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버지는 사장님

3999 Words
임안은 손으로 턱을 괴고 교실 앞쪽 벽에 걸린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며 초침 소리에 맞춰 속으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왜 아직 종 안 쳐...? 집에 가서 아빠 보고 싶은데...' 천장 선풍기는 끽끽거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교실에는 임안과 박찬영, 단둘만 남아 있었다. 박찬영은 앞에 앉은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턱을 괴고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하더니, 이내 책상 서랍 속 책을 전부 꺼내서 순서를 바꿔 다시 집어넣었다. 책상 위에 놓인 책들도 창가 쪽에서 반대쪽으로 옮겨졌다. 그러고는 다시 벽에 걸린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소녀는 갑자기 감전된 듯 움찔하더니,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두 팔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펜을 들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박찬영은 앞에 앉은 알 수 없는 이 여자애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져서, 연습장을 서랍 속으로 쑤셔 넣고 교실을 나서려 했다. "박찬영! 어디 가?" 임안이 그를 불러 세웠다. "나도 같이 가!" 박찬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장실." "아." 임안은 조금 머쓱해져서, 막 일어섰던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노트에 계획을 써 내려갔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번에는 기회를 잘 잡아야 했다. 비록 죽기 전에도 공부를 그럭저럭 잘했지만,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문과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녀는 수도권 끝자락의 대학교에 간신히 입학했을 뿐이었다. 반면에 최수아는 타고난 문과 체질이라, 우재영과 같은 명문대에 합격했다. 물론 최수아는 우재영을 잘 지켜보고 여자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사랑의 라이벌이 내 곁에?' 임안은 최씨 집안과 우씨 집안이 이미 오래전부터 정략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을 따라야 했다! 이과 공부 열심히 해서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해야지!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임안은 종이 울릴 때까지 교실에 앉아 있었지만, 박찬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학 동안 읽을 책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교실 밖 복도 끝 화장실로 향했다. '설마 화장실에서 넘어진 건 아니겠지?' 남자 화장실 안을 들여다볼 용기는 없어서,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안쪽을 향해 나지막이 불렀다. "박찬영, 아직 있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박찬영, 있어?" 화장실 안에서 낯선 남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다, ㅆㅂ 어쩔래!" 임안은 머쓱하게 뒤로 물러섰다. '벌써 가버린 건가? 다리 다친 거 아직 안 나았을 텐데? 에이, 몰라. 내 할 일만 하면 되지!' 임안은 양손으로 가방 끈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누군가의 한정판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부잣집 도련님인가 보네.' 그녀는 몸을 옆으로 비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내주려고 했는데, 그 운동화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임안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우재영이었다. 그는 이미 운동복을 갈아입고 흰 셔츠 차림으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아직 학교야?" 그가 물었다. 임안은 우재영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 잠시 멍해졌지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학교에 있든 말든 너랑 상관없잖아?" 할 말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일부러 그녀의 앞길을 막고 있는 우재영을 보며, 그녀는 입술을 삐죽였다. "할 말 있어?" "응."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었다. "네 목적 달성했어." 임안은 의아했다. "응?" "오늘 네가 너희 반 박찬영 편든 거,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 무슨 헛소리에요, 아저씨.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우재영은 이런 자뻑남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아니야." 그녀는 해명했다.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희 반 최수아한테 들었는데, 네가 자원봉사 한 거 나한테 물 주려고 그런 거라며?" "......"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우재영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우재영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말했다. "오늘 네가 박찬영 편드는 거 보니까 좀 의외였어. 걔 사정이라면, 너희 반 애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네가 그동안 나한테 아침 도시락 챙겨준 정 때문에 말해주는 건데, 걔랑은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박찬영 사정? 우씨 집안의 사생아? 아니면 감옥에 간 아빠가 있다든가? 죽기 전, 임안은 오로지 우재영에게만 빠져 살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박찬영이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이미지였는지 잘 알지 못했다. 다시 한번 살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우재영이라는 작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박찬영 일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앞으로는 너한테 도시락 안 챙겨줄 거야." 임안은 그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한순간이라도 더 머물렀다가는, 그 온화한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비굴하게 매달릴까 봐 두려웠다. ———— 이미 저녁이었다. 임안이 사는 담안군은 강해시에서 경제 발전이 가장 뒤처진 곳이었다. 시에서는 담안군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신도시를 개발하고 고급 아파트 단지를 몇 채 지었는데, 최수아와 우재영은 모두 그곳에 살고 있었다. 과거 그녀는 우재영을 따라잡기 위해 아빠에게 조르고 졸라 그곳으로 이사했다. 아빠는 그녀를 너무 아껴서 구도심에 있던 집을 헐값에 팔았다. 