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4661 Words
[정리]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시원은 마음이 착잡했다. 늘 당연한 듯 이곳을 드나들었는데, 이젠 그런 당연한 일상이 곧 사라져버리고 만다고 생각하자 서글픈 눈물이 흐른다. 주인아주머니는 오랜 시간 인연을 맺었던 시원이 안타까운 병을 얻었다는 얘길 듣고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부디 마음 정리를 잘 하길 바란다며 꼭 안아주었다.   본가를 나와 가진 돈이 많지 않았을 때, 고시원을 전전하며 고생 끝에 모은 돈으로 얻은 집이었기에 이 집은 그녀에게 무척 특별했다. 작은 침대부터 낡은 소파까지 집안 곳곳은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로 가득했고,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없다.     시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 2년여를 사귀었던 연지수와 함께 보낸 시간들, 친구들이 집들이 때 선물해준 커피포트, 첫 월급으로 샀던 책상 등 그녀는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집안 이곳저곳을 두 눈에 새기듯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침대 밑 깊은 곳에 보관해두었던 검은색 상자를 찾아 꺼내 든다. 그것은 진선과 함께 했던 지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원의 보물 상자였다.   그녀는 상자를 열고, 맨 위에 놓인 ‘푸른색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 그 속엔 고교 시절 시원의 스케줄 및 용돈의 출납 등을 기록한 메모들과 스티커 사진들로 가득했고, 그것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 색이 바래질 대로 바래져 있었다. 시원은 지난날 친구들과 수시로 스티커 사진을 찍고, 서로의 다이어리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사진을 붙이며 장난쳤던 일들을 떠올리곤 이내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잡동사니들이 즐비한 상자 속엔 진선이 자신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인 ‘미키마우스 가방 고리’와 시원이 진선의 생일날 사줬던 ‘커플 삐삐’, 두 사람이 마니또를 시작하며 써 내려갔던 ‘교환일기’ 몇 권도 함께 들어있었다. 그 밖에 진선이 직접 짜준 ‘목도리’와 수능 응원 선물이라며 만들어준 작은 ‘치어리더 봉제 인형’ 그리고 미니 ‘앨범’과 이제는 마땅히 인화할 수도 없을 빛바랜 ‘필름’까지 딱지처럼 접힌 수많은 ‘쪽지’와 ‘편지들’ 틈에 끼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꼼꼼한 성격의 시원은 진선과의 추억이 담긴 것이면 작은 메모 하나까지도 절대 버리지 않고 이렇게 고이 모아 보관해왔던 것이다.   진선과 함께 듣던 워크맨 속에는 언젠가 그녀가 울며 시원에게 진심의 말을 녹음해 주었던 카세트테이프가 꽂혀있었다. 시원은 낡은 이어폰 커버에 붙어있던 먼지를 털어낸 뒤, 귀에 꽂고는 워크맨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 옛날만큼 깨끗하진 않지만 그 시절 그리웠던 진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녹음테이프를 듣던 시원은 음성메시지를 다 듣고 난 뒤 이어폰을 빼고, 침대 위에 펼쳐져 있던 편지와 쪽지들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녀는 상자 속에 담긴 추억들을 모두 가슴에 새기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진지하게 편지를 읽어나갔지만 이내 터져 나오는 울먹임을 참지 못했고, 곧이어 허탈한 표정으로 웃다가 결국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표정만큼 복잡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보다 더 중요한 마지막을 떠올리며, 그 동안 가슴 아파 제대로 꺼내 보지 못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두 눈 가득 애써 담고 있는 중이다.         -   17년 전, 부모님의 집을 떠나왔던 그 순간에도 차마 두고 나올 수 없었던 진선과의 추억이 담긴 상자를 이제는 버려야 한다.   종이들을 태울 만한 곳을 알고 있던 시원은 마지막으로 집을 둘러본 후, 인부 몇 명을 불러 돈을 넉넉히 **하곤 그들에게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모든 정리를 마친 뒤, 상자 하나만 조용히 품에 안고서 추억의 장소로 향했다.         --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이 자주 찾지는 않지만 근처 수목원과 영릉을 잇는 샛길에 위치한 진선과 시원의 추억의 카페 다카포. 큰 간판에 D.C라고만 쓰여 있어 사람들은 이곳을 그냥 ‘DC카페’라고 불렀다. 하지만 피아노를 좋아했던 진선은 이 카페의 간판을 보자마자 바로 “다카포..”라고 중얼거렸다. 시원은 그녀로부터 다카포가 악보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라는 뜻을 가진 기호라는 것을 배웠다.   제법 외진 숲길 옆에 자리하고 있어 카페를 찾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던 당시 두 사람은 그곳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었다.   카페 주변은 도심 한복판에 위치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즈넉한 전원을 떠올리게 했다. 옛 왕조의 능을 보존한 영릉과 수목원을 잇는 샛길 초입에 위치한 이 카페는 동네 부잣집들이 길게 담장을 늘이던 마을의 한적한 숲길 끝머리에 맞닿아 있었다. 