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서훈은 칼등으로 문고리를 두 번이나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문고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 꼼짝하지 않았다. 아까보다 힘이 더 세졌고, 소리도 더욱 크게 울렸다. 강유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쾅!
마침내 문고리가 부서졌다.
그의 식칼도 날이 나가 버렸다.
주현
유영은 조심스럽고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 식칼 값이 얼마인지 알려주세요. 제가 드릴게요."
아까보다 훨씬 예의 바른 태도였다.
서훈은 고개를 약간 돌려 그녀를 훑어보았다. 소녀는 눈을 자주 깜빡였고, 자연스럽게 말린 속눈썹은 놀란 듯 쉴 새 없이 떨렸다. 두려워하는 건가? 일부러 날이 나간 식칼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세게 던져 넣었다.
쾅!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유영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소녀의 하얗고 예쁜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을 눈치챈 임서훈은 장난이 성공한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 길 건너편 슈퍼마켓에서 샀어."
새 식칼을 사서 갚으라는 뜻이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황각 빌라의 더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유영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역시 황각로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마주치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유영은 그가 아까 문고리를 부수던 무서운 기세를 떠올리며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우산을 펴 들고 그를 따라갔다.
"잠깐만요!"
서훈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또 무슨..."
"이거요!"
유영은 서훈의 손에 우산을 억지로 쥐어 주고는 양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허둥지둥 달려갔다. 유영이 아까 우산을 건네줄 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손에 사무쳤다. 촉감이 너무나 좋았고,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임서훈은 반 박자 늦게 뒤돌아섰고, 마침 유영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유영은 마당으로 들어가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밖을 내다보았을 때는 이미 서훈이 자신이 준 우산을 쓰고 이미 멀리 가 버린 후였다.
듣자 하니,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게 먼저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가 다음에 그녀를 만나면, 그녀에게 좀 더 잘해주지 않을까?
……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서훈이 집 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감돌았다. 주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우산에 묻은 빗물을 털어낸 후, 조심스럽게 접어 문 옆에 걸어두며 시간을 내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던 그는 다시 돌아와 우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따가 주현이 돌아오면 아마 난리를 칠 거야.
그 아가씨는 마음씨가 착하지만 성격이 까다로워서, 실수로 그녀의 우산을 망가뜨렸다고 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서훈은 우산을 자신의 방에 가져다 놓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12시 정각.
주현이 돌아왔다.
온몸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문을 열면서 투덜거렸다.
그녀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전등 스위치를 눌렀고, 고개를 들자마자 서훈의 음침한 얼굴과 마주쳤다.
주현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미선 언니가 네가 도망쳤다고 전화했는데, 어디서 어떻게 널 찾아서 혼내 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감히 돌아와?!"
주현은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임서훈이 어려서부터 수없이 본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른 점이 있다면 서훈은 차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시선을 내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옆에 있던 과도를 집어 들더니 앞에 있던 나무 탁자에 세게 꽂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훈이 손을 놓자 과도의 긴 칼날이 탁자 상판에 완전히 박혔다.
"꺄악!"
주현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고, 그가 음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앞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너 미쳤어? 밖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게 습관이 돼서 집에서도 그러고 싶은 거야? 내가 네 엄마야!"
그의 어머니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보았지만 보잘 것 없는 허세에 불과했다. 임서훈은 뜻밖에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존속 살해 후 시체 유기 사건에 대한 사회 뉴스를 봤어."
주현의 눈동자가 갑자기 줄어들었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츠려들었고, 그는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대충 흘겨 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쾅!
서훈의 방문이 닫혔다.
주현은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이 풀린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
유영은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래된 집이라 방음이 잘 안 돼서 근처 이웃집에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모두 다 들렸다. 맞은편 집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때리면서 "잘못했어, 안 했어?"라고 다그치는 소리, 왼쪽 집에서는 설거지하는 소리, 오른쪽 집에서는 고기를 다지는 "쿵쿵쿵" 하는 소리. 그 다양한 소리들은 유영을 침대에서 일어나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그녀는 어제 멀리 서울에서 창원까지 오느라 하루 종일 고생했고,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들어서 아직 집을 제대로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집은 매우 낡았고, 장식은 단순하고 깔끔했으며, 곳곳에 이전에 살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제법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길을 걸으면서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젯밤에 휴대폰 충전기를 꽂아놓고 전원을 켜는 것을 잊어버렸더니, 휴대폰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대부분 민서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녀는 아래로 스크롤을 내려보니, 외삼촌,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냥저냥 연락하는 친구들, 그리고... 강찬영?
모든 부재중 전화 목록을 확인했지만, 강태수 그 늙은이의 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첫사랑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으니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유영는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마친 후, 귀를 막고 민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서는 전화를 받자마자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영아, 너 드디어 전화받았구나. 어젯밤 내내 연락이 안 돼서, 나는 또 너 유괴범한테 납치돼서 산골짜기에 팔려 간 줄 알았어 엉엉엉엉..."
민서가 너무 크고 처절하게 울어서 유영은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감정이 조금 진정되자 유영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꺼졌어."
"아."
민서는 계속 훌쩍이며 말했다.
"네가 간 후에, 네 아빠랑 그 여자랑 결혼식 진짜로 취소됐어."
강유영는 비웃으며 말했다.
"강태수 그 늙은이 체면 차리는 거 좋아하는데, 아내가 죽자마자 딸을 내쫓고 첫사랑이랑 결혼한다는 몹쓸 소문은 감당 못 하시겠지, 뭐."
민서는 안쓰럽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영아, 너 언제 돌아올 거야?"
"수능 볼 때쯤 돌아올게."
"뭐? 그럼 아직 1년이나 남았잖아?"
그 말에 민서가 또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너랑 이렇게 오래 헤어져 있기 싫은데 엉엉엉..."
유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시간 날 때마다 보러 갈게. 누가 너 괴롭히면 네 아빠 비서한테 말하고, 이름 다 적어 놔. 내가 돌아가서 하나하나 다 잡아서 완전 혼내줄게."
겨우 민서를 달래고 전화를 끊자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가 어디지?
마침 맞은편에서 중년 여성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요, 혹시..."
유영은 길을 물으려고 했지만, 중년 여성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 마냥 유영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