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너 나 싫어하지?

2936 Words
임안이 휙 고개를 들자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가씨, 얘가 우리보다 믿음직스럽지 않아? 얘가 은행까지 데려다줄 거야."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임안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찬영은 모자를 벗으며 걸어 나왔다. 옷을 갈아입은 그는 검은색 티셔츠에 헐렁한 회색 바지를 입고 있어 무릎의 상처를 가리고 있었다. 임안 옆에 선 그는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임안은 그렇게 박찬영의 뒤를 따라나섰다. 노란 머리의 남자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역시 박찬영은 학생처럼 보일 때가 제일 믿음직스럽다니까." 늘씬한 키에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박찬영은 임안을 기다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001 호출, 지금 내가 해야 할 임무가 있어?'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아, 그래.' 임무가 없다면? 호감도를 올려 볼까? "저기..." 임안은 종종걸음으로 박찬영을 따라잡아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우연이네, 너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방금 그 노란 머리 남자가 길을 알려 달라고 하니까 알려 주던데, 설마 박찬영이 그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고등학교 시절의 박찬영은 너무 불쌍하잖아. 임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그 오빠랑 꽤 친해 보이던데, 너 자주 PC방에 와? 혹시 네 친구들이야?" 【띵! 001 알림: 호감도 -1 하락했습니다.】 '혹시 사생활에 관련된 거라 답하기 싫은 건가? 그럼 다른 주제로 바꿔 봐야지.' "아, 그리고 은행 근처에 다 오면 나한테 말해 줘! 나 혼자 갈게!" 【띵! 001 알림: 호감도 -1 하락했습니다.】 '알았어,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몇 걸음 걷던 임안은 고개를 들어 박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임안에게 말을 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임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찬영, 너... 혹시 나 싫어?" 임안의 말에 박찬영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미처 멈추지 못한 임안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부딪혔다. "임안, 난 그냥... 네가 말이 좀 많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박찬영은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설마 고등학교 때 박찬영이 이렇게 과묵한 아이였을 줄이야!' 임안은 답답함을 느꼈다. '호감도가 떨어지든 말든 어쩔 수 없지! 이번엔 내가 참아야지!'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작은 골목길을 걸어갔다. 임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호감도가 떨어지든 말든! 이번에는 꼭 물어봐야겠어! "박찬영, 다리 어때? 아직도 아파?" '보니까 잘 걷는 거 보니 이제 안 아픈가 보네.' "괜찮아." "아, 그래." 잠시 후, 임안은 다시 고개를 들어 물었다. "오늘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서 약을 안 받아 온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소독해?" 【띠링! 001 알림: 호감도 +2】 '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인데! 좋아, 이대로 계속 가는 거야!' "이따가 나랑 같이 약국 가서 약 살래? 어차피 내일 휴일이라 나 할 일도 없는데!" 【띠링! 001 알림: 호감도 +2】 박찬영은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네, 호감도는 올라가는데 왜 대답이 없지?' "박찬영? 무슨 생각해?" 박찬영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임안을 내려다보았다. 임안은 고개를 살짝 든 채, 통통한 볼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슴처럼 크고 맑은 눈망울이었다. "너 아버지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어?" 말투에는 '약국에 갈 시간이 어디 있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아, 맞다. 미안, 잠깐 깜빡했네." 정비소는 거리 가장 안쪽 넓은 공터에 자리 잡고 있었고, 주변에는 주택가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임안은 안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임현철은 폐차된 트럭 바닥에 엎드린 채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직원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거 안 보이냐? 이렇게 살짝 돌리기만 하면 열린다고. 괜히 힘 빼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장님!" 임안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빠, 드디어 다시 만났네!' 임안과 박찬영은 키 차이가 나란히 가로등 아래 서 있었고,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임현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임현철은 임안이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몇 초 후, 그는 부품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안안?" "아빠!" 임안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말을 이제야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서인지 애틋함과 무심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임현철은 차 밑에서 기어 나와 손에 묻은 기름때를 털었다. "사장님? 따님이세요?" 직원 김현수씨가 물었다. "그렇다니까. 우리 딸이야. 예쁘지?" 임현철은 장갑을 벗어 김현수씨에게 던져 주었다. "따님이 사장님 닮아서 정말 예쁘시네요!" 임현철은 성큼성큼 임안에게 다가갔다. 박찬영을 발견하자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박찬영 역시 그에게 목례를 건넸다. "아빠, 서로 아는 사이였어?" 임현철은 임안을 박찬영 옆에서 끌어당기며 말했다. "쯧, 밖에서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늙어 보이잖아." 그는 턱으로 박찬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맨날 이 동네에서 어울려 다니니까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지." "그나저나 너야말로 귀한 손님이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더니?" 임안은 아빠의 팔에 매달려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지~" 임현철은 목을 뒤로 빼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의 소중한 딸을 바라보며 단정 지어 말했다. "무슨 일 있구나! 돈 필요해?" "아니야!" 임현철은 갑자기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박찬영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남자 친구 생겼냐? 그것도 나 기죽이려고 일부러 데리고 온 거야?" 그 말에 임안과 박찬영은 동시에 당황했다. "아니에요, 같은 반 친구예요. 아까 길에서 우연히 만나서 길을 물어봤더니 여기까지 데려다줬어요." 【띵! 001 알림: 호감도 -1】 임현철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나 보러 온 거야?" "그럼요! 아빠 일하는 곳이 궁금해서 구경하러 왔지!" 잠시 후, 임현철은 '들어오세요'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아가씨, 저희 가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임안은 아빠를 따라 간단히 가게를 둘러보았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박찬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쪼그리고 앉아 김현수씨의 나사 조이는 일을 돕고 있었다. 김현수씨가 말했다. "헤헤, 사장님, 이 친구 괜찮은데요!" 임현철은 박찬영을 흘끗 보더니 입을 삐죽 내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 퇴근 언제 해?" 임안은 그의 팔에 매달려 물었다. "아차, 오늘은 네가 온 게 조금 아쉽게 됐구나. 아직 수리해야 할 차가 한 대 남아서 말이야. 내일 손님이 찾으러 온다고 했거든." 임안은 속으로 기뻐했다. 그럼 박찬영을 구슬려서 약국에 가서 호감도를 올릴 수 있겠네! "쯧, 너 표정이 왜 그렇게 즐거워 보이냐?" 임현철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임안은 미소를 거두고 심각한 척 말했다. "아빠,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갑자기 숙제가 너무 많이 남았다는 게 생각나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 "그래, 얼른 가 봐!" 임안은 박찬영을 따라 되돌아갔다. 이 동네는 주민이 많지 않아 가로등이 제대로 켜져 있지 않았고, 가끔씩 깜빡거렸다. 야맹증이 있는 임안은 자신도 모르게 옆 사람에게 몸을 기댔다. 박찬영은 옆에 바싹 붙어 있는 가느다란 허리를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꿀꺽 삼켰다. 그는 소녀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에 괜히 마음이 심란해져 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임안은 깜짝 놀라 황급히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PC방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안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박찬영은 PC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임안에게 물었다. "아까 네 말 아직 유효해?" "당연하지! 가자, 약국!" "잠깐만 기다려." 박찬영은 계단을 올라가 PC방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후, 그는 헬멧을 들고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오토바이 키가 한 바퀴 돌아가자 옆에 있던 검은색 오토바이가 경적음을 두 번 울렸다. 그는 임안에게 헬멧을 건네주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타." 임안은 헬멧을 쓰고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띠링! 001 알림: 호감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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