수 없게 된 후에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각하게도 간 수치가 정상보다 월등히 높은 지경이라, 이대로는 치료와 처방이 무의미합니다. 안타깝지만 환자분께선 조직검사 조차 할 필요가 없는 상태네요...”

딱히 손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시원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타오르는 불구덩이 같던 자신의 마음이 한순간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냉정히 가라앉은 마음을 추스르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본다.

“저는... 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

“단정 지어 말씀드릴 순 없지만... 대략 한 달에서 3개월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하아...”

“남은 시간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보내시고, 평소 드시고 싶었던 것들을 챙겨 드시면서 마음을 잘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오른쪽 윗배에 통증이 잦을 겁니다. 그럴 때 조금이나마 편해지실 수 있도록 진통제 넉넉히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지금도 황달기운이 보이는데 앞으로는 더 심해질 겁니다. 그리고 복수가 차거나 토혈이나 하혈, 갑작스러운 고열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견디기 힘들어지면 응급실로 오시거나 바로 내원하십시오.”

시원이 죽어가고 있다는 의사의 간접적인 설명 하나하나가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깊은 나락 속으로 밀어버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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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더 이상 악화 될 것도 없다는 참담한 현실 앞에 어느새 말라버린 눈물 사이로 한숨과 헛웃음이 흐른다. 이제 고작 마흔이다. 40년을 겨우 채우고 이렇게 끝나버릴 한 줌의 인생이 서글프다.

시원은 버스 창가에 기대어, 떨리는 손으로 쉼 없이 흐르는 눈물을 먹먹히 닦아낼 뿐이다.

그녀는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넋이 빠진 채로 집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 안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그리곤 이대로 죽어버리기엔 너무나 젊고 안타까운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원은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울다 지쳐갔고, 한동안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절망했다.

오랫동안 울다 지치면 연이어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고, 가까스로 화를 삭이고 나면 허무하리만치 텅 빈 생각들로 가득 차버린 스스로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자신의 처지가 처량 맞고 불쌍해서 한참을 더 울곤 했다.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의사의 당부가 우습게 느껴질 만큼 주변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일도, 평소 좋아했던 음식을 챙겨 먹는 일도 그녀에겐 모두 부질없는 것들로만 여겨졌다.

시원은 점점 시들어가는 꽃처럼 야위어갔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쓰러져 울기만 한지 3일째 되던 날. 통증이 깊어지고 각혈을 하고 나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대로 허무하게 죽어버리면 남겨진 가족들에게도 못 할 짓이라는 생각에, 냉정하게 모든 것을 인정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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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 들러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말도 안 된다며 까무러치신 어머니와 참담해하시던 아버지. 그리고 말없이 누나를 안고 아이처럼 소리 내어 펑펑 울던 동생 시준이까지..

시원은 남겨질 가족들의 슬픔이 더욱 아프다.

깨어난 뒤 어머니는 다른 병원도 가보자며 떼를 쓰셨지만, 조직검사조차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손쓸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의사의 숨은 말뜻을 이해하셨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달래며 진정시키자, 땅을 치며 통곡하시는 것으로 믿고 싶지 않은 자식의 병을 받아들이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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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마음의 정리를 마치고 각오를 하고 있다는 시원에게 그래도 모르니 최선을 다해보자며 어디서 구했는지 암에 좋다는 음식들을 구해와 매일 달여 먹이시는 부모님의 정성이 애달프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간에 더욱 무리를 줄 것이라고 경고했던 의사의 말보다, 죽어가는 자식을 향해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고자 애쓰시는 부모님의 안타까운 사랑을 매정하게 외면할 수 없었던 시원은 먹히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삼켜내며 마지막 남은 도리를 다 하고 있다.

통증은 생각보다 빈번하고 잔인하게 찾아왔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진통제로도 아픔이 가시질 않을 땐, 차라리 이대로 그냥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려야한다. 하지만 통증보다 시원을 더 아프고 괴롭게 하는 건 ‘이렇게 아프게 살다 가게 할 것을, 낳기만 하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미안하다’며 우시는 어머니와 ‘나 때문에 몹쓸 병에 걸렸다’며 자책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일이다. 자식이 아파 죽어가는 것도 몰랐다는 죄책감에 자신들의 가슴을 치며 ‘내가 죽어야지 왜 저 불쌍한 걸 데려가느냐’고 한스럽게 우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뵐 때면 시원의 두 눈엔 어김없이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곤 했다.

*

시원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아이 같은 성향이 짙었다. 머리를 길러 묶거나 억지로 파마를 시키려 들면 온종일 울고 떼를 쓰며 원하는 짧은 머리를 해 줄 때까지 고집을 부렸다. 평소엔 더 없이 온순했던 딸이었기에 부모님은 아이의 이상하리만치 강한 고집에 의아해하면서도 겨우 길러 놓은 아까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주며 자식의 생떼를 못이기는 척 받아주시곤 했다.

그녀는 특히 운동을 좋아하고 실력 또한 또래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뛰어나 중학교 땐 여러 고등학교 운동부에서 자신의 학교로 진학하길 바란다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일부러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것이 아닐 텐데도 인형보다는 로봇이, 고무줄이나 소꿉놀이 보다 총싸움과 몸으로 하는 놀이가 좋았던 시원은 확실히 평범한 여자아이들과는 성향이 다른 아이였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엄마 화장품을 바르는 시늉을 하고 놀고 있을 때, 시원은 아빠처럼 넥타이를 매고 담배를 물며 면도하는 흉내를 내다 뺨을 베인 적도 있다. 그런 시원을 보며 동네 어른들은 아들대신 태어난 모양이라고 말하곤 했다.

