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4. 타흐마탄
5. 아이라만
6. 샤흐라자드
타흐마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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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용병이오.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소.
그의 삶은 외롭고 가혹했소.
그녀의 이름은 무희라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흠모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무시하오.
그녀에게도 꿈이 있고 사랑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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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교 사제들의 정오기도가 끝나자 타흐마탄은 서둘러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예배시간은 너무 지루했다. 하품이 나오는 걸 참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그리아 왕국에서는 너나 할 것없이 일신교를 믿었다. 왕국의 복속된지 10년도 안된 북부속령이나 내정이 독립된 자치령에서는 이상한 제사를 지내고 수십가지 향로를 피워대지만, 왕도에선 오직 일신교만 허락되었다. 신은 오직 위대한 한분 뿐이며 그분의 언령으로 잉태하신 성모님과 성자님이 계시고-
여기까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이후부터는 크고 두꺼운 양피지 경전을 읽어야 하는데 타흐마탄은 글줄 읽는 것은 지루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뒷 내용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타흐마탄은 태생부터 하그리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이웃나라인 살레굽 제국의 용병이었다. 그보다 더 전에는 살레굽 제국의 귀족이었다. 말단귀족인 집안이 몰락하자 어린나이에 떠돌이 용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돈만 주면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돈이 생기면 그때그때 다 썼다.
여자들과도 뒹굴고, 술을 사고, 노름을 하다보면 돈은 전부 사라져있었다. 그러면 또 다시 일거리를 찾으러 떠돌아다녔다. 타흐마탄이 하그리아 왕국에 정착하게 된지는 17년째가 되었지만, 그것도 왕자의 아버지이자 왕실 근위대장이라는 고위관직에 올랐지만, 아름다운 궁전에서 하루 종일 맛있는 것만 먹고있지만, 길바닥 여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고 똑똑한 여왕폐하를 아내로 두었지만, 가끔씩 모든게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당장 20년전의 자기 자신이 지금의 생활을 본다면 웬 점잔빼는 재미없는 아저씨가 되었다며 멱살을 쥐어잡고 흔들것이다. 물론 타흐마탄이 누리고 있는 부유함과 권세를 알게 된다면 과거의 자신은 금 100두캇만 달라고 살살 꼬드겼을 것이다. 그럼 타흐마탄은 20여년 전 자신에게 고작 그돈으로 만족하겠냐면서 왕도의 일등지에 궁궐같은 대저택을 하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것이다. 배꼽잡고 웃으며 자기 신세를 한탄을 해달라면서-
"하아. 지루해."
타흐마탄은 예배당을 빠져나와서 그늘진 정원수 아아래로 내려가 편하게 자리잡고 누웠다. 이걸 재미없는 관료들과 시종들이 봤다면 체통을 지키시라며 잔소리를 퍼부을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로 뛰쳐나왔다. 시종들은 잘 따돌렸고 말많은 궁인들 눈에 띄지 않도록 정원수 그늘 아래로 몸을 숨겼으니 편하게 낮잠이나 자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흰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니고 시원하게 바람도 부는 좋은 날씨에 눈꺼풀이 감기면서-
"아버지."
"흐억!!"
익숙한 아들의 목소리에 벌떡 눈이 떠졌다. 눈앞에 아들이 서있었다.
"오수를 즐기시려는데 제가 방해가 되었군요. 그래도 취침은 실내에서 해주세요."
"... 언제부터 날 따라온 거냐?"
"정오기도가 끝나고 부터요. 시종들이 채비하기 전에 창밖으로 재빠르게 뛰어내리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셨어요. 벽을 타고 내려오셔서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나무그늘 아래로 편하게 자리잡고 누우시길래 저도 아버지처럼 시종들을 따돌리고 몰래 나왔죠. 아 누구에게 일러바치진 않았아요. 저 잠시 아버지 옆에 앉아도 되죠?"
왕자는 타흐마탄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왕자는 편하게 자세를 잡고 누웠다. 올해로 16살 성인이 된 하그리아 왕국의 2왕자 이스카 왕자는 검은 머리카락에 흑녹색 눈을 가진 수려한 청년이었다. 이스카 왕자는 타흐마탄과 샤흐라자드 여왕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인 여왕을 더 닮았다. 타흐마탄은 읽기 귀찮아 하는 경전이나 예법서도 곧잘 읽고 쓰는데다가 말도 금방 터득했다.
타흐마탄과 달리 어릴때 부터 딱히 사고를 치거나 하진 않았다. 닮은 곳을 찾으려해도 20여년 전 젊은 샤흐라자드 여왕의 얼굴만 존재할 뿐이라 자기 아이가 아닌것 같단 생각을 한적도 몇번 있었다. 하지만 여왕이 타흐마탄을 이스카 왕자의 아버지라고 말했고, 이스카 왕자도 타흐마탄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니 엄마랑 닮아서."
"어마마마를 닮은 건 당연하죠. 전 어마마마가 낳았으니까요."
