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은 오랜만에 오스티 A구역에 있는 카페 거리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3분 전 까지만 해도 그는 커피를 정말 즐기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는 저녁이라서 앞이 보일까 걱정 되게 만드는 새까만 선글라스에, 우습게도 어울리는 파란 수트를 입고 제가 마시던 커피를 인터셉트까지 하고 자연스럽게 마시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세진은 물론이고 지용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없으면 없을수록 답답한 사람은 세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현의 앞에서 푼수 같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항상 말을 아끼는 지용인데,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으니 그의 속내를 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선글라스를 벗는다고 해서 지용의 속내를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세진은 다른 사람 속마음 읽기를 잘 하지 못한다.
“퀸은 보셨습니까?”
“알면서 물어보네.”
결국 세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진의 속 보이는 질문에 지용은 짧게 대답 하고 커피를 마셨다. 우아한 동작으로 커피 잔을 내려놓은 지용은 해가 지고 있는 골목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화보 찍나봐’ 라며 소근 댔고, 용케도 그 소리를 들은 지용은 속으로 매우 좋아했다. 속으로 좋아하고 있는 지용과는 다르게 세진은 슬픈 눈으로 지용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커피 잔을 내려다봤다. 커피 맛이 좋아 유명하다고 해서 이제 막 한입 입에 담았을 뿐인데, 커피 맛은 물론이요 향도 느끼지 않고 물처럼 꿀떡 꿀떡 넘기는 지용 때문에 입이 쓰게 느껴졌다. 커피 향은 1도 느낄 줄 모르면서 마시기는 잘 마시는게 꼭 제 부하 중 멍멍이를 닮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저거 비싼데……. 세진의 눈빛을 느낀 건지, 만 건지 지용은 제 할 말만 했다.
“전달은 했나?”
“전달 해 줘도 그대로 밀고 나갈 게 분명해요.”
“그래도 1년이나 질질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킹이 여기에 오신 거 아닙니까?”
지용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선글라스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세진은 그가 왜 아직도 팀장으로 남아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면 아직 캡틴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장급은 될 것 같은데……. 물론 그 자리를 내 주고 싶지는 않은 세진은 여전히 웃음을 유지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지시사항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세진을 보니 지용은 사수를 잘 못 만난 것 같다며 혀를 끌끌 찼다. 게다가 지용의 말마따나 1년이나 지난 지시사항이었다. 세진은 오히려 그의 반응에 잘 됐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킹이 전해주시죠. 어차피 킹이 전달 받은 사항이니까요."
"걔는 나를 입 열 구로 알아."
"입 열 구……?"
"입만 열면 구라."
"와우, 그런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우신건가요?"
엄청난 네이밍 센스(조커와 관절, 판타지 etc.)를 가진 세진이 혀를 내둘렀다. 세기말 단어를 조합한 것도 모자라 줄임말이라니. 로드지역 서 내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지용이라지만 이건 좀 깼다. 안 그래도 독설을 날리는 지용이라 다가기 힘든데 조금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 없이 유치해진다. 그래서 아마도 지용이 말이 없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지용은 세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세진은 하도 익숙한 상황이라 그저 지용이 마셨던 커피 잔을 들여다봤다. 커피를 조금이라도 그가 남기지 않았을까, 기대 했지만 지용에게 그런 기대는 바라지 않는 것이 좋았다. 혹시나가 사람 잡는다고, 딱 그 꼴이니.
“이번 주 내로 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커피는 입에 맞으십니까?”
“쓰레기 같아. 이딴 걸 돈 주고 파는 놈도, 사는 놈도 둘 다 병신이야.”
순식간에 병신이 되어 충격을 받은 세진이 얼굴을 굳혔다. 쓰레기 같은 커피 마시느라 고생 많은 지용에게 정보 하나를 흘려줘야겠다 싶어 이미 비어 버린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퀸은 잠복이에요.”
“잠복? 무슨 일로?”
잠복이라면 자다가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 서현이 오늘 잠복근무를 한다는 소식에 지용이 놀라움을 내비쳤다. 세진의 정보가 마음에 들었는지, 지용은 선글라스 너머의 눈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녀의 파트너가 실수 했거든요.”
