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영은 못 들은 척했다. 임서훈이 우산 값을 물어주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그의 말을 믿지도 않았다.
"강유영, 내 말 들리냐!"
유영은 그 말에 더 빨리 걸었다.
…
차는 미리 유영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유영이 학교 정문에 도착하자,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네가 유영이구나?"
"차 선생님이세요?"
민정은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부드러운 인상에 인내심 많고 책임감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민정은 유영을 안으로 안내하며 줄곧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 정말 희정이랑 똑같이 생겼구나. 딱 보자마자 알아봤어."
"네 어머니는 학식이 뛰어나시고, 아름다우시고 상냥하고 친절하신 데다가, 수업 능력도 뛰어나셔서 학생들이 모두 좋아했단다."
"네 어머니와 10년 동안 동료로 지냈으니, 오랜 인연이지.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렴…"
차민정은 시종일관 윤희정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유영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듣고있기만 할 뿐있었다. 민정의 입에서 나오는 다정하고 친절하며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윤 선생님은 강유영에게 너무나 낯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윤희정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할 말조차 없었다.
교정에 거의 다다랐을 때, 차 선생은 그제야 유영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듣자 하니 희정이가 예전에 살던 옛날 집에 살고 있다고 하던데? 아직 살 만하니?"
"괜찮아요."
"그래, 네 어머니는 잘 지내시니?"
"한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
민정은 걸음을 멈추었고, 눈이 금세 붉어졌다. 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연민이 가득했다.
"네 어머니께서 아직 한창 젊으신데, 어쩌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유영을 위로했다.
"분명히 너도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다시 힘을 내야 한단다. 이제 곧 고3이잖니.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받으면, 네 어머니께서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네."
윤희정의 장례식장에서 유영은 그와 비슷한 위로를 셀 수도 없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희정의 장례식장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모두 그녀가 힘들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쓸데없는 변명을 할 생각도 없었다.
강유영의 침묵은 차민정에게는 슬픔에 잠긴 모습으로 보였다. 그녀는 유영이 더욱 안쓰러웠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기도 하지."
유영은 낯선 사람과 그렇게까지 친밀한 접촉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몸이 살짝 굳었다.
고3 1반 교실 문 앞에 다다르자, 교실 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차 선생은 유영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렴."
그리고 나서 그녀는 두 손을 등 뒤로 하고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 서 있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교실 안의 소란스러움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이것이 담임의 위엄인가?
차 선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강경수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들어오렴."
유영은 그녀의 뒤를 따라 얌전히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해졌던 교실은 유영의 등장에 다시 한번 술렁였다.
"전학생인가?"
"와! 진짜 예쁘다!"
"다리 진짜 길다. 내가 뛰어서 무릎까지 닿을 수 있을까?"
"푸하하, 너 비유가 너무 과했어…"
차 선생이 말을 꺼낼 때까지 교실은 다시 한번 조용해졌다.
"다들 조용히 하고. 자, 우리 반에 새로 온 친구야…"
담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뒷자리 남학생들이 야유와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 정말 예쁘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지창민! 조용히 안 해!"
차 선생은 가장 먼저 야유를 보낸 남학생을 단번에 찾아냈다.
"네, 선생님!"
지창민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고, 입가에 손으로 지퍼를 채우는 시늉까지 했다. 차 민정은 시선을 거두고 강유영의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가 자기소개를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유영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교실에는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 선생은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맨 뒷자리 창가 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은 저기… 임서훈! "
이름이 무척이나 낯익었다. 강유영이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계속 엎드려 자고 있던 서훈도 마침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서로의 눈에 비친 놀라움을 확인한 후, 이내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저기 서훈이 옆자리가 비었으니, 네가 거기 앉으렴. 마침 키도 크고."
차서훈은 유영을 데리고 맨 뒷자리로 향했다.
서훈은 혼자서 책상 두 개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긴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두 책상 사이에 엎드려 있었고,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선생님, 제가 팔이 길어서 책상 하나로는 부족한데요."
임서훈의 말은 그의 담임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유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유영은 차 선생에게 끌려 올 때까지만 해도 내내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모습이었지만, 서훈은 그녀의 눈빛 깊은 곳에 숨겨진 거부감을 알아챘다. 자신과 같은 책상을 쓰기 싫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았으니,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차 선생은 목소리를 낮춰 그를 설득했다.
"너 오늘 왜 그러니? 평소에는 착하잖아. 얼른 일어나!"
사춘기 아이들은 예민하고, 특히 여자아이들은 더 그렇다. 서훈이 이러면 유영이 무안해할 것이다. 임서훈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앉아 두 팔로 책상 두 개의 너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둘이 앉기에는 너무 좁아요."
이번에는 차 선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줄곧 조용히 있던 유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비켜줄 거야, 말 거야?"
서훈은 두 팔을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태도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의미는 분명했다. 비켜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유영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을 책상 위에 내던지고는 두 걸음 성큼 다가가 임서훈의 무릎 위에 털썩 앉았다. 순간 교실 전체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내 과장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워!"
"헐, 전학생 완전 터프해!"
"야 서훈, 너 얼굴 빨개진 거 봐…"
아수라장 속에서도 유영은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다. 서훈 당황하며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책상과 의자 사이의 공간은 비좁았고, 소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오렌지 향 바디워시 향기는 너무나 선명해서 그의 머릿속을 잠시 백지 상태로 만들었다. 결국 서훈은 팔다리를 허둥지둥 움직여 옆으로 빠져나왔다.
유영은 바라던 대로 서훈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의자를 창가 쪽으로 옮기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훈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임서훈, 나 창가 쪽에 앉고 싶은데, 괜찮겠니?"
서훈은 마치 뜨거운 오븐에서 막 꺼낸 듯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 끝은 땀방울로 축축했고, 목과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빛났다.
"마음대로 하던가."
"고마워."
강유영은 입꼬리를 한껏 올려 환하게 웃어 보였다. 눈웃음이 싱그러웠다. 그녀는 강태수 그 늙은이의 결혼도 망쳐놓았는데, 임서훈 하나 못 다루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