'넌 나를 하나도 안닮아서 내 아들같아 보이지가 않아' 라고 말할 뻔했지만 꾹 참고 돌아 누웠다. 아들은 기억력이 좋았다. 2~3년전에 무심코 했던 말 한마디도 토시하나 틀리지않고 되풀이 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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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사그락 거리며 춤을 추었다. 아치 너머 정원수 아래로 두 사람의 사내가 보였다. 타흐마탄 장군과 2왕자 이스카 전하는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오기도가 끝난 직후였다. 누르자한은 멀리서 남편과 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가가지는 않았다. 왕자 전하께서 잠시 아버지께 할 말이 있다며 먼저 내궁에 가라고 지시하셨다. 누르자한은 남에게 명령받는 걸 싫어했지만 남편의 말에는 복종했다. 신실함이 없는 그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섬기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금빛 고수머리에 청옥석 같은 눈동자, 우윳빛 피부를 가진 누르자한은 왕궁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는 미녀다. 1년 전만 해도 그녀는 천한 신분의 무희였다. 연회가 열릴 때마다 악사들의 음악소리에 맞춰서 요염하고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나풀거리는 모슬린 천으로 짠 무용복을 입고 움직이는 누르자한은 남녀노소 할것없이 누구든 매료시켰다. 올해 초 궁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춤을 추던 그녀에게, 이제 막 16살 성인이 된 이스카 왕자께서는 손바닥 크기 만한 루비와 장미다발을 들고 자신의 아내가 되어달라 청혼했다.
왕자는 잘생겼다. 흑녹색 눈동자는 우수에 차있었고, 장밋빛 뺨은 수줍은 소년같았다. 그는 자신을 왕자라고 소개하지 않고, '이스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거만하게 수청을 들라는 태도가 아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왕자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줄 선물이 더 있다며, 사랑가를 불렀다. 깜짝 놀랐다. 이스카는 노래를 굉장히 잘 불렀다. 어릴때부터 무희로 자란 누르자한이 본 그 어떤 가수들 보다 음색이 좋았다. 누르자한의 표정을 읽은 이스카 왕자는 싱긋 웃어보였다. 누르자한은 바로 청혼을 승낙했다.
2왕자와 결혼해서 왕국의 2왕자비가 된 뒤론 누르자한은 누가 권해도 절대로 춤을 추지 않았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춤을 추고 싶으면 언제든지 춰도 된다고 했지만, 누르자한은 한사코 춤을 추지 않았다. 누르자한은 남편보다 머리는 나빴지만, 남편보다 6년이나 세상풍파를 더 겪어보았기 때문에 눈치는 빨랐다. 시어머니는 왕가에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인데다 강대한 나라를 다스리는 여걸이고, 1왕자비인 동서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잘난년이었다. 누르자한은 이 둘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의 출신을 놓고 궁인들이 수군거릴 때마다 군관을 시켜 매질을 했다. 시녀들이 상등품이 아닌 물건을 들여놓으면 즉시 야단치고 뺨을 때렸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들을 수족으로 부리며 그들에게 비싼 장신구를 얹혀주며 1왕자비나 여왕폐하의 움직임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여왕은 시아버지 외에도 남자들을 여럿 끼고 살았고, 동서는 싱글거리는 표정 아래로 간교한 꾀를 내는 음침한 여자였다. 심지어 자신의 셋째 오빠를 시어머니의 시첩으로 만들어버리고 3왕자와 그 아버지를 먼 북부로 보낼만큼 표독스러웠다.
궁정의 관료들과 시종들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표리부동한 작자들이었고, 궁인들은 왕자를 유혹해서 신분상승할 욕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간사한 것들. 궁정은 겉으로만 보면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포주와 매춘부들의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추악한 세상에서 자신의 남편은 너무나도 고결하고 순수했다. 남편은 노래 뿐만 아니라 악기연주도 잘했다. 누르자한을 위해 연주했고, 누르자한을 위해 꽃을 꺾어왔고, 누르자한을 위해 아름다운 팔찌와 귀걸이 만들라고 왕궁장인에게 지시했다.
지금의 누르자한은 아주 행복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멋진 시아버지가 있고, 아름다운 궁전에서 좋은 걸 입고, 좋은 걸 누리며 살고있다. 22년 인생을 통틀어봐도 지금의 삶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게 누구라고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싸울 것이다. 누르자한은 팔찌장식을 매만졌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는 팔찌는 순금을 실처럼 녹인 뒤 보기좋게 이어낸 것이다. 누르자한에겐 이것만큼 예쁜 팔찌를 백개나 가지고 있었다.
누르자한의 곁으로 시녀 하나가 다가왔다. 누르자한에게 충성하는 궁인이었다. 누르자한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시녀는 정중히 절을 하며 누르자한에게 귀를 가까이 해달라는 눈짓을 했다. 누르자한은 허락했다. 시녀가 귀에 대고 소근거리길, 1왕자비 파리사티스가 오늘 정오기도를 마친 뒤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와 장기를 두러갔다는 것이었다. 이사야 박사는 여왕폐하가 새로 총애하기 시작한 남자라며 관료들이 주시하는 사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필시 1왕자비가 또 무슨 간계를 부리려는 속셈이었다. 누르자한은 뒤를 돌아보며 궁인들에게 내궁으로 가지 않고 이사야 박사의 연구실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2왕자비마마는 평소에 책을 가까이하는 성미는 아니지만,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1왕자비에게 무시당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궁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2왕자비마마께 절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필시 또 소란이 일 것이었다. 여왕폐하의 며느리들은 여걸이신 여왕만큼이나 성격이 드센 여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