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찾았습……다.]
[알아- 누구…… 어!?]
[퀸]
녹음된 파일의 재생이 끊기자마자 녹음실의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깜짝 놀란 서현이 재빠르게 파일을 집어넣고 다른 파일이 있는 열로 몸을 옮겼다. 접수국 사람이 그런 서현을 바라보다가 다른 열로 자리를 옮겼다. 서현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분명히 녹음 파일에서 퀸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 파일의 정체가 뭐길래 이렇게 대 놓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현은 조사하던 사건 파일을 다시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복잡했다. 접수국을 빠져나온 서현은 곧바로 강력팀으로 향했다. 세진에게 무언갈 물어보고 싶었지만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무서웠다. 의가 자랑하던 서현의 식스 센스가 지금 발휘되어 서현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녹음본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서현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의문이 스쳤다. 그 의문은 확신이 됐다. 본명을 모르고 활동명으로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CMA가 확실했다. 게다가 여러 녹음본 안에는 CMA를 의미하는 단어들도 몇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미꾸라지’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눈에 띈 것 같다. 지역을 옮겨야 할까, 하다가 번뜩 떠오른 다른 사람의 얼굴에 서현은 그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
서현과 의는 며칠 내내 녹음 파일을 가지고 끙끙거렸다. 망할 녹음 파일은 확실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차라리 안전장치를 하고 역으로 직접 나가보자는 서현의 말에 의는 녹고 싶지 않으면 여기에서 녹음 파일 먼저 파헤쳐보자고 소리쳤다. 파헤칠 게 있어야 헤쳐보지. 서현은 자리에 털썩 앉아 이제는 다 외워버린 음성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다. 그때, 디베라가 팀 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함께 있는 사이 다른 사람들에게 눈도장도 찍고 예쁨도 많이 받은 디베라는 문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그들에게 가는 동안 계속해서 많은 손길을 견뎌내야 했다. 먹을 것을 쥐여주는 손부터 시작해서 볼을 꼬집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많았다. 디베라가 서현과 의의 앞에 도착했을 때는 달달한 간식들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어, 왔어?”
“오늘은 쉬어. 나 바빠.”
의는 디베라를 안아 들었고, 서현은 디베라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녹음본에 귀를 기울였다. 몸빵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지만, 목소리 한 음절, 한 음절을 놓치지 않았다. 디베라는 서현이 듣고 있는 것이 궁금했는지 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의가 궁금함으로 반짝거리는 디베라의 눈을 바라봤다.
“나도 저거 들어봐도 돼요?”
의는 디베라의 물음에 서현을 슬쩍 보고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고, 제가 끼우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디베라에게 건넸다. 디베라는 서현과 함께 한참을 그 목소리에 집중하다가 재생이 멈추자 그들에게 물었다.
“왜 녹음 된 걸 듣고 있어요?”
“녹음 됐으니까.”
“아니요, 전화 녹음 말고요.”
“무슨 소리야?”
“신고 한 사람, 녹음 된 거잖아요.”
“그래! 이 전화 자체가 녹음이야.”
디베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다른 말이 분명한데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디베라는 서현이 답답했고, 서현은 디베라가 답답했다. 서로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의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디베라, 신고 한 사람이 녹음 된 거라니? 우리 쪽에선 녹음이 된 게 아니야?”
“아니요, 둘 다 녹음인데 신고 한 사람은 원래도 녹음 된 목소리잖아요. 삼촌은 그것도 몰라요?”
“……뭐?”
서현은 경악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번엔 디베라가 들고 있는 이어폰을 가져와 양쪽에 이어폰을 꽂아 넣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기계를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눈까지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곤에 절어 있어서 잘 들리지 않던 미세한 소리까지도 들리기 시작했다. 진작에 이렇게 들을 걸 그랬나. 신고자가 말하기 전 톡, 건드리는 소리. 상담원이 물어봤을 때 뭔가를 쓱쓱 문지르는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와- 이걸 못 듣다니, 얼마나 피곤했으면. 스스로 심심한 위로를 한 서현은 어이가 없었는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의에게 이어폰을 건네줬다. 의도 한참을 진지하게 듣더니 눈이 커졌다. 그리곤 제 무릎에 앉아 다른 팀원들이 건네준 사탕을 먹고 있는 디베라의 머리를 잘 했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너, 소머즈구나.”
“소머즈가 뭐예요?
