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는 디베라가 시설로 들어가기 전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반 이상은 서현에게 모든 것을 바쳐댔다. 중간중간 경위서를 대신 작성해 주거나, 그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마카롱을 사서 바친다거나. 그럴 때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다 받아들인 서현이었지만, 의가 디베라의 ‘디’라는 말만 꺼내면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지금 길거리를 혼자 걷고 있는 서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끈질긴지, 끈끈이 상이라도 있으면 제 파트너에게 기꺼이 주고 싶었다. 의와 디베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서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사과만 하고 갈 길을 가려는데, 서현이 오른쪽으로 비키면 그 사람도 오른쪽으로 마주 섰고, 왼쪽으로 비키면 왼쪽으로 서현을 막아섰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된 알 수 없는 행동에 화가 난 서현이 고개를 팍 들었다.
"안녕, 달링."
"……그놈의 달링 소리."
"사과 한 번으로 퉁 칠 거야? 나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아."
부러지긴 개뿔이 부러져. 이번 기회에 내가 진짜 하나 부러 뜨러 줘야 할까.
삐딱한 시선으로 지용을 올려다보는데, 지용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서현의 옆에 나란히 서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가자, 애기야!"
"악! 진짜!!“
서현이 이렇다 반응할 사이도 없이 지용은 그를 잡고 우악스럽게 끌고 갔다.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지용의 힘은 이길 수 없었던 서현이 울며 겨자 먹기로 지용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다던 지용이 서현을 끌고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었다.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신기하게도 웨이팅은 없었다. 지용을 알아본 웨이트리스가 환하게 웃으며 제일 안쪽으로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서현은 예쁘게도 웃는 웨이트리스를 보고 입을 삐쭉거렸다. 그 모습을 본 지용이 피식 웃었다.
"질투해?"
"갈비뼈 부러진 것 같다면서, 여기가 병원이에요?"
"이 집, 오스티에서 유명한 맛집이야."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테이블 세팅을 무시하고 노려봤다. 물론 서현은 지용을 노려봤지만, 지용은 꽃받침까지 한 채로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있던 방의 문이 닫히자 지용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지용의 눈동자와 까맣게 반짝이는 서현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했다. 서현은 지용의 눈동자를 보면서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담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으니.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이라고 넘기며 서현이 무심하게 물었다.
"근데 여긴 왜 데리고 왔는데요?"
"식당에 왜 와. 밥 먹으러 왔지."
"그니까, 왜 나랑 왔냐고요."
"그냥 네가 앞에 있어서."
초등학생의 대답 수준을 가진 지용이 답답한 서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음식들을 보고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그 모습을 캐치한 지용이 입을 호선으로 그렸다.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고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지용은 서현이 제일 좋아하는 단호박 수프가 담긴 접시를 앞으로 밀어줬다. 먹어, 입 모양으로 말하니 서현이 숟가락으로 단호박 수프를 한 입 떠먹는다.
"오."
"어때?"
"유명한 맛집 칭호 얻을 만하네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서현이 다른 음식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던 지용도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식사를 시작했다. 꼭 3년 전, 행복하게 하하 호호거리며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이 편안하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물론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밥을 먹을 때만큼은 하하 호호거리며 먹은 것은 아니었다. 서현이 무언가를 먹으려고 하면 지용이 방해를 해서 서현이 소리를 지른다거나, 서현이 물을 좀 달라고 하면 굳이 굳이 지용이 그 물을 혼자 다 마신다거나 하는 매우, 매우 유치한 짓을 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나쁘지 않은 식사였다.
"꺄악-! 도둑이야!"
식사를 마치고 나온 그때, 길거리에서 소리치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 서현이 재빠르게 반응하고 도망치는 사람을 쫓아갔다. 지용은 갑자기 사라진 서현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곧 웃음을 지었다. 밥 먹고 바로 뛰면 배 아플 텐데.
지용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여유롭게 서현을 뒤따라갔다. 소매치기는 얼마 가지 못해 서현에게 붙잡혔고, 곧 신고로 출동한 경찰 두 명이 서현으로부터 그 사람을 인계받았다.
"고생해."
"감사합니다."
두 경찰은 서현에게 경례하고 소매치기를 끌고 차로 향했다. 지용은 서현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서현은 지용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올려 지용을 바라봤다.
"쟤들 참 어리다, 그렇지?"
"우리도 아직 어리거든요."
"너도 정-말 어렸지. 아무것도 없이 왔는데, 제일 많이 갖게 됐잖아."
"……뭘 말 하고 싶은 건데요?"