세진이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그러자 지용은 티 나지 않았던 아까와는 다르게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렇잖아도 남자 파트너랍시고 옆에 떡 붙어 있는 것이 거슬리는데 둘이 잠복까지 한다는 건가? 지용은 서현의 상사에게 간단한 잠복 내용을 전달 받고 다가왔던 것처럼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지용을 보며 세진은 한숨을 뱉었다.
“커피 값은 좀 주지.”
커피 잔 안은 커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 쓰레기 같다면서 얼마나 깔끔하게 마셨는지, 잔을 기울이면 겨우 한 두방울 정도 떨어질 수준이었다.
“이거 비싼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중얼거렸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뉘엿뉘엿 지고 있던 해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칠흑같이 어둠이 길에 하나 둘 씩 깔리기 시작했다. 지용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현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다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마 또 토끼같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겠지. 지용은 흥을 감추지 못해 가볍게 흥얼거렸다.
*
니가 아니면 누가 했냐, 나는 정말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기웃거렸을 뿐인데 누가 뒤에서 습격했다. 난 억울하다. 의는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밤고구마를 잔뜩 먹다 못해 입에 우겨 넣은 듯한 답답함이었다. 그 새벽에 누가 20km 이상 떨어져 있는 곳까지 차도 없이 걸어 나와서 폴리스 라인 안으로 들어가 기웃거리는가? 48시간이 지나면 긴급 체포도 소용이 없어지는데 이제 8시간 뒤면 48시간이 모두 지나버린다.
"이봐, 칼릭스. 그냥 솔직하게 말해! 그럼 자백 보너스 들어가서 감형된다니까?"
"자백할 게 없는데 무슨 자백을 하라는 겁니까!!!!!"
자신을 칼릭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처음 24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변호사를 선임한 것도 아니었다. 의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며 신경질을 잔뜩 부린 서현을 깔봐주며 의기양양하게 심문실로 들어왔지만, 자신도 곧 서현의 처지가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겠다며 심문실을 나섰다. 팀 방에는 서현이 소파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저 새끼는 만날 쳐 자기만 하지. 의가 불만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아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진전이 없나?"
"……예."
세진이 연신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는 의에게 슬쩍 다가와 물었다. 의는 그런 자신의 상사에게 눈도 뜨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진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으흐흐 거리는 웃음소리가 거슬린 의는 도끼눈을 뜨고 세진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저렇게 웃는 거야! 본인 상사지만 정말 징그럽다.
"그 아이는 잘 있나 모르겠네."
"……!"
세진의 힌트 아닌 힌트에 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호실로 향했다. 범인이 30일 내로 잡히지 않으면 범인은 사회에 풀어주고, 이제 오갈 데 없는 천애 고아인 그 아이는 두려움에 떨며 보호시설로 갈 것이 분명했다. 의는 보호실 문을 잡고 한참을 망설였다. 심문실 화면을 보여주는 즉시로 그 아이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텐데, 그렇다가는 서현이 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했다. 애한테 남을 트라우마 때문이겠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벅벅 긁은 의는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안 들어가?"
"악!!! 아오, 아!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다녀!!"
갑자기 들리는 서현의 목소리에 의가 엄청, 매우 깜짝 놀랐다. 서현은 푹 자서 개운하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곤 의를 살짝 밀치더니 그가 머뭇거리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누워 있던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꼬맹이, 잘 지냈어?"
"아, 안녕하세요."
"너한테 부탁을 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서현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현이 숨을 고르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의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너를 도와주는 방법을 찾았어. 너에게 괴로울 수 있겠지만 한 번만 참으면 이제 힘들지 않을 거야.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니?"
의의 부드러운 말투에 서현이 조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맨날 얼간이 같이 얼빠진 모습만 봐서 그런가, 이런 갭은 서현에게 항상 놀라움을 심겨주었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의의 음성에 아이는 조금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저 사람이 말한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간단해. 우리가 한 사람을 보여줄 거야. 아무 말도 안 해도 좋아."
"……힘들까요?"
"힘들겠지만 우리가 옆에 있어 줄게. 무서우면 눈을 감아도 괜찮아. 뛰쳐나가도 상관없어."
