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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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푹 숙인 서현은 지용의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지용이기 때문에 그 아무것도 담지 않은 것 같은 눈동자를 보면 거짓말이라도 해 달라고 애원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배신감에 마음을 다 지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지용은 고개를 푹 숙인 서현을 바라봤다. 꼭 쥐고 있는 주먹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니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용은 그의 손을 잡아 자연스럽게 끌고 와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그때도 느꼈지만 3년 동안 서현은 조금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서현은 지용의 손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몸에 조금 더 기댈 뿐이었다. “둘 다.” “…….” “걱정되기도 했고, 지켜주고 싶기도 했어.” “거짓말…….” “믿고 싶은 대로 믿어. 어차피 상관없어.” 언제나 지용은 진실을 말했고, 서현은 그런 지용의 진실과 진심을 거짓과 위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 지용은 항상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엔 서현은 믿고 싶은 대로 지용을 판단하고, 그의 말과 행동에 결론을 내렸다. 연인 관계에 있어서 제일 독이 되는 행동이었다. 결국, 지용의 말과 서현의 판단은 서로에게 독이 되었고, 서로를 좀 먹고 있었다. “난 선배가 그렇게 대답하는 게 항상 싫었어.” “그래서 헤어지자고 한 거였어?” “아니……!” 서현이 반박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자, 어느 순간 내려온 지용의 입술이 서현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행동에 서현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서현은 짜증이 났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항상 정신을 쏙 빼놓게 만들기 위해 키스를 하는 지용이 짜증이 나면서도 그 키스를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도 머저리 같았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딥 키스라니, 분명 공연 음란죄로 잡혀 들어갈 것이 분명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키스를 나누고 있는 길거리는 주택가였다. 조용한 골목에서 입술이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만 났다. 한참 이어지던 키스는 서현이 먼저 떨어지고 끝이 났다. “하아…….” “하- 뭐야, 나랑 키스 하고 싶었어?” “주둥이부터 들이민 게 누군데.” “집으로 갈까?” 지용이 눈을 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 뜻을 알아차린 서현은 지용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한 번 더 붙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순순히 서현을 놓아주었다. 두어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서현이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소매로 쓱 닦았다. 지용은 키스의 여운을 느끼고 싶었는지, 제 혀로 입술을 핥았다. 키스 때문에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이 어느 정도 진정 되자 서현이 지용을 빤히 바라봤다. 지용은 어깨를 들썩였다. “CMA랑 관련 있죠?” “응. 근데 키스 한 다음에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저울질 다 끝났어요?” “응. 나 진짜 집으로 안 데리고 가?” “어디로 기울였어요?” “달. 집이랑 서랑 가까운가 봐.” “완전히 기울인 거죠?” “그러니까 여기에 있지.” 서현이 지용의 물음은 철저히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꼬박꼬박 잘 대답해 주던 지용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살짝 억울했다. 나는 물어보면 다 말해 주는데, 너는 왜 내 질문에 대답 안 하니? 지용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문신처럼 착용하던 선글라스를 쓰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서현의 앞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표정이 다 드러났다. “내가 묻는 건 왜 대답 안 해줘?” “오지 말라고 안 했는데.” 서현의 말에 지용은 찌푸렸던 인상을 피고 화색을 하며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모습을 본 서현이 피식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서현에게 질척이던 지용이 그에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제대로 걸었다. “근데 민얼굴로 나랑 돌아다녀도 돼요? 그 녀석들 내 얼굴 다 아는데.” “그럴까 봐 항상 선글라스로 얼굴 가리고 다녔지.” 지용은 씩 웃었다. 키스하던 중간, 그의 눈이 보고 싶어 선글라스가 답답하니 벗으라는 서현의 말에 순순히 선글라스를 집어넣은 이유가 있었다. 그런가. 그냥 그런가보다 싶어 고개를 끄덕인 서현은 묵묵히 걸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현의 취향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에 보였다. 