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침잠이 없는 하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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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잠이 없는 하영이지만 햇살이 들이쳐도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고도 어제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젯밤의 혼란스러움은 꽤 잠재워져 있었다. 지난 밤, 고뇌 가득한 얼굴로 집에 돌아온 하영은 현관문 밖에서 표정관리를 했다. 다들 거실에 모여 TV를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그렇다 쳐도 눈치빠른 오빠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여차저차 하영은 저녁을 혼자 꾸역꾸역 먹고 방으로 들어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에 푹 자고 일어나기도 했다. 판단하고 대책을 세우기엔 그저 혼란스러웠다. 이럴 때는 도형의 전개도처럼 바닥에다 생각을 한면씩 펼쳐놓는 것이었다. 가장 크게 문제되는 것이 무얼까. 일단은 불안감이었다. 하영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새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아름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정말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일까? 첫번째 궁금증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두번째는 알 것 같았다. 아름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 애는 남에 대한 배려는 없어도 남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무척 당연하다는 말을 할 때에도 표정은 단호했었다. 하영은 이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내가 아는 누구가 새다. 날수도 있다.’ 라고 말해봤자 누가 믿는단 말인가? 두번째의 문제는 앞으로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딱히 정한다고 그대로 될 리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하영은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하영이 다니는 릴라고등학교는 집과 10분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등교시간이 20분 남짓 남았음에도 하영은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 나서 뱀처럼 스멀스멀 옷을 주워입고 다시 스멀스멀 기어 집을 나섰다. 집이 가까울수록 등교시간에 빠듯하게 맞춰 도착한다는 가상의 통계를 확실히 인정하는 바였다. 교실에 도착하자 꽤 멀리서 등교해야 하는 찬희는 이미 책을 펴놓고 있었다. “오예 신하영 지각.” 교실 뒤에서 떠들던 주제에 김준하가 하영을 가리키며 우렁차게 말했다. “에이 하지마. 조회 아직 안하잖아. 나 적지마 반장님. 반장느님.” “싫은데?” “씨. 맘대로해.” “야 알았어 알았어 안적어.” “역시 반장, 사랑한다!” “꺼져.” 하영은 자리로 꺼져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그리고 옆자리의 찬희에게 말했다. “한심하게 보기냐? 너도 가까이에 살아봐. 나름 고충이 있다고.” “40분 일찍 나왔는데 버스 한대 놓쳤다고 지각할 뻔했어. 염장 계속 질러봐라.” “으음.” 하영은 기세를 꺾고 가방에서 필통과 잡동사니를 끄집어냈다. 담임은 아직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아침조회 얼렁뚱땅 때우려나 보다.” 하영의 혼잣말을 무시하고 찬희가 말했다. “너 어젠 대체 뭘 한거냐?” “전화로 말한 그대로야. 더 말할 것도 없어.” 찬희의 눈초리에 하영은 다음 말을 하며 가드를 올려야 할지를 고민했다. “……” “어이가 없냐? 더 한심한 게 남아있는데.” “뭔데.” “나 어제 들켰어. 우리 반 애한테.” 찬희의 얼굴이 가능한 최대로 찌그러졌다. - 하영은 찬희에게서 위협마저 느꼈다. “야, 내말 좀 듣고 화내. 어제 소래산에서 들킨 게 아냐. 걘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더라. 근데 나는 어릴 때 빼고 집밖에서 수상한 짓 한 기억이 없어. 너도 알잖아?” 찬희가 곰곰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날개만 안 꺼냈다 뿐이지 너 수상한 짓은 많이 했어. 20층 건물 창밖으로 몸을 내밀지를 않나. 새만 보면 실실 처웃기도 하고. 이 사이코 새끼야.” “좋은 걸 어떡하냐. 새 마니아라고 둘러대줘.” 찬희는 구제불능을 대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걔가 누구야? 하필 우리 반이라는 애가.” 하영은 교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앞줄에서 아름과 눈이 마주쳤다. 계속 찬희와 무어라 떠드는 하영을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쟤야. 지금 나 뜨겁게 쳐다보는 연아름.” 하영은 찬희에게 아름에 대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둘이 동시에 자신을 쳐다보자 아름은 당황해서 몸을 돌렸다. ‘왜 저래? 내 얘기를 하는거야? …아 혹시 쟤도 알고있나? 둘이 엄청 친해보이니까.’ 아름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둘은 다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름이 쳐다보는 기색이 들자 하영이 다시 눈을 마주쳤다. 아름은 그를 날카롭게 째려보고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책상 속에서 교과서를 꺼내 탁 소리나게 놓았다. 하영은 어이가 없어진 표정으로 아름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왜그래?” 찬희가 물었다. “잘못 걸린 것 같아서.” 하영의 대답이었다. “어쨌든, 예전부터 알았는데 소문이 안난 걸 보면 입은 무거운가 보다.” “암만 입이 가벼워도 ‘6반 신하영이 새다’라는 소문을 내봤자 지나가던 개도 안믿을텐데.” “하긴. 쟤한테 비밀 지키겠다고 약속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하영은 잠시 생각하다 짧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될 걸.” 조회 시간이 그대로 지나가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영은 담임이 조회를 뺀 이유가 중간고사 준비 때문에 바빠서라는 말을 깨닫고 우중충한 기분으로 수업을 들었다. 평소에도 성실하게 공부하는 찬희가 딱 이 시기마다 부러웠다. 충격을 받으면 항상 그렇듯이 하영은 오늘 하루 만큼은 열심히 공부했다. 7교시와 보충 수업까지 끝마치자 아이들은 썰물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종례시간에 담임이 ‘시험기간까지 원하는 사람은 비**자라고 해도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해도 된다’는 공지를 전했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보였다. 고3을 겨우 한 학기 앞둔 2학년 교실의 실태였다. 저쪽 명문고는 1학년부터 예외없이 밤 10시까지 잡아둔다던데, 하영은 릴라고등학교가 덜 명문고인 것에 감사했다. 교실에 남아있는 사람은 열 명도 안되었다. 시험공부는 내팽개치고 놀러간 애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사실 일부는 학원이나 도서관으로 갔을 것이다. 하영과 찬희는 오늘 도서관 행이었다. 하영은 주섬주섬 공부할 책들을 가방에 집어넣고 나갈 준비를 했다. 막 일어서려는데 집에 간 줄 알았던 아름이 두 사람의 곁으로 걸어왔다.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러면서 아름은 찬희를 보았다. 하영이 말했다. “해. 나에 대한 얘기면 찬희가 못 들을 건 없어.” 셋은 함께 교실을 나왔다. 하교생 군단이 빠져나가고 운동장은 서서히 한산해지고 있었다. 운동장 구석에 각자 기대고 서서 아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한테 물어볼 거 없어?” “있다고 해야 되는건가.” 하영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안물어보면 나야 좋지! 하지만 그럴 리 없으니까, 누군 하루종일 뭐라고 설명을 할 지 고민하고 있는데 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갈 생각을 했니?” “집 말고 도서관 갈거야.” 담벽에 기대 둘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찬희가 한숨을 쉬었다. 아름이 화가 나서 하영을 노려보았다. 하영은 멋쩍은 듯 뺨을 문질렀다. 빙빙 돌리며 남의 속을 긁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초등학생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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