자연환경을 살린 커다란 인공 연못 옆에 위치해 있어 통유리로 지어진 카페의 창을 열면, 이어지는 테라스까지 꽤 멋진 경치가 펼쳐진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해 ‘맛집’이나 ‘멋집’을 찾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아는 사람만 몇 안다는 숨겨진 명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졸업 이후부터 집을 나오기까지 3년 동안 시원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난날 다카포의 커다란 벽난로에서 영수증이나 땔감 등을 태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곳에 들러 진선에게서 받은 것들을 태우고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원이 다카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카페는 철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의 말로는 이곳을 허물고,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이 쉴 수 있는 스쿨존 쉼터로 만들 것이라며 오늘부터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시원은 추억의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에 크게 실망했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카페가 마치 삶을 다한 자신의 모습인 것만 같아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이곳에서 진선과 매년 ‘4월의 약속’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꺼져가는 시원의 생명처럼 그 약속도 잊히고 말 것이라 생각하자, 온 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한동안 체념한 듯 건물이 철거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카페 바로 옆에 있었던 은행나무 한 그루가 공사 중에도 변함없이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시원은 오랜만에 추억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보자 몹시 반가웠다.   서낭당 자리였다는 나무. 그래서 오랜 시간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누구 하나 감히 함부로 건들 수 없었다는 얘기를 언젠가 카페 사장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기억이 난다. 들리는 얘기로는 족히 천년을 산 은행나무랬다. 동네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라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주었다. 시원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마을 어른들이 나무에 간단한 제사를 지내주는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동네 아이들은 이 나무를 ‘혹부리 소원 나무’라고 불렀다. 왼쪽에 커다란 혹 주머니를 달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크기가 매년 조금씩 자라 이젠 웬만한 어린아이보다도 컸다. 게다가 옛날부터 이 나무에다가 자기 이름과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함께 쓰면, 그 사랑이 이뤄진다는 소문 때문에 철없는 학생들의 낙서로 나무는 늘 몸살을 앓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무 주변엔 들어가지 말아 달라는 보호 푯말이 세워져 있고, 그 주위에 사각 형태로 줄을 쳐놓아 경계를 만들어뒀지만, 그 시절 적힌 낙서 중 일부는 여전히 나무 이곳저곳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됐다.   시원은 성인 대여섯 명이 모여 두 팔을 뻗어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주변을 돌며 손 끝으로 가만히 나뭇결을 더듬었다. 그러다 한 곳에 멈춰 서서 몸을 굽히고는 나무 아랫부분에 새겨진 진선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리곤 쓸쓸한 표정으로 진선이 직접 쓴 그 글씨를 조심스레 만져본다. 그 후, 시원은 나무 옆 작은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그곳을 바라보며, 진선의 이름을 발견한 ‘스무 살의 어느 봄밤’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진선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날’부터 시작된 ‘첫 담배’의 슬프고 아련했던 기억을 추억하며,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고는 천천히 태워 나갔다.       -   해가 지자 다카포 카페는 완전히 철거되어 그 터만 남았고, 인부들도 정리를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시원도 승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결국 태우지 못한 상자를 다시 옆구리에 끼고 추억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무거운 짐을 한가득 이고 다리를 절며 걸어가는 가는 웬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시원은 다가가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렸고, 노인은 시원에게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셨다.       우거진 가로수 사이로 드문드문 설치 된 가로등..