지용은 실례합니다- 하고 조심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데 웬 실례.서현은 문을 닫았다. “선배, 물 좀 올려줘요.” “어?” “라면 끓이게 물 좀 올리라고요. 나 씻을 테니까.” 서현은 지용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혼자 거실에 남겨진 지용은 씻는다는 서현의 말에 괜히 부끄럽지도 않으면서 부끄러운 척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근데 보통 손님이 가만히 있고 집주인이 다 하지 않나? 의도치 않게 뜻과는 반대로 주객전도가 된 상황에 지용은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튼 서현의 부탁(이 아닌 반협박)에 순순히 따라주기로 했다. 휘파람을 휘휘 불며 냄비를 하나 찾은 지용은 서현의 미션을 재빠르게 수행했다. 라면은 서현이 나올 때 끓이면 될 것 같아 제일 약한 불로 설정해 놓은 지용은 서현의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로드에 있을 때 그의 자리도 깔끔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정리해 놓더니, 집도 똑같이 정리해 놓은 것이 보였다. 생김새랑 비슷하게 귀여운 것은 끔찍이도 좋아했고, 이것저것 수집하는 것도 퍽 좋아하던 서현이 생각이 나, 지용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그동안 정신 나간 AG 속에만 있다가 힐링 하는 느낌을 받은 지용은 소파에 풀썩 누워버렸다. 그 사이, 지용이 무슨 일을 할까 재빠르게 씻고 나온 서현은 조용히 누워 있는 지용이 놀라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가슴팍, 자연스럽게 닫힌 눈,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아하니 잠이 든 것 같았다. 주방을 힐끗 보니 용케 냄비도 잘 찾아 물도 올려놨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그의 옆에 주저앉아 자고 있는 지용을 빤히 바라봤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겨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면서 세상 어른인 척은 혼자 다 하고, 비밀처럼 겹겹이 쌓인 마음을 막상 열어보면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용은 애초에 비밀이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솔직했다. 서현은 손을 뻗어 그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관리를 받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매끄러운 피부결이었다. “다 만졌어?” “아, 깜짝이야! 일어났으면 기색 좀 비쳐요!” 한참 그의 볼에 손을 대고 있는데 지용이 돌연 몸을 돌려 서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괜히 민망한 서현은 뻗었던 팔을 거두고 바닥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지용이 물을 올려놓은 것이 생각이 나,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지용은 여전히 누워서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찬장에서 라면 봉지를 꺼낸 서현은 몸을 돌려 지용을 바라봤다. “계란은?” “치즈.” “입 맛 바뀌었어요? 먹지도 않던 치즈를 다 넣어 달래.” “누가 죽어라 치즈만 넣어 먹어서.” 지용의 발언에 서현이 살짝 멈칫 했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 움찔거림을 포착한 지용은 씩 웃었다. 아하, 이게 약점이군. 놀리는 맛이 있는 서현의 약점을 찾아내버린 지용은 장난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서현에게 다가갔다. 서현은 그가 다가오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고 냉장고에서 슬라이스 치즈를 찾았다. 지용은 식탁 의자에 앉아 뒷모습만 보여주는 서현의 뒷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오롯이 받고 있던 서현은 진땀이 나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계란 넣어 먹는 거 싫다고 하-도 난리를 피워서, 어른인 내가 입맛을 좀 바꿔봤지.” “계란 넣어 먹는 거 싫다던 그 사람 입맛도 바꼈다고 전해달라는데요.” “이제 치즈 싫대?” “아니, 그건 아니고. 계란도 넣어 먹을 수 있대요.” 맛있게 라면을 끓인 서현은 식탁 위에 냄비를 올려놓기 전, 주변에 있는 책 하나를 받침대로 만들었다. “그 책-” “아아- 라면 불어요!” 냄비 받침으로 전락된 그 책은 4년 전, 지용이 서현에게 추천한 책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읽어보라는 지용의 적극적인 추천에 어쩔 수 없이 구입 해 두었지만 얼마 읽지도 못하고 냄비 받침으로 전락해버렸다. 두 사람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라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서현이 라면을 끓일 때 마다 항상 맛이 없다며 투덜대던 지용이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앙 입에 물었다. 옛날 옛적 유명한 독설가 셰프 앞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현은 괜히 긴장이 되었다. 3년이나 흐르는 동안 지겹도록 먹던 라면인데 실력이 조금이라도 늘지 않았을까,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서현의 그 시선을 느낀건지, 지용은 고개를 들어 서현을 바라봤다. 서현의 앞접시는 아직 비어 있는 상태였다. 지용은 피식 웃고 서현의 앞접시에 라면을 덜어줬다. “너도 먹어.” “……네.” 