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배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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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배수구 물속에 잠긴 시커먼 성의 몸체가 다가왔다. 물 밖으로 드러난 코코아빛 성은 잠긴 부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성의 아랫부분은 루앙의 밑바닥까지 닿을 듯, 물속 저 깊은 곳까지 뻗어 있었다. 물속에 잠긴 성의 바깥벽에서 바퀴살처럼 뻗어 나가는 아주 두꺼운 유리관들이 보였다. “저 유리관들은 뭐지?” “루앙의 바깥, 깊은 해저의 바닷물과 연결된 관들 같은데. 중앙수직관 바닥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걸 거야. 중앙수직관에서 시작된 미지의 힘이 바퀴살처럼 뻗은 저 유리관을 따라 퍼져나가는 것 같아.” “그 힘이 해저에 얼음 산맥을 만들며 뻗어가 먼 해안의 바닷물까지 얼리고, 인간의 해안에 얼음 도시를 솟아오르게 할 거야.” 루미와 북친이 물속에 잠긴 성벽으로 바짝 다가갔을 때였다. 잠긴 성벽 가까이서 무언가 느릿느릿 왔다갔다 했다. “저것들은 뭐지? 큰머리고래 같은데?” 당황한 루미가 물었다. “큰머리고래가 아냐! 물속을 지키는 잠꾸니들이야!” “뭐? 저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잠꾸니들이 있을 리 없어!” 루미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철퇴를 쥔 어마어마하게 큰 잠꾸니들이 확실했다. “식물인간들의 잠꾸니들이지. 식물인간은 자리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오랜 잠을 자. 그들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꿈마저 꾸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야. 사실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아주 많은 꿈을 꾼대. 그래서 그들의 잠꿈나무도 아주 크게 자라지. 루앙의 가장 큰 잠꿈나무는 싱가포르라는 도시의 한 병원에서 50년 동안이나 잠을 자고 있는 한 식물인간의 꿈을 빨아들이고 있지. 그 잠꿈나무는 보통 잠꿈나무보다 수백 배나 많은 꿈방울을 끌어올릴 수 있어. 식물인간의 잠꾸니들은 거대 잠꿈나무에 게으른 나무늘보처럼 달라붙어 많은 양의 꿈방울을 먹어대기 때문에 저렇게 커다란 잠꾸니로 변한 거야.” “하지만 덩치만 컸지 순하고 얌전해 보이는데?” “그래서 저들은 쉽게 드까오르의 공작의 꾐에 넘어갔을 거야. 공작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zZ1으로 유혹해 이곳을 지키게 했겠지.” “느리고 둔해 보이니까 감쪽같이 배수구로 다가가자고.” “저게 남쪽 배수구인가 봐.” 둘은 성벽에 뚫린 작은 직사각형 모양의 입구로 다가갔다. 벽 앞에서 천천히 왔다갔다 하던 식물인간의 잠꾸니들이 낌새를 알아차린 듯했다. 루미와 북친을 발견한 식물인간의 잠꾸니들이 입을 헤, 벌리고 다가왔다. 어느 새 그들은 둘을 에워싸고 철퇴를 시계추처럼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를 따라 와!” 북친이 밑으로 헤엄치며 외쳤다. 둘은 거대 잠꾸니들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 배수구를 향해 헤엄쳤다. 창살이 터진 배수구 안으로 막 숨어들자 쿵! 쿵! 벽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식물인간의 잠꾸니들이 루미와 북친을 향해 휘두른 철퇴가 빗맞아 성벽을 때리고 있었다. 배수구로 쫓아온 거대 잠꾸니들이 창살을 뜯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는 너무 컸고, 배수구는 꾸니 한 명이 겨우 들락거릴 수 있을 만큼 좁았다. 더 이상 쫓을 수 없어 화가 난 식물인간의 잠꾸니들이 아예 배수구를 부수려는 듯 마구 철퇴를 가했다. 배수구의 가장자리 벽돌이 부서져 내렸다. 넓어진 배수구 안으로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빨리 도망 가! 손을 디밀어 우릴 붙잡으려고 해!” 둘은 배수구 안쪽으로 빠르게 헤엄쳐 들어갔다. 곧게 뻗어 있던 배수구가 왼쪽으로 꺾였다. 계속 헤엄쳐가자 다시 오른쪽으로 꺾였다. 위로 비탈진 배수구가 이어졌다. 물이 그곳까지 들어차 있어 헤엄을 쳐서 올라갈 수 있었다. 비탈진 배수구 중간쯤에서 수면이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루앙의 해수면과 높이가 같은 지점인가 봐.” 둘은 코코아빛 벽돌로 만들어진 성벽의 배수구를 기어올랐다. 벽돌에 달라붙은 이끼들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웠다. 발을 헛디딘 북친이 미끄러졌다. 뒤에서 따라가던 루미까지 미끄러져 물이 차오른 조금 전의 위치까지 떨어졌다. “이런 걸 인간들은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하지. 제대로 좀 올라가.” 루미가 북친을 나무랐다. 둘은 미끄러지지 않게 벽돌 틈새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조심스레 발을 디디며 올라갔다. 경사진 배수구를 올라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슨 냄새지? 크킁. 네게서 나는 것 같은데?” “난 매일 목욕탕에 자라는 물수세미로 목욕을 하잖아. 비누나무 열매를 따 몸에 바르고 물수세미로 헤엄쳐 가 등과 배, 구석구석 문지른다고. 이건 인간 세계의 음식이 썩는 듯한 냄새야. 또는 하수구 냄새랄까.” “루앙에선 이런 냄새가 날 리 없는데. 초공간(4차원 이상의 차원이 높은 공간)을 통해 인간 세계로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 “루앙 내부엔 잠꿈나무 뿌리가 지나는 길 말고 4차원 이상의 초공간은 없어. 우리가 지나왔던 배수구는 갈라지거나 열려 있어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잖아. 