“그런 게 있어.”
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면 정확한 뜻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서현은 그의 눈빛을 보고 한껏 비웃어 주었다. 순간 의는 화가 났지만 디베라 앞이라 차마 주먹을 들 순 없어서 이를 꽉 깨물었다. 언젠간 이 수모를 갚아 주리라..
디베라의 도움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자체가 녹음임을 알아챈 서현과 의는 일단 현장에 나가보기로 했다. 테러는 항상 전화 이후에 일어났으니 사복을 입고 있는 강력팀 사람들인 두 사람에게 테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디베라가 함께 가고 싶다고 했지만, 혹시 모를 위험 상황 때문에 데리고 오지 못했고, 대신 서현이 녹음본을 들으며 특이한 사항을 알아차리라는 미션을 주었다. 디베라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세진이 두 사람이 없는 동안 디베라를 봐주기로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편하면서도 조금 불안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불안한 이유는 세진이 디베라를 봐주기로 했기 때문이었지만, 불안한 사람은 의 하나뿐이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오스티 A구역 역전은 테러가 일어나면 많은 부상자가 나올 수 있을만한 환경이었다. 경찰인 그들은 도대체 뭘 먹고 자라면 경찰에게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이 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서현과 의는 역 안팎으로 열심히 둘러봤지만, 수상한 가방이 놓여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 역무원에게 온갖 해명을 해야만 했다.
“테러 전화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저번엔 염산이었는데, 이번엔 뭐로 테러할까. 처음 출동 한 사람들이니까 밀가루로 시작하려나…….”
서현의 말에 의의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염산 다음엔 어떤 화학 물질을 쓸지 무서워 죽을 것 같다. 총 갈기는 거 아냐? 합리적인 의심에 서현은 지가 먼저 재수 없는 소리를 시작했으면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의의 등을 퍽 쳤다. 오늘도 억울한 사람은 의였다. 역 근처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역 카페에서 판매하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양손에 들고 먹기 시작했다. 이 집 샌드위치 잘 하네, 커피 말고 두유로 마실 걸 그랬나 봐. 재잘재잘 대화를 하다가 서현의 비어 있는 왼쪽 자리에 지용이 궁둥이를 붙이고 앉더니 서현의 손에 들려 있는 샌드위치를 쓱 빼서 자연스럽게 먹기 시작한다. 갑자기 나타난 지용에 놀란 의가 켁켁 거리더니 커피를 왈칵 들이켰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지용이 익숙한지 서현은 무심하게 지용에게 말을 건넸다.
“……스토킹해요?”
“오늘은 우연이야.”
“퍽이나.”
믿기 싫으면 말아. 어깨를 으쓱인 지용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저놈은 돈도 많으면서 남이 먹던 걸 뺏어 먹냐. 짜증이 한껏 난 서현이 지용의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다시 빼앗아 제 입에 마구 욱여넣었다. 그 모습에 의가 내 것도 줄까 하며 샌드위치를 들이밀었지만, 서현은 거절했다. 지용은 그 모습에 킥킥대며 웃다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현과 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용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본 지용은 말 더럽게도 안 듣는 똥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일어난 테러 때문에 나온 거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달링과 관련된 일이면 모르는 게 없지. 아무튼, 내일 전화 갈 거야.”
“AG에서 한 거예요?”
“통화 패턴도 읽었어야지, 애기야.”
지용은 여유롭게 씩 웃으며 서현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고, 의에겐 손으로 빵야- 하며 총을 쏘는 행동을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전을 빠져나갔다. 의는 난데없이 지용에게 사랑의 총알(절대 아니다)을 맞고 정신이 혼미 해 지는 것 같았다. 너한테 할 행동을 나한테 한 것 같은데, 저 사람 혹시 나 좋아해…? 아니거든! 빽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돌아가자며 근처 쓰레기통에 샌드위치를 감쌌던 종이를 버렸다. 서현이 들고 있던 커피는 지용이 그사이에 가져간 건지 손에 쥐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현을 따라 부랴부랴 차로 돌아온 의는 우물거리던 샌드위치를 꿀떡 넘기고 운전석에 앉았다. 조수석에 앉은 서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자존심 상해.”
“왜?”
“며칠 동안 녹음본 붙들고 있던 건 우린데, 해독은 다른 사람들이 다 했잖아.”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하자.”
“하늘이 돕긴 개뿔이…….”