아무런 코멘트가 없어서 다행인건지, 서현은 라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용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차라리 물어봤을 때 대답 해 주긴 쉬운데, 먼저 얘기를 시작하려니 영 어렵기 그지없었다. 설거지까지 다 마치고 두 사람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물론, 지용은 서현의 다리에 제 머리를 올려놨다. 처음 서현은 무겁다고 싫다고 했지만 지용이 아까 맞은 명치가 아직 아픈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허벅지 위에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 서현이 무심하게 지용을 내려다봤다. “퀸.” “네, 킹.” “왜 내가 퀸로 지어준 것 같아?” 왜긴 왜야, 니꺼에서 빛난다고 자랑하려고 그랬겠지. 라는 말은 고이 접어 두고 서현은 모르는 척 했다. “왜요?” “너는 누가 봐도 딱 내거였거든.” “내가 물건이에요, 내거 거리게?” “그래서 퀸로 지었는데, 지금은 그냥 퀸야. 내거라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퀸이야.” 그래서 결국엔 내 칭찬을 하고 싶다는 거죠? 서현이 물었지만 지용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현은 그런 지용에게 심통이 났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지용의 머리는 바닥에 닿지 않았다. 뛰어난 반사 신경 덕분에 오히려 서현을 놀리듯 히히 웃어 보이니 서현은 짜증난다는 듯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냉장고로 향했다. 한참 냉장고 앞에서 무언갈 하더니 서현이 트레이에 술거리들을 잔뜩 들고 왔다. “퀸과 함께 하는 밤에 술이 빠질 수 없죠.” “흐응, 다 마실 수 있어?” “그럼요. 그 때의 퀸이 아닙니다.” 지용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질겅질겅 씹더니 바닥에 퉤 뱉어버린다. 지용의 몰상식한 행동에 등짝을 내려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마음먹은 서현이 지용의 앞에 털썩 앉았다. 트레이 위엔 먹기 좋은 크기로 썰려 있는 과일들과 치즈, 작은 쿠키들이 있었고 고급진 안주와 다르게 술은 소주가 전부였다. 서현의 난해한 센스가 이해가 가지 않은 지용은 어색하게 웃으며 과일을 집어 먹었다. 오물거리며 과일을 먹은 지용은 서현이 건넨 술잔을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AG에서 매일 같이 마시던 보드카와 다르게 순한 맛을 유지하는 소주가 귀여울 정도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망할 보드카. 서현은 오랜만의 술이라 그런지 목으로 넘어가는 알코올 향이 쓰기만 했다. 크흐- 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쿠키를 집어 먹었다.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 본 지용이 씩 웃었다. “너는 꼭 나랑 자기 전에 술 마시더라.” “켁- 뭐, 뭐요?” “나랑, 자기, 전에. 술 마신다고.” 자? 쿨쿨? 정확히 지용이 어떤 것을 얘기 하는지 유추하고 있던 서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가기 시작했다. 지용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서현의 술잔에 술을 채워 넣으며 손짓 했다. 어서 마셔, 그래야 나랑 잘 수 있어. 서현은 지용의 지극히 이중적인 말에 그를 흘기면서도 술잔은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근데 왜 하필 AG로 온거예요?” “살면서 한 번 쯤은 해 보고 싶었어.” “마약 브로커를?” “응.” “……그렇다고 진짜 마약 한 건 아니죠?” 지용이 대답을 피하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저 새끼, 진짜 돌았나봐. 서현이 미쳤어, 미쳤어 외치며 지용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제법 따가운 그의 손길을 피하며 팔뚝을 문지른 지용은 진짜 하지 않았다고 소리쳤지만, 이미 조금 취한 서현의 귀에 그의 변명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일방적인 난투극을 벌인 서현은 결국 지용이 입에 넣어주는 과일을 먹고 조금 진정되었다. 그래도 속은 살짝 끓고 있는지 연신 더운 숨을 후후 내뱉었다. “안 했어. 내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러면서 나 속였잖아요.” “속인 적 없어.” “그게 속인거지, 아니면 뭐야.” 지용은 서현의 눈을 올곧게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그 시선을 피했을 서현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턱을 추켜세우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지용도 눈동자가 어두운 편에 속했지만 칠흙 같이 어두우면서도 은하수 같이 반짝거리는 그의 눈은 항상 지용을 홀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마음을 고친 것 일수도 있다. 지용이 피식 웃으며 먼저 눈을 내리 깔자, 서현이 처음으로 눈싸움에서 이겼다며 기분 좋다는 듯이 한잔 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으- 오랜만이라 그런지 달다, 달아!” “이제 그만 마셔.” “아아 왜요! 나 이제 곧 혼자 일 해야 된단 말이야아아!” “파트너는 어디 가고?” “윈드가- 파트너 휴가 가면 나머지는 나와서- 일 하랬어요오.” 서현은 억울한 듯이 땅을 탁탁 내려쳤다. 지용은 그 모습이 웃긴지 킬킬 대며 서현의 입에 착실하게 과일이나 과자를 넣어주고 있었다. 중간에 서현의 입이 가득 차서 퉤 뱉어버렸지만. 술에 취한 서현이 고개를 숙이고 한참 웅얼대더니 돌연 고개를 번쩍 들고 이제 막 술을 입에 넣은 지용에게 다가갔다. “왜?” “나랑 자요.” 지용은 생각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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