너도 인정하지?” “물론. 단 하나의 선으로만 이루어진 1차원적 공간으로만 왔지. 개미가 파이프 속을 기어가듯 말이야.”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선택할 길이란 없어. 갈래 길이 나올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계속 올라가야지 뭐.” 둘은 어둡고 긴 배수구를 계속 올라갔다. 후- 후― 후- 후― 성의 안쪽으로 다가갈수록 크고 깊은 숨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이건 무슨 소리지?” 앞서 가던 북친이 길을 멈추고 물었다. “글쎄.” 루미도 멈추고 의문의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득한 저 밑에서 깊고 고요한 숨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성의 지하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거대한 짐승의 숨소리가 아닐까?” “가만. 사람의 숨소리 같아.” “루앙에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하긴 그래.” “어마어마한 짐승이 성의 지하에서 잠자고 있는가 봐. 비앙키는 왜 그러한 위험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고. 비앙키를 탓하지 마.” 둘은 다시 길을 재촉하며 올라갔다. 그러자 의문의 숨소리도 멀어졌다. 저 위에 트인 곳이 나타났다. 트인 곳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트인 곳으로부터 물이 쏟아져 내려왔다. “으아악!” “벽을 꼭 붙잡아!” 둘은 다리와 손바닥을 벽에 찰싹 밀어붙이고 버텼다. 한참이 지나자 물이 쏟아지는 것을 멈췄다. “그런데 네 얼굴에 그게 뭐야?” 북친은 너덜너덜해진 고기조각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고기조각에는 한 움큼 젖은 털이 붙어 있었다. “이게 뭐지? 처음 보는 건데?” “고양이라는 짐승의 가죽이야. 인간 세상에서 봤어. 날 잡아먹으려고 기웃거렸던 야비한 족속이야. 털에는 더러운 벌레와 병균이 득시글대지.” “으아!” 북친은 얼굴을 뒤덮은 고양이 가죽을 내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루미를 바라보았다. “히히. 너도 장난이 아닌데?” 루미는 양배춧잎 조각과 당근, 양파 찌꺼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으아!” 음식찌꺼기를 발견한 루미는 그것들을 얼굴에서 떼어내 던져 버렸다. “누군가 고양이 스튜를 끓여 먹고 버린 것일까?” “모르겠어. 빨리 이곳을 지나가! 냄새가 역겨워서 머리가 돌겠어!” 둘은 트인 곳으로 나갔다. 직사각형 배수구가 끝나고 네 절벽이 마주선 것 같은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높은 벽들로 둘러싸인 방의 내부였다. 방금 지나온 것과 똑같은 배수구 구멍이 건너편과 천장,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 벽에 뚫려 있었다. 저 아래 쪽에서는 방금 쏟아진 오물과 비슷한 것들이 부글부글 끓으며 썩고 있었다. 조금 전에 뒤집어쓴 오물은 이 방에 쌓인 오물이 넘쳐 흘러내린 것 같았다. “천장과 맞은편 벽,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벽에 각각 배수구가 있어. 네 방향 중 어디로 가야 하지?” 북친이 물었다. 루미는 왼쪽 벽의 배수구 구멍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오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버려진 오물이 내려오는 구멍인가 보았다. 왼쪽 벽에 난 구멍으로 가기는 싫었다. 천장이나 맞은편, 아니면 오른편 구멍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비앙키에게 도움을 청해야 될 때가 왔어. 까르끄르치는 분명 이곳에 와 봤을 테니까 말이야.” 루미는 목에 건 송수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비앙키! 여기는 오물이 그득 쌓인 성의 지하 공간 같아. 여러 배수구 가운데 어디로 가야 하지?” 송수신기에 분홍 불빛이 들어오고 곧 비앙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장 구멍은 해자의 물이 넘칠 때 저절로 물이 빠지는 배수구, 오른쪽 구멍은 짐승들의 분뇨를 처리할 때 사용한 물이 빠져 나오는 배수구, 그리고 왼쪽 구멍은 알 수 없는 음식을 끓이는 주방과 연결돼 있음. 맞은편 구멍은 중앙수직관을 둥글게 감싸는 두 번째 해자와 연결돼 있음.” “어디로 가야 해?” “왼쪽이나 맞은편. 맞은편 배수구로 곧장 가면 두 번째 해자가 나타남. 두 번째 해자를 통과하면 비밀번호 입력 없이 중앙수직관 안으로 침투할 수 있음. 하지만 해자 속에 확인되지 않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미지의 괴물들이 지키고 있음.” “왼쪽 배수구로 가겠다! 이상!” 루미는 수신을 끊었다. “다시 음식 찌꺼기 오물을 뒤집어쓰면 어떻게 하려고?” 북친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물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낫잖아.” “이 방의 냄새가 너무 역겹군. 공기를 들이마셔 공기주머니를 부풀리는 것은 불가능하겠어. 그냥 벽을 타고 왼쪽 배수구로 가자.” 북친이 벽돌들 틈에 손가락을 넣고 왼쪽 배수구로 먼저 움직였다. 루미도 벽돌들 틈에 손가락을 끼워 옆으로 이동했다. 왼쪽 벽의 배수구에 도달한 북친이 배수구 안으로 들어가 루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둘은 곧게 뻗은 컴컴한 배수구를 따라 기었다. 배수구가 갑자기 위쪽을 향해 직각으로 꺾였다. 그러다 다시 곧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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