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미친 새끼. 긴장과 불쾌함이 뒤섞여 마음 속으로 내뱉은 말을 눈치없는 입술이 따라한 모양이었다. 밝을 때 만났던 이상한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영은 여차하면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도움을 요청할까 했지만 저 사람들이 이 잘생긴 남자 대신 성격 나쁜 자신의 편을 들어줄지는 미지수였다.
‘아 맞다 나 성격 나쁘지.’
어느새 인상을 펴고 태연하게 말을 거는 남자가 하영은 어이가 없고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자신의 성격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대체 뭐 하세요?”
“나는… 너에게 물어볼 게 많아서.”
“아까 물어봤잖아요. 아저씨 스토커세요?”
“스토커…?”
순간 인상을 찌푸리던 남자가 할 말이 없는 듯한 기색이기에 하영은 조금 만족했다.
“내 이름은 이안이야. 스토커가 아니라.”
하영의 뭐 어쩌란 말이냐는 눈빛에 이안이 푹 한숨을 쉬었다. 서로는 쉽지 않은 상대가 각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흰 얼굴에 흰 날개. 그러고선 천사가 아니야? 그저 ‘새’라는게 거짓인지 진심인지 확실히 해 줘. 내겐 정말 중요한 일이라 그래.”
“천사……?”
이안은 하영이 반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 좋아해요? 근데 난 미성년자고 아저씬 아저씨고, 또 나이가 아니래도 난 스토커는 죽어도 싫고, 또 아저씨 얼굴도…”
이안은 놀란 고양이처럼 번개 같이 손사래를 쳤다.
“무슨 헛소리야? 그런 거 아니고 제발 아저씨 소리 좀 그만 둬. 너…… 천사 몰라? 너랑 닮은 하얀 존재 말이야.”
이안이 간절하게 말했다. 하영은 그의 반응에 안심되는 자신을 느꼈다.
“영화에서 봤는데요.”
“하아…… 뭐야. 그럼 자기가 천사여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네.”
“그건 아니에요.”
이안의 눈빛은 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 지 알 것 같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불신이겠지.
“그쪽, 이안 님…? 이 믿든 안 믿든간에 난 새거든요? 나는 그걸 그냥 알아요. 이건 내 자존심이니까 건들지 마시죠? 그리고 좀 비켜요, 집에 가게.”
자존심 얘기는 그를 무안 주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지만 이안은 왜인지 하영의 말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영은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다며 속으로 환호를 했다.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었다. 오빠는 안 보고 싶었다.
“미안해. 네가 진짜 새라면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확신하는 게 당연하겠지. 우리 동물들은 다 그러니까.”
‘우리 동물들?’
이안은 다음에 보자며 먼저 자리를 떴다. 하영이 그의 말을 곱씹느라 잠시 딴 세상에 가있던 사이였다. 그는 이안의 말 중에 심상찮은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개중에도 다시 보자는 말이 가장 심상찮다고 생각하며 팔을 부르르 떨었다.
날개를 펴고 집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하영은 이안을 만난 것을 가족들에게는 아직 비밀로 하기로 했다. 걱정이나 배려는 허울이고 사실은 혼나고 싶지 않았다. 하영은 대부분의 경우 제멋대로였다.
그렇게 수상한 남자에 대해 의문을 품다 말고 꿀잠을 잤다. 지각해서 새다리로 뛰어가는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꿈이 실현되어 있었다. 다리는 멀쩡했지만 오늘은 지각이었다.
김준하가 김준하 주제에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벌점을 받아갔다. 하영은 아침부터 구긴 이미지에 기분 상한 티를 푹푹 드러냈다.
“네가 이미지가 어딨어?”
찬희는 가끔 참 나쁜 아이였다. 하영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벌떡 일어섰다.
‘왜 저래…’ 뒤에서 들리는 말을 무시하고 하영이 앞자리의 아름에게로 다가갔다. 아름은 공책을 펴 놓고 다음 시간의 늦은 숙제를 하고 있었다.
“씨앗호떡 사줘.”
“어? 야, 과학 숙제 다했냐?”
“씨앗호떡.”
“아! 점심시간에 사줄게. 지금 바쁜거 안 보이냐고…”
하영은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거짓말쟁이’를 연발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엔 뒤에서 투덜대며 집중하는 아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영은 쳐다보는 찬희를 무시하느라 모든 연기력을 끌어서 써야 했다. 그러나 후우- 하는 한숨소리까지 무시하기엔 하영의 자존심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아 왜!”
“뭐.”
점심시간, 하영은 찬희와 나란히 급식실로 향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 남자 존나 스토커같지 않냐? 편의점 앞에 서있을때 소오름이 돋는 거야 진짜…”
열심히 떠들던 하영이 문득 앞서 가던 노란 머리를 발견했다.
“연아름!”
돌아본 아름이 살짝 찡그리기에 하영은 또다시 상처를 받았다.
“사줄게 씨앗호떡! 누가 떼먹는대?”
“그거 말고 밥 같이 먹을거냐고! 왜 승질이야?!”
“아. 그래… 같이 먹어.”
“쉬익.”
찬희와 아름은 밥을 먹는 내내 오늘따라 짜증나게 구는 하영을 달래주었다.
“그만 좀 해 미친놈아. 얘가 사준다잖아 씨앗 그거.”
“미안, 유찬희.”
“내가 미안. 쟤 좀… 저래. 원래 저래.”
하영이 깍두기를 씹으며 둘을 노려보았다.
“왜 나 빼고 말하냐?”
찬희와 아름이 먼저 일어났다. 하영은 아몬드 멸치볶음을 밥 한숟가락과 함께 다 털어넣고 쫄래쫄래 따라 걸었다. 기어이 둘을 매점 앞까지 함께 끌고간 하영의 손에 씨앗호떡 두 개가 쥐어졌다. 하영은 귀여운 아이들을 손에 하나씩 쥐고 높이 들어 빵피에 햇빛을 쐬어 주었다.
아름이 지갑을 닫으며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앨까? 답을 내리지 못하는데 찬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할 얘기가 있는데.”
“뭔데?”
“너…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했지? 그거 얘 한번만 도와줄 수 있어?”
아름은 찬희의 손가락 끝에서 멀뚱히 서있는 하영을 쳐다보았다.
“신하영을? 왜? 아니… 엮이기 싫어지긴 했는데.”
“내가 뭘?”
찬희가 하영의 입을 틀어막고 말을 이었다.
“얘한테 스토커가 붙었거든. 수상해.”
“……스토커라면 수상하네. 근데 왜 스토커가?”
“정체가 수상해. 막 천사니 뭐니 우리는 동물 어쩌고 그랬대.”
아름은 점심시간 내내 하영의 회상을 들었다. 중간중간 하영의 쓸모없는 감상이 끼어 있지만 않았다면 금방 끝날 이야기였다. 시간낭비에 한숨을 쉬면서도 아름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그에겐 간만에 반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보내는 시간이 썩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