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네, 형. 네. 동해요. 네. 네."
햄릿의 전화소리에 나도 잠에서 깼다.
-"잘 잤어?"
"응. 너 눈 팅팅 부었다."
-"누나도."
"아... 못생겼어."
-"내가?"
"아니, 내가. 더 못생겨졌어."
-"이뻐."
"고맙다."
햄릿은 나의 말에 미소를 되찾았다.
-"집에 갈 거야?"
"응. 너도 가야지."
-"응. 가야지."
"나 정류장에 내려주라."
-"터미널까지 가. 나도 지나는 길이야."
"그럼 고맙고요."
둘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터미널까지 왔다.
대화는 무의미했다.
이유는 달랐지만, 일출을 보며 흘린 눈물이 우리 둘 스스로의 속내를 까발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짜 고마워. 덕분에 성덕됐다."
-"나야말로 고마워. 재밌었어."
"잘 가. 앞으로 잘 부탁해."
-"나도. 잘 부탁해."
나는 번호도 물어보지 않고 쿨하게 차에서 내렸다.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나에게는 어느 겨울밤의 꿈이었으니까.
햄릿은 멀어져 가는 나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핸들을 돌리다가 멈춰 섰다.
햄릿은 차를 세워두고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누나!"
햄릿의 목소리에 나는 멈춰 섰다.
환청이 들리나 이제? 미쳤구나, 네가?
-"누나!"
환청이 아니었다.
햄릿은 모자도 쓰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얘가 미쳤어!"
나는 급하게 자신의 모자를 햄릿에게 씌웠다.
-"어차피 몰라."
"웃기시네. 빨리 가!"
-"사진도 못 줬는데."
"무슨 사진? 우리가 찍은 사진이 없는데."
-"내가 누나 찍은 사진."
"도촬이냐? 복수라면 관둬라. 난 너 도촬 한 적 없다."
나의 말에 햄릿과 웃었다.
-"이뻐서 찍은 거. 휴대폰."
"지금 주게?"
-"지금 못 줘."
"그럼 왜?"
햄릿은 나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가로챘다.
-"번호 따갈라고."
"헐..."
-"자! 전화할게. 잘 가."
햄릿은 자신의 번호를 남긴 휴대폰을 다시 쥐어주고는 모자를 벗어 나에게 씌웠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휙 사라졌다.
"진짜 꿈인가...?"
꿈이라기엔 휴대폰에 남은 번호가 너무 선명했다.
기차 안에서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어제 하루 내내 있던 일을 곱씹어보아도 이것이 진정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햄릿은 순식간에 서울까지 달렸다.
숙소에 거의 다 와갈 때쯤, 문자 하나가 왔다.
[집 도착. 오버]
햄릿은 그 문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독특해."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집 도착. 라져]
나는 그 문자에 더 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장된 이름에 갸웃했다.
"짱팬? 하... 짱팬이 뭐냐, 짱팬이. 아재냐?"
햄릿이 나의 휴대폰에 저장한 자신의 이름은 누나 짱팬.
촌스럽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지울 수는 없었다.
한편 햄릿의 휴대폰에 저장된 나의 이름은 '아뜨뜨더치페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추억은 한 겨울밤의 꿈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그녀가 사랑을 거부하는 이유-
"저, 오늘 마지막 날이에요. 다행이네요. 얼굴 보고 인사는 하고 가서."
나는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스물한 살이 된 편의점 사장 아들은 주민등록증이 나오자마자 면허를 따서 시커먼 아버지의 세단을 운전하고 다녔다.
"집까지 태워드릴게요."
-"아니에요. 가게는 어쩌고요. 고마웠어요."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얼굴도 환했고, 키도 훤칠했고,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나와 같은 학교는 아니어서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리고 5분 정도 걸어갔을까?
모르는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저, 편의점 사장 아들...인데요. 자리에 충전기 두고 가신 것 같아서요."
"응?"
나는 가방을 열어 확인했고, 그건 내 것이 아니었다.
"그거 제 것 아닌데?"
-"아, 그래요? 그렇구나... 혹시나 해서."
"고마워요."
-"저기, 오늘 아버지가 일찍 문 닫으라고 하셔서 집에 가려는 데, 멀리 안 가셨음 태워드릴게요. 거기 길 많이 어둡던데."
나는 눈치 챘다.
아, 얘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게로구나.