시원이 처음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었던 상대는 옆집에 사는 여자 친구였고, 남자아이들은 자신과 같이 어울려 다니며 함께 장난치는 친구 무리 정도로만 여겼다.

사춘기에 느낀 특별한 감정도 성적인 욕구를 느끼는 대상도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은 그녀에겐 커다란 충격이자 말 못할 고민거리였다. 착실한 성격 탓에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부모님께 죄를 짓는 것만 같다고 느껴져 늘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왔고, 고2때 진선을 만나며 시작된 지독한 가슴앓이를 통해 처음으로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을 깨달았을 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눈물로 인정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죽음을 앞둔 지금까지도 시원은 자신의 사랑 앞에서 단 한 번도 맘 편히 자유롭지 못했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가족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혼자 참고 견뎌내야만 했던 이 슬픈 비밀은 시원의 삶을 꽤 오랜 시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남들과 다른 삶, 그 속에 감춰 온 비밀과 그로인한 좌절, 그리고 막막하기만 한 자신의 미래를 앞두고 벌어진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소위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자, 그 동안 힘겹게 지키며 버텨왔던 정신력은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오랫동안 시간만 낭비하는 시원에게 부모님은 재수를 권유하셨고, 명목상 재수를 시작하긴 했지만 3년이 다 되도록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며 마음을 못 잡고 무기력하게 지내던 자식에게 아버지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다그치셨다.

그날, 시원은 울먹이며 그 동안 힘들게 숨겨왔던 자신의 비밀을 부모님께 전부 털어놓았다. 그렇게 이반임을 커밍아웃 한 스물셋 이후, 줄곧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지금껏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홀로 자취를 하며 살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딸의 얘기를 듣고, 밀려오는 배신감을 떨쳐내지 못하시고는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말라며, 여기서 연을 끊자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평소에는 한 없이 자상한 분이셨지만 한번 아니면 죽어도 끝을 보고야 마는 아버지의 단호함에 남은 식구 중 어느 누구도 시원에 관한 얘기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10여년을 떨어져 지내왔다.

집을 떠난 뒤로 끊임없이 연락을 시도했지만 아버지는 시원의 연락을 단 한 번도 받아주지 않으셨다. 소중히 키워왔고 부족함 없이 지원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은 아는지 저 역시 여태껏 말썽한번 부리지 않고 착실히 지내왔던 큰 딸이었기에 누구보다 의지하던 애틋한 아이였다. 그는 시원을 아끼고 사랑한 만큼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와는 10년 동안 한 번도 만날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친구인 승주를 통해 시원에게 돈이며 반찬 등을 보내오셨고, 가끔씩 몰래 만나 안부도 물으셨다. ‘네 아버지 고집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며, ‘너는 잘못한 게 없으니 당당히 살라’고 격려까지 해주셨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남동생 ‘시준’ 역시 군대를 다녀온 뒤, 그렇게 집을 떠나버린 시원을 그리워하며 안타까워했고, 이후 따로 만나 함께 술도 마시고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는 등, 예전과 다름없는 마음으로 누나를 따르고 의지했다.

시원은 당당히 살라는 어머니의 말씀과 누나니까 모두 이해한다는 동생의 믿음에 큰 위안을 얻었지만, 한편으론 아버지께 죄송스러웠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식구들에게 차마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늘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채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족을 다시 만나기 시작한 건, 승주의 권유로 다녔던 방송통신대에서 4년의 공부를 마치고, 전국수석졸업을 한다는 소식을 집에 알려오면서부터였다.

4년 동안 1등을 놓치지 않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소식은 어머니와 시준을 통해 아버지께 전달되었고, 아버지의 환갑 전에 수석으로 졸업해서 꼭 다시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이뤄내자, 완강하셨던 아버지도 눈물로 돌아온 딸을 다시 받아주셨다. 하지만 시원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 습관처럼 홀로 살아 온 생활방식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전히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진선에 대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일이 편치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선 승주네 학원에 취업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았다는 이유로 자취생활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딸의 고집을 조용히 이해해주셨다. 대신, 이후 시원은 본가에 자주 들리고 왕래하며 지금껏 혼자 살아왔던 것이다.

그랬던 딸이 죽을 날을 받아왔단다. 그래서 시원은 어머니의 눈물도, 아버지의 자책도, 자신이 직접 겪고 있는 통증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바라보며 애달파하실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

죽음을 선고받은 이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지난 삶을 되돌아보던 시원은 자신이 놓쳐버린 순간들을 회상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녀는 특히, ‘하지 못한 것’과 ‘해버린 것’에 대한 수많은 후회 속에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 채로 살아가야만했던 두 가지 사건을 떠올리며 몹시 괴로워했다.

그중 하나가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 바로 그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시원은 그때 그 순간 자신이 왜 조금 더 참지 못했나를 내내 후회하며 살아왔다. 더욱이 이렇게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나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슬픈 비밀일지라도 끝까지 숨기고 혼자 견뎠어야 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잘못된 판단과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시원이 치러야했던 대가는 ‘인생’이라는 잔인한 결과로 돌아왔다.

그녀는 허무하게도 몇 번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자신의 아픔’을 연민하는데 남은 시간을 전부 써버리느라, ‘삶의 의무’를 너무 일찌감치 포기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놓쳐버린 기회’와 ‘과거를 향한 회한’으로 점철된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는 시련 앞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남은 인생까지 망가트리고 말았다는 자괴감으로 남아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시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함부로 낭비해버렸다는 죄책감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허무하게 흘려보낸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기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지기를...’

말도 안 되는 염원인 줄 알면서도,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그녀의 두 눈엔 뜨거운 후회의 눈물만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