그러면, 할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서현과 의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의는 아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오히려 고맙다는 들은 아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디베라, 생일 축하한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부모가 살해당한 그 날은 디베라의 생일이었다. 서현과 의를 따라 팀 방으로 들어온 디베라는 낯선 공간에 살짝 위축되었다. 심문실과는 다른 무거운 공기였다. 소파에 앉은 세 사람은 테이블 위에 놓인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가 리모컨을 조종하자 화면에 심문실을 비추는 카메라가 작동하며 심문실 내부가 비치고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디베라의 표정과 행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뚫어지라고 화면을 보던 아이는 곧 칼릭스의 얼굴을 보자 하얗게 질렸다. 두 사람은 쾌재를 불렀다.
*
사건 번호, 4931-2 조커와 관절.
사실 사건 이름은 적지 않아도 되지만 보고서에 꼭 이름을 넣기 원하는 세진 덕분에 얼굴이 홧홧해지는 이름을 적어 넣은 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서를 작성해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사건은 의가 작성하는 차례였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디베라와 함께 나들이를 간다며 서현에게 일을 미뤄버렸다. 개 같은 놈, 개똥이나 밟아라. 디베라와 함께 있으면서 디베라가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저주를 의에게 퍼붓던 서현은 범인 검거 경위를 작성하다 멈칫했다. 사실 범인은 지용이 잡은 것이다. 오래된 경찰 짬밥으로 세진도 대충 눈치를 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뭐라고 적냐. 로드 A 지역 강력부 부장 킹이 잡아주었습니다. 라고 적으면 로드 A 지역으로 지용이 강제 소환될 것이 분명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한 서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진에게 다가갔다. 씩씩한 발걸음에 고개를 올린 세진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꼭 회장과 신입사원의 모습 같아 보였다.
"범인 검거는 사실 그 사람이 한 건데, 보고서에 뭐라고 작성해요?"
"자네가 잡았다고 해."
"지랄할 것 같은데."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죄라고 전해 주고."
저번 커피 사건 때 앙심을 품은 세진은 사람 좋게 미소를 지었다. 커피값만 쥐여줬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
두 사람은 디베라의 도움으로 칼릭스를 잡고 재판에 넘겼다. 검찰에선 바로 칼릭스를 기소해버렸고, 칼릭스는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않은 채로 법정에 나섰다가 제대로 털려버렸다. 이번 살인이 처음은 아니었는지, 검찰이 조사하다 공소 시효가 남은 다른 살인 사건까지 걸리는 바람에 가중처벌이 되었다고 전해졌다.
살인 이유는 '그냥' 이었다. 이유와 목적 따위 존재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에게 행한 살인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서현은 칼릭스의 거시기를 떼어 버려야 한다고 소리쳤고, 서현을 말리던 의는 자신의 거시기가 떨어지면.. 까지 생각을 하다 소름이 끼쳤다. 칼릭스에게 협박을 받았던 디베라는 칼릭스가 교도소로 들어가자마자 자유를 얻은 듯이 행동했지만 디베라는 곧 보호시설로 들어가야 했다. 그 사이 디베라와 많은 시간을 보낸 의가 디베라가 잠든 것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너는 경찰이 아니라 유치원 선생님 해야겠다."
"흑- 디베라가 곧 보호시설로 들어가는데 넌 슬프지도 않니!?"
"슬퍼야 할 이유가 있나? 어쩔 수 없는 건데."
냉혈한 같은 그의 발언에 의는 어흑- 거리며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냈다.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내려다본 서현은 의의 옆에서 멀리 떨어졌다. 디베라는 이제 13살이다. 보호자 없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험했고, 디베라는 너무 어렸다. 그렇다고 서현이나 의가 보호자가 되기엔 그들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행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세진은…… 더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보내야지."
서현은 고양이처럼 늘어져라 소파에 몸을 뉘였다.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두 콤비의 대화에 다른 팀원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다 의가 무언가가 생각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서현에게 다가갔다.
"왜?"
"너 경찰 시험 언제부터 봤어?"
“17살.”
의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서현은 알 수 없는 오한이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기 거부하듯이 고개를 팩 돌렸다.
“안 돼.”
“왜! 제발!”
“꺼져! 내가 선생님 하려고 경찰 빨리한 줄 아냐?”
“선배님, 제발요!”
머리털이 쭈뼛 서고 오글거리는 '선배님'이라는 단어에 서현이 치를 떨며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의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저러다 한 대 맞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사람들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