"왜 고민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
지용의 알쏭달쏭한 말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찡그린 인상을 손으로 꾹꾹 눌러 펴 주었다. 찌푸린 인상이 펴지고 무표정으로 돌아가자 이번엔 그의 입꼬리를 잡아 위로 올린다.
"뭐해요!"
"웃어, 퀸."
"……."
"하여튼 잘 웃으면서 나한테만 야박해. 나 이제 갈게."
지용은 자신에게 잡혀 빨갛게 된 서현의 볼을 살짝 어루만지고 금세 또 사라져버린다. 서현은 사라지는 지용을 보고 서로 몸을 돌렸다. 도대체 어떤 입 싼 놈이 저 사람에게 다 말했는지, 걸리면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버리겠다 다짐 한 서현의 발걸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서 내에 있는 보호실로 들어가자 디베라는 의와 함께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의는 서현의 등장에 벌떡 일어나 서현의 앞으로 떡볶이를 대령했고, 방금 밥을 먹고 온 서현은 의의 호의를 거절하고 디베라의 앞에 털썩 앉았다. 입안 가득 떡볶이를 담아 우물거리고 있던 디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현을 바라봤다.
"꼬맹아."
"……에?"
"대답은 고개로 해. 너 경찰 하고 싶냐?"
"퀸!!!"
디베라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의가 했다. 서현은 그런 의를 신경도 쓰지 않고 디베라를 바라봤다. 디베라는 연녹색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서현은 피식 웃으면서 디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서현의 발걸음에 의는 디베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현을 따라 보호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퀸, 진짜? 정말이야?"
"대신 보호자는 너."
"당연하지!! 진짜 고마워!!!!"
"악!! 이거 놔!!!"
의는 서현을 꽉 끌어안았다. 의의 품이 불편한 서현은 그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써야만 했고, 결국 서현이 의의 팔뚝을 깨물고 나서야 의의 팔이 풀렸다.
*
사건번호, 7021-7
몇 달 전, 오스티 A 구역 경찰서로 신고 전화가 왔다. 역 근처에 수상한 가방이 놓여 있다는 신고에 여러 번 출동 했지만, 도착했을 때는 근처에 가방도, 신고자도 없었다. 같은 신고가 여러 번 들어온 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수사 1팀에 소속되어 있는 니콜과 므라즌이 수사를 하다가 난데없는 밀가루 테러를 당하고 돌아왔다.
밀가루 테러를 시작으로 물에 푼 밀가루, 계란과 우유를 섞은 밀가루, 나중에는 생크림이 발린 케이크로도 까지 테러를 당했다. 귀여우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고, 웃기면서도 짜증이 나는 이 테러는 점점 수위가 높아지더니 결국 염산까지 사용이 되었다.
다행히도 염산이 쏟아지기 전 위험 증상을 느낀 니콜이 자리를 피했지만,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반절 이상이 녹아내렸다. 염산 테러에 두려움을 느낀 니콜이 정신과에 상담을 받으러 가면서 휴가를 냈고, 자연스럽게 수사 1팀에서 강력팀으로 수사권이 양도되었다.
니가 해라, 너나 해라 서로 일거리를 미뤄주는 사랑 많은 강력팀은 결국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기로 했고, 각 팀의 팀장들이 나서서 전투를 벌였다. 강력팀 팀장 중 커피를 끝내주게 잘 내리고 제일 능력이 좋은 세진은 보기 좋게 꼴지를 했고, 그 덕분에 퀸(서현, 여, 27세)과 티스(의, 남, 27세)는 세진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당신이 출동 안 한다고 아무렇게나 한 거지? 억울한 세진은 한사코 아니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범인을 잡으라는 거야!”
의는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고, 서현은 어떻게 하면 우리 대신 세진을 내 보낼 수 있을까 궁리 했다. 하지만 그딴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처음부터 수사 하자는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은 신고 전화를 뒤지기로 했다. 신고 접수를 받는 접수국으로 향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10초 만에 내쫓겼다. 짜증…….
“그래도 우리 나름 오스티 A 구역 에이스인데 이런 취급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인정한다. 그렇다면 높은 사람을 치면 뭔가가 나오겠지.”
“헉, 서장님한테 가게?”
“미쳤냐? 나도 눈치는 있어. 그 사람보다 낮은 사람한테 가면 돼.”
“그것도 충분히 미친 것 같은데.”