서현은 팔로 눈을 가렸다. 디베라가 남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두각을 나타낼 줄도 몰랐고, 로드 소속인 지용이 오스티 구역의 일을 다 알고 심지어 통화 패턴까지 알아차린 것이 자존심이 상해 미칠 노릇이었다. 속상해한다고 해서 시간을 돌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속상해하지 않기엔 서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서현의 상태를 알아차린 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급하게 차를 몰았다. 서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직도 디베라가 붙들고 있는 녹음 파일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했다. 어떤 패턴이 있는지 확인해 보니 일주일에 두 번 전화가 오는데 일주일 중 월요일은 고정으로 전화가 왔고, 요일별로 돌아가면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패턴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일이 테러 전화가 오는 날이었다. 사실 그냥 보면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지만 지용의 힌트로 인해 찾아보니 눈에 확 들어왔다.
“와- 이걸 몰랐다니.”
“근데 내일은 무슨 테러를 하려나.”
의의 말에 두 명 다 말을 멈추고 숙연해졌다. 패턴을 알아차리면 무얼 하나, 범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대비할 수도 없었다.
“기지국에 도움 요청하자. 전화를 어디에서 거는지는 알 것 아니냐.”
“오, 낫 배드 해.”
“또 이상한 말 쓰지.”
흐흐- 웃음을 흘린 의가 먼저 문을 나섰다. 결국, 제일 기본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지국으로 쳐들어간 두 사람은 내일 역 테러 전화가 오면 어디에서 전화를 거는지 알려 달라고 사정했다. 마침 그들이 부탁한 기지국에서 일하는 붓세는 니콜의 절친이었고, 그 테러 사건을 알고 있던 터라 흔쾌히 수락했다. 한 차례 시름을 던 두 사람은 다시 강력팀 쪽으로 향했다. 강력팀 안에서 조용히 간식을 먹고 있던 디베라는 들어오는 의에게 달려가 안겼고, 의는 오늘은 먼저 퇴근 하겠다면서 디베라를 껴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본 서현은 아빠 다 됐다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의는 서현에게 중지 손가락을 올려주었다.
“삼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어?? 어, 어-”
그 손가락을 봤는지, 디베라가 의에게 물었고 당황한 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손가락이라고 말했다. 디베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의에게 중지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서현은 배가 찢어질 듯이 크게 폭소했다.
테러 신고 전화는 보통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 걸려왔다. 그 시간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제일 여유로운 시간이기도 했으며 경찰들이 제일 기강이 빠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긴장을 늦춘 경찰들을 쉽게 테러할 수 있었으리라. 점심을 함께 먹은 서현과 의는 1시부터 기지국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지박령처럼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기지국 국장은 기지국 구석에 앉아서 카드게임을 하는 강력팀 소속의 두 사람을 보고 혀를 쯧쯧 찼고, 붓세는 편하게 있으라며 간식거리까지 가져다주었다.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뇌에 박혀 있는 서현은 눈까지 반짝이며 간식을 받았다. 입에 한가득 초코바를 넣으며 어떻게 하면 저 얼간이(의)에게 진정한 패배의 쓴맛을 먹여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시커먼 속을 알 리 없는 의는 어떤 패를 내놓아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퀸, 티스! 전화 왔어요!"
붓세의 다급한 목소리에 마침 지고 있던 판의 카드를 집어 던진 의과, 아쉽다며 중얼거린 서현, 두 사람이 붓세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는 자판으로 이리저리 쳐 보더니 곧 발신지를 알아냈다. 오스티 A구역 역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화 내용은 들을 것도 없이 역에 수상한 가방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역 안에서 신고를 한 것도 아니고, 역 근처에서 신고한 것도 아니고, 독수리도 아니고 그 멀리서 역에 수상한 가방이 있다고 전화를 한 것을 보아하니 단단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서현과 의는 겉옷을 챙겨 발신지가 적힌 주소를 적어 들고 우당탕 시끄럽게 뛰쳐나갔다.
“드디어 갔네.”
“그러게요.”
“꼭 잡아야 할 텐데 말이야. 자네 친구가 그 사건에 연루됐다고 했었지?”
“..네.”
기지국 국장은 붓세의 어깨를 토닥이곤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서현과 의가 있던 자리는 카드 조각만 날리고 있었다. 붓세는 생각했다. 저 카드 내가 치워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