그 날 나를 데리러 온다는 녀석의 차를 타고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세단은 우리 집 바로 앞에 나를 내려다 주고 갔고, 우리 집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학교에서 마치는 길에, 세단이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에서 거리가 있는 곳에서 차를 타고 데이트를 갔다.
영화도 봤고, 그냥 산책도 하고, 도서관도 자주 갔다.
전형적인 데이트였다.
아는 사람을 만날 위험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내가 아는 동기들은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고, 차를 타고 이동하는 우리는 마주칠 일이 잘 없었다.
-"나 영장 나왔어."
"그래?"
사귀기 전, 나는 절대 고무신은 신지 않겠다고 선포했었다.
우리는 애초에 시한부 연애를 시작한 셈이었다.
세단도 동의했고, 우린 재미있게 만났다.
마치 드라마 속 ‘암 말기입니다’ 대사처럼 날아온 군대 영장으로 우리의 연애는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약속했잖아."
-"응."
"나도 힘들어."
-"그렇지만, 누나가 기다릴 순 없으니까."
"힘들 텐데, 미안해. 이해해줘서 고마워."
단칼에 헤어진 우리는 각자의 길로 갔다.
그리고 세단이 군인이 된 지 100일 정도가 채 되지 않던 어느 날, 아주 긴 번호가 찍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음악소리가 마치 클럽과 같은 레스토랑에 대학 동기들과 함께였는데,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뭐냐?"
숨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전화를 하자마자 대뜸 신경질적인 뭐냐라는 물음에 내 미간이 구겨졌다.
"잘 지내고 있어?"
-"잘 지내는 것 같네."
"응..."
-"그래?"
"너는?"
-"잘 지내겠냐?"
참으로 신경질적인 말투에 내 속에서 붉은 불구덩이가 솟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잘 돌지 않던 피가 시속 120킬로로 회전 중인 듯했다.
"무슨 일 있어? 많이 힘들어?"
-"힘들지. 난 군대에 있는데, 일방적으로 이별통보도 받고."
"뭔 소리야, 일방적이라니. 합의하에 헤어진 거잖아."
-"그게 합의한 거냐?! 네가 이기적으로 밀고 간 거지!"
"네가 나 기다리지 않았으면 했잖아."
-"기다린 듯이 덥석 물 줄 알았냐?!"
"그래! 내가 이기적으로 물었다! 저녁 6시가 넘어서 대뜸 전화해서는 스트레스 푸는 놈을 내가 기다리겠냐?!"
-"이거 봐. 하~ 싹수없는 년."
"뭐?! 년? 내가 알던 사람 맞아?!"
-"네가 뭘 알아!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참자, 참자, 군 생활이 얼마나 힘들면 그 착한 사람을 이렇게 버려놓을까.
꾹 참고 애써 말했다.
"군 생활이 많이 힘든 것 같은데, 진정하고. 다음엔 전화 안 줬으면 좋겠다. 아까운 시간, 부모님한테 전화드려."
-"아, 이런 씨---"
더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군 전화에 대고 퍼붓는 상대에게 나는 대책도 없이 맞고 또 맞았다.
"끊는다."
나는 손이 떨려서 휴대폰을 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황망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전화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이 하필 거울로 적나라하게 보였다.
다행히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 아래 맨홀 뚜껑에 겨우 버티고 서 있는데, 도움을 청할 사람들이 밖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먼저 친구 K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친구는 답이 없었다.
나는 애써 진정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K가 눈치 없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나에게 물었다.
"왜?"
나쁜 년.
솔직하게 털어 놓을 거면, 너한테 따로 연락을 했겠냐?
나는 내 입으로 그 자리에서 내가 당한 폭력을 모두 털어놓았다.
"또 전화 오면 바꿔. 내가 전화 받을게."
남자 동기가 멋있는 척을 하며 내 보호자인 냥 말했다.
고맙진 않았다.
나는 또 홀로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딱 기다려. 곧 100일 휴가니까."
세단은 우리 집을 알았다.
내가 어디로 피할 곳도 없었다.
설마 하니 찬란한 장래를 앞에 두로 허튼짓을 하려나 싶지만, 난 세단의 그림자만 마주해도 힘들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당할 것 같은 공포감.
그 날이 다가올수록 공포는 짙어졌고, 내 구조 문자에 아무렇지 않은 듯 여기는 친구에게도 공포를 털어놓을 순 없었다.
한 사람. 동기이긴 하지만 한 살 오빠가 내가 염려되었는지, 자신의 집 방향도 아닌데 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내렸다.
말은 안 해도 은근히 걱정은 된 것이었다.
