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내가 기다릴게.

2734 Words
강유영은 중년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 사람들은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까다로운 거야?' 몇 걸음 못 가 유영은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섰다. 쓰레기통 안에는 낡아빠진 우산 하나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우산살은 모두 부러져 있었고, 우산 천은 산산이 찢어져 튼튼한 황동 손잡이만 멀쩡했다. 정교하고 독특한 황동 손잡이는 어제 그녀가 그 남자에게 준 우산과 똑같았다. '이 우산은 지난번에 내가 민서랑 쇼핑할 때, 매장 사은품을 받으려고 같이 계산한 거였는데...' 우산이 비싼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유영은 굳게 입술을 다물고 엉망이 된 우산을 꺼내 들고는 고개를 들어 옆집 문패를 올려다보았다. 황각로 296번지.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곧 자신의 집 앞을 지나치자, 그녀는 우산을 집 안에 두고 다시 길을 빠져나갔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자, 골목은 어제처럼 진흙탕이 아니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자 널찍한 대로가 나왔고, 잡화점과 식당 같은 가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길모퉁이에는 무성한 버들나무 한 그루와 그 옆에 있는 '준상 마트'이라는 간판이 걸린 커다란 슈퍼마켓이 눈에 띄었다. 유영은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아침을 먹고 준상마트로 향했다. 계산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주인이 안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슈퍼마트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고, 그녀는 한참을 찾아다녔지만 식칼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강유영은 주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저기요?" "예! 갑니다!" 맞은편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영이 물었다. "식칼은 어디에 있나요?" 문신이 잔뜩 새겨진 주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유영을 보자 얼굴빛이 어두어졌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는 털어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재가 옷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정신이 든 듯 담배를 끄고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안내해 드리죠." 주인은 그녀를 식칼이 진열된 곳으로 안내해 준 후, 아주 친절하게도 여러 종류의 식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가씨가 쓰시려면 이런 게 좋겠네. 가볍고..." 유영은 건성으로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시선을 돌리다가 옆쪽 진열장 안에서 서훈이 어제 자물쇠를 자르던 칼을 발견했다. 묵직한 칼날은 이미 날이 서 있었고, 차가운 조명 아래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열장 안의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이걸로 주세요." 주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뼈 자르는 칼인데? 뼈는 사실 때 가게 주인한테 바로 잘라 달라고 하세요. 직접 자르다가 손 다쳐요." 유영은 그의 말에 살짝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주인은 생김새는 무서워 보였지만, 그녀가 창원에 온 이래에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다. "제가 쓰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줄 거예요." '뼈 자르는 거였구나. 난 또 식칼인 줄 알았네.' 주인은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그가 진열장을 열고 칼을 꺼내는 순간, 슈퍼마켓 입구에서 전동 자전거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은 칼을 들고 유영을 데리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서훈아? 이렇게 빨리 돌아왔네? 잘됐다. 이 아가씨 계산 좀 해 줘!" 건장한 체격의 주인이 유영의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녀는 계산대에서 나는 소리만 들릴 뿐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삐- 바코드를 찍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약간 차가운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6만 5000원입니다." 유영은 주인 뒤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임서훈은 그녀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보통 손님 응대하듯 물을 뿐이었다. "카드로 결제하시겠어요, 현금 주시겠어요?" 유영은 그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우산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페이로 할게요"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결제 동안, 주인은 칼을 포장해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유영과 서훈이 동시에 손을 뻗어 봉투를 잡았다. 주인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서훈아, 너 뭐 하는 거야?" 임서훈은 유영보다 키가 훨씬 컸다. 그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주세요." 유영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서 봉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산 돌려주면 칼 줄게." 서훈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그녀를 훑어보았다. 어제는 길을 알려 달라고 할 때만 해도 조심스럽게 비위를 맞추는 듯 하더니, 오늘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꼴이었다. 사람은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손을 놓으며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 "좋아요." 유영은 봉투를 홱 낚아채며 말했다. "우산 꼭 돌려줘." '내 우산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저런 표정을 짓다니!' '두고 봐. 어떻게 돌려주나.' 칼이 든 봉투를 들고 그녀가 성큼성큼 가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주인은 그런 유영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훈아, 저 아가씨, 네 생각에 좀 닮지 않았냐? 윤 선생님." 몇 초 후에야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 아가씨, 224번지에 살아요." … … 유영은 집 앞에 다다랐을 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모르는 번호였고, 천주현 지역 번호였다. "여보세요?" "혹시 강유영 학생 되나요? 저는 유현고등학교 3학년 1반 담임 차민정입니다."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다름이 아니라 저희 학교는 고3은 조금 일찍 개학을 해서, 내일 아침까지 학교로 등교해서 등록을 해야 한다고 알려드리려고 전화 했어요." "네,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통화가 끝나자 유영은 선생님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녀는 이곳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 다시 집을 나섰다. 학용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길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의식적으로 준상 마트를 피해 갔다 . 노을 진 거리에 소녀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었다. 마트 주인은 무심코 밖을 내다보다가 맞은편 길을 걷고 있는 유영을 발견했다. "아가씨, 어디 가요?" 유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서 말했다. "뭐 좀 사려고요." 그녀는 말하면서 안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주인은 그녀의 속내를 알아챈 듯 피식 웃었다. "서훈이 지금 없어요." 유영은 "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없다니 잘됐네.'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멀리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유영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학용품을 고르는 동안, 주인은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말투가 이 동네 사람 같지 않은데, 어디에서 왔어요?" "서울이요." "수도에서 왔네요." "네." "그럼 여기 생활은 좀 적응됐어요?" "살다 보면 적응되겠죠." 지금은 아직 적응이 안 됐다는 뜻이었다. 주인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 내 이름 대도 되고." 유영은 고른 학용품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주인이 바코드를 찍으면서 간판을 가리켰다. "준상, 내 이름이야, 성은 박이고. 박준상라고 합니다." 주인은 학용품 몇 개의 바코드를 찍더니 나머지 학용품을 한꺼번에 봉투에 담았다. "같은 동네 사람끼리 이런 거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유영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혹시 우리 엄마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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