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나는 가난하다

2647 Words
박준상은 문구가 가득 든 비닐봉지를 한데 모아 묶으며 그 말에 동작을 멈췄고, 얼굴도 살짝 굳어졌다. 유영은 그의 미세한 행동을 모두 눈치챘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저희 엄마가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유영은 2초간 말을 멈춰서 준상의 반응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저를 처음 봤을 때 너무 놀라서 담뱃재 떨어지는 것도 모르셨죠." 박준상는 강유영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잘 지내시나요?" 준상은 무덤덤하게 보이고 싶었기에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의 미소는 무척이나 어색했다. 유영은 가볍게 눈을 깜빡이며 아주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셨어요." "그녀가..." 박준상은 몸을 크게 휘청이며 금전 등록기에 기대고 있던 손을 떨었다. "두 달 전에 창원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암 진단을 받으셨어요. 입원 치료는 받지 않으셨고, 한 달 뒤에 돌아가셨죠. 돌아가시기 전 한 달 동안은 괴로워 보이지 않으셨어요." 강유영은 마치 자신의 죽은 어머니가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가만히 박준상를 들여다보았다. 3초 후, 그녀는 예상했던 대로 박준상의 얼굴에 무너지는 표정을 보았다. 정말 불쌍해. 윤희정에게 버림받은 또 다른 사람이네. 그녀는 문구를 들지 않고 뒤돌아 나갔다. 준상은 매우 슬퍼 보였다. 강유영은 이곳에서 다 큰 남자가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영이 돌아서서 몇 걸음 걷자 뒤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어봤자 무슨 소용일까. 강유영, 그녀는 어머니, 윤희정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입원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울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애원했다. 비록 지난 17년 동안 모녀는 서로 떨어져 지내며 정이 깊지는 않았지만, 유영은 부디 어머니를 잃고 싶지 않았다. 결국, 윤희정은 10년 전 그녀를 버리고 서울을 떠난 그대와 변함없이 그녀가 아무리 구슬피 울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임서훈은 슈퍼마켓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금전 등록기 안에서 준상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유영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 마침 그녀가 "제 엄마를 좋아하시죠"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들어가 봤자 서로 어색하기만 할 테니, 유영이 돌아가면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영이 차분한 어조로 박준상을 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예쁜 여자일수록 마음이 독하다. "서훈아?" 임서훈은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니 준상이 눈가가 빨개진 채 문구류가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서훈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저씨." "가게 좀 봐줘. 나 물건 좀 갖다 줘야 해." 박준상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영이 문구류도 가져가지 않고 이미 가버린 것을 알았다. ... 서훈은 저녁에 집에 가는 길에 강유영의 집 앞을 지나다 문에 걸린 커다란 비닐봉지를 보았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때마침 철문이 안에서 열렸다. 그녀는 레이스 꽃무늬가 달린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어깨에 흘러내렸다. 가로등 불빛에 눈매가 부드러워 보였고, 전체적으로 온순하고 얌전해 보였다. 낮에 슈퍼마켓에서 냉정하고 차분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유영을 두 번이나 쳐다볼 수밖에.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온순하고 얌전하고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우산 돌려주러 왔어요?" 서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 당장 가지러 갖다 줄 테니까 딱 기다려!" 그가 정색하자 깊은 눈매가 공격적으로 변했다. 저런 사람은 성격이 나빠서 상대하기 힘들다. 유영은 신중하게 잠시 생각했다. "오늘 너무 늦어버렸네요. 그만 자야 해요. 내일 아침에 주세요." 혹시 그가 화가 나서 여자를 때리면 어떡하지? 그녀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날도 저물어서 도움을 요청할 행인도 없었다. 임서훈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겨우 8시야!" "저는 아직 어려서 키가 크려면 일찍 자야 해요." "..." 다음 날 아침. 유영은 무언가 가득 든 커다란 비닐봉투를 들고 현관문 앞에서 서훈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가 골목 안쪽 그늘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서훈은 오늘 교복을 입고 있었고, 책가방을 단정하게 메고는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서훈은 약간 놀란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며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바라보였다. 유영도 굳이 사양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에게 물었다. "학교 다녀요?" "..." 서훈은 말문이 막혔다. "학교 안 가면 뭐 해? 비 오는 날 우산도 안 쓰고 쓰레기 주워 먹으러 다녀?" 그는 이렇게 예의 바른 말투로 이렇게 예의 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유영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그가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폭우 속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뭘 웃어!" 그녀가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예쁘긴 했지만, 그는 유영이 웃는 것을 보면 분명히 좋은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유영은 웃음을 거두고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트에서 일하는 거 보고 학교는 안 다니는 줄 알았어." 게다가 임서훈에게서 풍기는 불량스럽고 거친 분위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불량배라고 생각했다. 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 가난해." "... 아." 유영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훈이 꽤 성실하고 대단해 보였다. 유영은 본론을 떠올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우산은요?"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 다음에 돌려줄게." 서훈의 얼굴은 방금 전과는 달리 어색해 보였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다니. 유영은 이런 사람과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됐어요. 필요 없어." 강유영이 돌아서서 학교 방향으로 걸어가자 서훈은 그녀의 말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서둘러 따라갔다. "무슨 뜻이야, 됐고 필요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꼭 내가 속 시원하게 말해줘야 하나요?" 유영은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가 끝까지 따라오자 화가 나서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버렸다. "깜빡한 게 아니라 원래 줄 수 없는 거잖아!" 그녀는 말을 멈추고 비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 우산은 이미 내가 쓰레기통에서 주워 왔거든요!" 임서훈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비닐봉투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고,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같은 걸로 사서 줄게." 그는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야 자기 방에 있던 우산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집에는 그와 그의 어머니인 주현, 단둘뿐이었으니 주현이 그가 집에 없는 사이에 그의 방에 들어와 그의 물건을 만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주현의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우산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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