아마도 그때 이후였던 것 같다.
시간이, 사랑이, 한 사람을 잊는데 걸리는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것이 친구던 애인이던 가족이든 간에.
사랑이라는 건 짧고 달콤할수록 깊은 상처는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내 사랑은 몇 번이고 그런 트라우마를 반복했고, 생채기를 냈다.
더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
***
-그 남자가 주춤하는 이유-
하고 싶은 것은 무궁무진했다.
문신도 멋있어 보였고, 명품도 멋져 보였고, 신념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사람들도 멋있어 보였다.
나는 아직 어렸고, 내가 겪은 세상은 함부로 겪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으며, 지금은 나만이 겪는 일이었다.
나는 남들이 마시는 평범한 공기보다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구름 위의 공기를 먼저, 더 오래 마셔왔다.
어떤 백신도 가지지 못한 채, 온갖 균들에 마주하는 공포를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남들이 나라는 사람에게 세운 기준이 진짜 나와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의 괴리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너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래! 우리 막내 하고 싶은 거 다 해. 형은 막내 편이야."
형들의 지지가 있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그런데, 나의 팬들은 달랐다.
"그거 왜 했어요?!"
"머리 잘라!"
"보기 싫어!"
"당장 없애!"
"하지 마! 너한테 안 어울려."
"걔랑 만나지 마."
엄마가 아이를 감싸고 돌 때나 하는 말이라고 들어는 봤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거 하지 마라.
누구 만나지 마라.
이거 해라.
이런 사람만 만나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유리관 속의 인형처럼 살아가라는 것이 그들이 나에게 쓰는 돈과 애정의 대가였다.
평범한 나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아주 잠깐의 경험뿐, 다시 하늘 높이 떠 있는 햄릿의 삶이 99퍼센트인 삶을 살아야 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일부러 엇나가고 싶었다.
그가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햄릿에게서 나를 떨어뜨리고 싶을 만큼.
언젠간 그 존재를 내 손으로 없애고 싶을 정도로.
"보지 마. 너는 네가 생각한 기준대로 너대로 살면 되는 거야."
"형... 모르겠어요. 내가 생각한 기준이 애초에 없었는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답이었다.
"우린 대다수의 우리 또래가 하는 생활을 하면서 살 수 없어. 이 길에 들어섰고, 너무 많이 올라왔잖아. 어쩔 수 없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공간 안에서 최대한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어. 형도, 그걸 찾으면서 돌아다닌 거야."
"나도 여행을 좀 가야 하나?"
"그니까. 같이 가자니까 싫다 그래 놓고."
"담에 같이 가요, 형."
"진짜지?"
아니.
난 그때 또 방구석은 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고 있을 거다.
내가 찾은 답은 딱 하나였다.
세상과 단절하는 척하며 사는 것.
매일 같이 쏟아지는 수없는 악플들을 읽고, 기사를 읽고, 영상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나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마치 세상과 동떨어져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빠 그거 알아요?"
"오빠, 요즘 이게 유행이라는 데 어떻게 생각해요?"
"이거 봐요! 이런 기사가 떴어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은 기사에는 좋아했고, 나쁜 기사에 분노했고, 악플에는 함께 총칼과 같은 말로 맞춰 싸우고 있었다.
"하..."
나는 태블릿을 침대에 던졌다.
화면이 픽 하고 꺼졌다.
나도 침대 위로 내 몸을 던졌다.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 같아.
"운동이나 할까?"
오늘은 운동에 집중도 잘 안됐다.
계속 자세가 흐트러졌다.
"다시! 팔 고정하고! 오늘 왜 그래? 딴생각하지?"
"머리가 복잡해서."
"집중해. 운동할 때는 운동 생각만 해."
그게 안 되는 날이 있다.
특히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포로 느껴지는 그런 날.
"꿈이어도 좋았어요."
왜 그 말이 갑자기 떠오른 걸까?
그 말이 난 듣고 싶은 거였다.
그리고 그 꿈같은 하루를 또 보내고 싶어 졌다.
운동을 끝내고 나온 후, 휴대폰을 뒤적였다.
뭐라고 저장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진짜 기역부터 찬찬히 다 뒤졌다.
저장된 사람도 많이 없는데 왜 이렇게 찾질 못하겠지?
"오케이."
딱 세 글자가 보였다.
아뜨뜨.
유치해.
어쩌다 이렇게 이름을 저장했지?
근데, 본명이 뭐라고 했더라....?
아뜨뜨 라고 부를 순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