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운치 있는 이 곳은, 건물이나 네온사인이 없어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길이다. 마을은 삼거리를 중심으로 대학가와 주택가 그리고 수목원으로 향하는 이곳 숲길로 나뉘어져 있었고, 시원과 진선은 이 길을 산책하는 걸 참 좋아했었다. 어둑어둑한 나무 숲길 사이로 살며시 얼굴을 내민 보름달이 정겹다. 그녀는 문득 떠오른 옛날 생각에 잠시 마음이 들뜬다.   ‘추운 겨울이 가고 향기로운 봄꽃이 가득 피면, 몇 번이나 걷고 또 걸었을 소중한 이 길...’ 시원은 봄을 느껴 볼 기회가 이제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쓸쓸해졌다.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다 심란해져 버린 그녀는 자꾸만 드는 허무한 생각을 돌리고자 슬쩍 할머니 쪽을 바라본다. 노인의 한쪽 얼굴은 예전에 크게 다친 듯 무너지고 흘러내려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검버섯 가득한 피부가 너무나 쳐져 있어 전래동화에 나오는 혹부리영감이 연상 될 만큼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시원은 철없는 아이들이 놀리지는 않았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리마저 절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어쩌다 이렇게 되셨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노인 혼자 들기엔 짐이 꽤 무겁다.     “할머니, 이렇게 무거운 걸 혼자서 들고 오셨어요?”   “그렇지 뭐... 그나저나 나 때문에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게 되어 어쩌누?”   “괜찮아요. 그런데 봉투에 든 게 뭔데 이렇게 많아요?”   “떡이랑 과일...”     할머니는 다카포 카페 근처에서 이제 집에 다 왔다며, 시원에게 도와줘서 고마웠다는 말씀을 하시곤 짐 꾸러미에서 주섬주섬 팥떡을 꺼내 한 귀퉁이를 떼어 그녀의 입속에 넣어주려고 하셨다. 괜찮다며 거절하자, '어른이 고마워서 주는 것이니 손부끄럽지 않게 어서 먹으라'며 자꾸만 권하신다. 입이 깔깔했던 시원이지만 할머니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직접 입에 넣어주시는 떡을 받아먹는다.   떡을 오물거리는 시원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노인은 카페 뒤쪽에 있는 주택가까지 마저 짐을 들어드리겠다는 시원에게 다 왔으니 괜찮다며 어여 가라고 손짓하셨다.   뒤 돌아 몇 발자국 걷다가 무거웠던 짐이 생각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어느새 가버렸는지 노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 승주는 웬 상자랑 두툼한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비틀거리며 문밖에 서 있는 시원의 모습이 인터폰 화면에 보이자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의 안색은 핏기가 없다 못해 누렇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술 한잔해.”     시원은 식탁에 앉자마자 자신이 사 온 맥주 캔을 열고 들이키며 말한다.   승주는 얼떨결에 시원의 맞은편에 앉긴 했지만 며칠 안 본 사이 급격히 핼쑥해진 친구가 걱정스럽다.   “너 술 마셔도 되겠어? 얼굴이 많이 안 좋은데..”   “승주야...”   “응?”   “나... 간암 말기란다.”   “뭐?!”   “나 이제 곧 죽을 거래.”     시원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자, 승주는 당황하고 어이가 없어 어쩔 줄 몰라 한다.     “누가 그래? 병원은 가본 거야? 멀쩡했는데 말이 돼?”   “그러게... 말이 되더라고...”   쓸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시원을 바라보는 승주의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야! 니가 왜... 이렇게 멀쩡한데, 니가 왜에-!”   “흐흑...”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어. 이렇게 젊은데 니가 왜.. 흐흑...”       두 친구는 말없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시원은 “어떻게 하면 좋냐..”를 연발하는 승주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승주는 이 와중에도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시원이 불쌍해서 화가 났다. 하루아침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외동이던 자신에게 혈육만큼 소중한 친구였던 시원이 몹쓸 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말을 승주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이렇게 죽어가는 동안 왜 제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질 못한 걸까...’   승주는 바보 같은 친구를 원망하며,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시원을 이대로 떠나보내기엔 고되고 힘들었던 그녀의 삶이 너무나 허무하고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더는 흐를 눈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승주를 달래며 북받친 감정이 되살아나버린 시원은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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