집을 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개발 바람이 불었고, 그 지역 주민들은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정말 바보 같았다! 집집마다 풍겨오는 저녁 식사 냄새에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낡은 휴대폰 가게를 지나 모퉁이를 돌고, 꼬치구이 노점상들이 늘어선 곳을 지나면 그녀의 집이 나왔다. 임안은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열쇠로 문을 열었다. 자물쇠가 녹슬어서 한참을 힘주어 돌린 후에야 문이 열렸다. '맙소사!'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 아빠는 그녀가 고등학교 다닐 때 자동차 정비소의 사장이었기 때문에, 매일 저녁 8~9시까지 일하셨다. 과거 그녀는 아빠가 온종일 기름 냄새 나는 곳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한 번도 정비소에 아빠를 보러 간 적이 없었다. 임안은 집에 있는 중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반찬이 많지는 않았지만 저녁 한 끼 식사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예전에 우재영을 따라다니던 시절, 임안은 일부러 위층에 사는 예쁜 아주머니에게 요리를 배웠지만, 한 번도 써먹을 일이 없었다. 오히려 아빠가 그 후로 다시는 요리를 하지 않았다. 임안은 3첩반상을 차려 밥 한 공기를 먼저 떠서 먹었다.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열쇠를 챙겨 아빠를 찾으러 나섰다. 아빠가 일하는 정비소는 더 이상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았고, 다만 PC방 옆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정비소는 가본 적이 없었지만, PC방은 사촌 동생 덕분에 구경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의 새 집에 얹혀살던 사촌 동생은 하루 종일 PC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느 날 고모에게 발각되어 임안은 고모에게 끌려가 PC방에서 사촌 동생을 혼내줘야 했다. 그때 일이 꽤 크게 번져서, 그 후로 미성년자는 PC방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문제의 PC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PC방 입구에 걸려 있는 나무판을 올려다보았다. [불량 PC방, 영업 중】 '참나, 이름 한번 거창하네.'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담배 냄새가 진동해서,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임안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서 길을 물어봐야 했다. 이 근처에는 이 낡아빠진 작은 PC방 말고는 영업하는 곳이 없었다. 그녀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가게들은 문 앞에 [점포 임대] 라고 적힌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아니, 아마도 빨간 종이였는데 색이 바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이 PC방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는 희미하게 들리던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려왔다.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모두 같은 구역에 모여 있었다.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작은 칠판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여전히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장님 세계 구하러 가셨음, 손님은 알아서 이용하세요, 시간당 1000원, 알아서 계산해서 돈은 책상 위에 올려놓으세요.] '대단하다, 정말 특이한 PC방이네.' 그녀의 시선은 책상 위로 향했다... 온통 푸른색 지폐뿐이었다. 임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망설였다. 그냥 포기하고 직접 찾아보는 게 나을까... 돌아서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아가씨, 게임 하러 왔어요?" 말을 건넨 사람은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한 마르고 키 큰 남자아이였다. "아니요, 길을 좀 여쭤보려고요." 임안이 대답했다. 노란 머리 남학생은 갑자기 피식 웃더니, 게임을 하고 있는 무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안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의 모든 사람이 목을 빼고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오직 야구 모자를 쓴 남학생만 고개를 숙인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뭔데요? 무슨 길을 찾으시는데요?" "근처에 자동차 정비소가 있는데,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 "어린 아가씨가 거긴 왜 가요?" "저희 아빠가 거기서 일하세요." "에? 아는 사람 있어요? 누군데요?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김씨 아저씨? 아니면 이씨 아저씨?" 임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슬슬 도망치고 싶어졌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무섭기도 했다. "저희 아빠는 정비소 사장님이세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마치 과장된 듯 3초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곧이어 PC방에 있던 남학생들이 그녀에게 달려들 듯 물었다. "아버님 성함이 임현철이세요?" "헐, 사랑스런 동생아! 내가 데려다줄게! 아버님께 내가 정비소에 취직하게 해달라고 해줘!" "야, 동생이 뭐냐! 누님이라고 해야지!" "누님!"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려는 기세를 보이자, 임안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운데 있던 야구 모자를 쓴 남학생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노란 머리는 뒤돌아섰다. "꼴에 남자라고, ㅉㅉ. 한심하게." "동생아, 내가 데려다줄게!" 임안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빠! 그냥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세요! 제가 알아서 찾아갈게요!" 【띵! 001 알림: 호감도 -0.5】 '대단하네. 호감도에 소수점까지 붙다니...! 잠깐만!' '응? 박찬영이 근처에 있어?!'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갑자기 그 자리에서 360도 회전했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노란 머리는 어리둥절했다. '어린 여자애가 우리가 무섭게 생겨서 겁먹었나?' "됐다, 그럼 좀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녀석이 데려다주라고 하자." 노란 머리는 갑자기 의욕에 찬 무리 중 한 명을 향해 소리쳤다. "박찬영, 네가 데려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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