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는데. 하영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지만 물을까 말까 고민중이었어.”
아름이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왜?”
“이런 건 처음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털어놓기 어려운 얘긴 것 같아서. 어제 네가 다 말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느꼈어.”
화를 내던 아름은 괜히 기분이 무안해졌다. 하영의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제멋대로인 놈이라고 속으로 욕한 걸 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든가…! 괜히 사람 열받게 하고.”
“그건 미안.”
하영이 사과했다. 아름도 어쩔 수 없는 척 화를 풀었다. 하영은 니가 웬 일이냐는 말을 표정으로 하는 찬희를 무시하고 말했다.
“그래서 기왕 네가 먼저 말 걸어온 김에, 역시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줘.”
아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이니까. 말하자면 나는 너랑 비슷한 부류야.”
지금껏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하던 찬희도 아름의 말에 집중했다.
“초능력자. 내 모습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니까 딴지 걸지 마. 특별한 정체를 가진 사람이 내눈에는 보여. 평범한 사람과 구별해낼 뿐 아니라 그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눈을 감으면 다른 색깔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가 들리기도 해. 본질을 알아보는 것. 그게 내 능력이야.”
하영은 잠자코 아름의 말을 곱씹었다. 앞으로 종종 단점이기도 할 아름의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거침없는 성격, 그리고 허무맹랑한 비밀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아름이 피식 웃었다. 하영도 따라 씩 미소지었다. 자신과 조금 닮았다 싶으면 곧바로 유대감을 느끼는 게 사람이라던가. 하영은 생각을 단순하게 하기로 했다. 맘편히 갑갑함을 징징댈 상대가 한 사람 더 늘어난다는 건 역시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잘 해보자.”
-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네 더러운 성격을 고치지 않는 한 잘해보는 건 불가능해.”
“그 잘해보잔 뜻이 아니잖아.”
찬희의 구박에도 하영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 성격은 더럽지 않아. 할 말은 하고 사는 것일 뿐.”
“그래라 미친놈아.”
결국 찬희가 한발 물러섰다. 오늘도 핀잔에 무릎 꿇지 않았기에 하영은 뿌듯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천히 가, 미친놈아.”
하영은 마주쳐 오는 사람과 부딪칠 뻔하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뿌듯해진 지 5초밖에 지나지 않은 참이었다. 지나쳐 가려는 순간 마주오던 사람이 하영을 붙들었다.
“저기, 잠깐만.”
자신의 팔에 닿은 손바닥으로부터 하영은 묘한 적의를 느꼈다. 때문에 왜냐고 묻는 대신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개가 아플 만큼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키가 컸다. 올려다본 얼굴은 눈에 띄게 매력적이었다. 덧붙여 살짝 느꼈다가 사라진 적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어느새 찬희가 가까이 다가왔길래 상대가 시비를 건다 해도 쫄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름이 뭐야?”
여자들이 사랑해 마지않을 목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영은 약간 짜증이 솟았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런 걸 왜 대답해야 하는데요’ 같은 투를 한번 버려보기로 했다.
“왜요.”
주위의 바람대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영은 자책하는 대사를 내뱉는 대신 남자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아아 미안.”
“안 부딪쳤어요, 우리.”
하영의 말에 남자가 설레설레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라...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시간 좀 내줄래?”
“뭔데요? 물어보세요.”
“으음, 그러니까... 너 정체가 뭐지?”
그저 도서관을 가려던 길은 조금도 평탄하지 않았다.
“어제 소래산에서 널 봤는데.”
찬희가 푸욱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영 또한 있는대로 표정을 일그려 심정을 드러냈다. 덕분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상대방이었다.
“그... 교복이랑 얼굴... 확실히 봤으니까 빼지 말고...”
남자는 하려던 말을 관뒀다. 그가 미리 세워둔, 청소년의 마음을 여는 열 가지 플랜이 모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누가 봐도 잡아떼는 태도가 아니잖아.’
하영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그거 나 아니에요. 무조건 아니에요.”
“그거라면 네가 날개를 펼치고 날던 걸 말하는 거니?”
어설픈 부인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일단은 안심해라. 떠벌릴 생각 없으니까. 아저씨란 호칭도 그만두고.”
“그냥 떠벌리세요. 막 퍼뜨리든가요. 믿어줄 사람부터 찾아야겠지만.”
말실수에 자존심을 구긴 하영이 까칠하게 대꾸하고 들자 찬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얘 정체가 그렇게 궁금해요? 근데 아저씬 왜 그렇게 담담해요?”
“...담담하지 않아. 오랫동안 찾아다닌 존재가 여기 네 친구일지도 모르니까.”
“난 새예요.”
“새라니. 어떤...”
“그냥 새라구요 새. 더 물으면 실례거든요? 아저씨.”
하영은 그 말을 끝으로 남자를 지나쳐갔다. 남자는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
“도서관은 관두고 집에나 갈란다.”
“중간고사 잊었어?”
“에이씨.”
도서관은 정말이지 끈질긴 놈이었다.
“아까 그 남자가 오랫동안 찾아다닌 존재라고 했지?”
“아, 그 잘생긴 남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보면 이쪽으로 아예 무지한 건 아닌 거 같았어.”
“어쨌든 그 존재라는 게 나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호감을 가진 상대는 아닐거야. 따지자면 그 반대겠지.”
“왜?”
“처음 날 잡았을 때 적의가 느껴졌거든.”
“너 그런 것도 되냐?”
“거센 감정은 그대로 분위기가 되니까. 아깐 분위기가 될 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몸에 상대가 직접 닿으면 분위기나 다름없지. 우리 둘만의 세상이랄까.”
“미친.”
둘은 키득거리며 걸었다.
“그 남자 다시 나타나선 품에서 검을 꺼낼지도 몰라. 내 부모님을 죽인 원수!! 이러면서.”
“또 헛소리한다.”
도서관에서는 소득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영은 순조롭게 공부하는 찬희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질투했을 뿐이었다. 그 시선에 신경이 곤두선 찬희가 하영에게 문제풀이를 시켰기에 몇 개의 문제를 얻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하영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하는 학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찌감치 찬희와 헤어진 하영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씨앗호떡에 대해 떠올렸다.
‘사 달라고 하는 거 깜박했다.’
내일은 꼭 고소한 씨앗이 담긴 호떡을 얻어내겠다고 다짐하며 편의점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하영은 저만치서 지켜보던 키가 큰 그림자의 얼굴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앉아서 컵라면을 흡수하던 손님들과 동전을 세던 알바생의 주목을 다 받고 나서야 하영은 민망해져 서둘러 문을 나섰다.
하지만 그것이 잘한 선택인지를 곧장 의심해야 했다. 낯익은 얼굴을 한 그림자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