서현의 당당한 말에 의는 몸을 떨었다. 오스티 A구역 경찰서 내에서 제일 무섭다고 소문 난 본부장에게 가자는 서현의 말은 의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기 아주 충분했다. 이 새끼가 저번에 잠복근무를 했더니 드디어 미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잠복 때문이 아니라면 틈 날 때마다 봐 주고 있는 디베라 때문인가? 서현은 의의 걱정스러운 생각 따위는 고이 접어 날려버리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의가 서현을 따라 갔지만 영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는지 손톱을 깨물었다. 정신 사나운 그의 모습에 서현이 핀잔을 주었지만 두려움에 잠식 된 의는 서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의가 정신을 차려보니 본부장실 안에 있는 아늑한 소파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하하호호 떠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본부장인 제리(???, 남, ???)는 서현과 일면식 정도가 아닌 백면식 정도의 사이였다. 그만큼 서로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 덕분에 의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 왜 왔다고?”
“아 맞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과 이번에 처음 함께 만나게 된 의까지 모두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리가 정신을 차리고 먼저 서현에게 방문 목적을 물어보자, 서현이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이번에 테러 사건 알죠? 그 사건 수사 우리가 하게 됐는데 신고 전화 한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고 해서 접수국에 녹음 된 신고 전화 좀 확인하려고요.”
“아아- 그 사건 너희들이 담당이구나? 위험하다던데, 몸 조심해. 말 안 해도 알아서 사리겠지만.”
“네. 그나저나 제리가 도와 줄 수 있어요? 수사 협조 좀 해달라니까 바쁘다고 쫓아내서요.”
“어렵지 않지.”
어깨를 으쓱인 제리가 테이블 위에 놓인 호출기에 대고 상황을 전달했다. 이제 내려가서 협조해 달라고 하면 해 줄 거야. 제리의 말에 서현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고, 의는 제리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티스, 우리는 당신을 주시하고 있어요.”
“네?”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의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제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스, 빨리 좀 와! 의가 제리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향했다. 퀸 저 녀석은 인사도 없네. 살짝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저 모습 또한 사랑스럽게 느낀 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사 종결 이후에 한 번 쯤은 찾아오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후문에 따르면 서현은 그 뒤로 제리를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행동 때문에 제리는 눈물을 훔쳤다고….
아무튼 두 사람은 제리의 도움 덕분에 수월하게 접수국 내에 저장되어있는 신고를 찾을 수 있었다. 보기 좋게 같은 사건끼리 묶어 놓은 덕에 그동안 접수되었던 전화를 들을 수 있었다. 녹음 된 음성을 가지고 팀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이어폰을 나눠 끼우고 전화 속 대화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으레 모든 신고가 그렇듯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이나 성별을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서현은 이어폰을 빼냈다. 의는 끝까지 녹음본을 붙들고 있다가 곧 질렸는지 재생을 멈추고 이어폰을 빼냈다.
“목소리 완전 이상해.”
“그치?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안가고, 몇 살인지 가늠도 안 돼.”
“식스 센스 발휘 안 돼?”
“그분이 언제 찾아오시는지 나도 몰라. 근데 지금은 전혀 모르겠다.”
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꼭 감았다. 서현은 녹음본을 돌려주고 온다며 혼자 접수국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내내 왜 티스는 안 보이냐는 질문만 받은 서현은 귀찮아서 버리고 왔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대답에 사람들은 드디어 버림받는구나, 하며 의를 동정했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서현을 위쪽으로 했다. 장난스러운 그들의 행동에 서현도 웃음으로 받아쳤다.
접수국으로 향하니 여전히 바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녹음 된 내역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냥 나가려다가 들어오기 쉽지 않은 그 방(사실 누구나 출입할 수 있다)에 호기심이 생긴 서현이 다른 구역을 둘러보다가 X 표시가 되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다른 곳과 달리 왠지 모르게 뒤죽박죽으로 정리된 녹음 파일에 궁금증이 생긴 서현이 하나의 파일을 집어 재생을 시켰다. 파일에선 치직 거리는 잡음이 나더니 곧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우리가 …….]
[활동명……, 아니-]
[C…… 팀으로 들어갔……]
“뭐라는 거야.”
서현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녹음 파일을 내려놓고 옆에 있는 다른 파일을 들어 재생시켰다.
[오스티 E 구역은 문제없습니다. 완전히 장악했어요.]
[고생 많았어요. 이후 동향은?]
[오스티 A 구역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있는 듯합니다. 파악은 어렵고요.]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오스티 A 구역이면 서현이 있는 구역이었다. 로드 다름으로 큰 도시로 살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혹시 이거 테러 집단 아닌가 생각이 든 서현은 그 파일을 내려놓고 다른 파일을 집어 들고 재생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