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울고 싶으면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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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대 앞에 아무도 없게 되자, 서훈은 유영에게 손짓하며 이쪽으로 오라고 신호했다. 유영은 계산대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열었다. "포장 박스는 여기 다 있어요." 그는 포장 박스들을 훑어보았다. 모든 박스가 깨끗하고 온전했다. '참 꼼꼼하기도 하지.' 서훈은 포장 박스를 집어 들고 하나하나 바코드를 스캔하면서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 서훈의 손동작이 순간 멈췄다. "친구 있어요?" "있어요." 유영은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비를 걸거나 비꼬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기에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 서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분명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친구 없어 보이나? 내가 친구 못 사귀는 사람처럼 보이나?' 유영은 기분 나쁜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나 친구 많아. 제일 친한 친구랑은 15년이나 알고 지냈는걸." "아." 그의 말투에는 "그렇군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은 이미 모든 포장 박스의 바코드 스캔을 마친 상태였다. "2만 7천원입니다." 유영은 휴대폰 결제 화면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때,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곳은 집에서 매우 가까웠고, 그녀는 비를 맞으며 뛰어서 집에 가려고 했다. 서훈 우산을 빌려주겠다는 말도, 그녀를 붙잡지도 않고, 그저 팔짱만 낀 채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영이 두 걸음 뛰쳐나갔다가 재빨리 돌아와 보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그가 있었다. 빗줄기는 거세졌고, 머리에 부딪히는 빗방울에 따가울 정도였다. '괜히 오기 부리다가 이 고생이지.' 그녀는 이미 그에게 비웃음을 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굽혀 계산대 뒤에서 우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전에 그에게 주었던 우산과 똑같은 우산이었다. "똑같은 걸로 사서 돌려주겠다고 했잖아." 서훈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 유영은 우산을 받아들자마자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우산 손잡이의 감촉이 달랐다. '진품이 아니야.' 그가 모르고 가짜를 샀거나, 아니면 일부러 가짜를 사서 자신을 속이려 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유영은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창민에 대한 그의 의리를 생각하면, 그가 가짜를 사서 자신을 속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응." 유영는 자신의 발견을 숨기기로 했다. 우산 하나 때문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리고 있어서 문가에 서서 비가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슈퍼마켓 입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잠시 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박준상은 서훈에게 전화를 걸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오늘 밤에는 손님이 더 이상 없을 것 같다며 일찍 문 닫고 퇴근하라고 했다. 비가 조금 잦아들자 그 문을 닫고 유영과 함께 마트을 나섰다. 두 사람은 각자 우산을 쓴 채 좁은 골목길을 나란히 걸었다. 유영은 불쑥 그에게 물었다. "아까 왜 나한테 친구 있냐고 물어봤어?" 서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산이 머리 위의 불빛을 가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는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 지는 것도, 폐 끼치는 것도 싫어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고..." 점점 차가워지는 그녀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계속 이어갔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지." 유영은 우산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고, 하얗고 예쁜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모습에 서훈은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참 후, 유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아무런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봐."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고, 눈에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듯 당황함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됐는데도, 계속 말하라니. 힘만 센 게 아니라 성격도 황소처럼 고집 세네.' 서훈은 귀찮다는 듯이 들고 있던 우산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더 이상은 싫은데." "듣고 싶어." 그녀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 서훈은 잠시 침묵했다. "자기 방어는 사실 개인이 겪은 좌절이나 상처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방어 기제야. 어느 정도 누적되면 자신이 상처받을 수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기 방어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거지. 예를 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서 오가는 감정적인 교류를 거부하는 거처럼." 그는 말하면서 유영의 표정을 살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기에 그의 시야에서는 그녀의 솜털 같은 정수리만 보였다. 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유영은 예의 바르고 싹싹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여린 구석이 있는데, 이런 말들이 지금의 그녀에게 좋을 리 없었다. 아마 또 속으로 끙끙 앓으며 온갖 생각을 할 것이다. 어느새 유영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고, 서훈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다 왔어." 유영은 못 들은 척 계속해서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두 걸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강..." 그는 그녀의 이름을 채 다 부르기도 전에 말을 멈췄다. 유영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서 있었지만,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꾹 참고 있는데,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리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까칠하게 굴더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우는 거야?' 그에게 여자를 달래 본 경험은 없었다. 서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소매를 끌어당겨 유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렀고, 그녀의 하얗고 보드라운 얼굴을 혹시라도 쓸릴까 봐 조심스럽게 손길을 움직였다. '아, 오늘 나올 때 휴지를 챙겨 왔어야 했는데.' 그런데 그가 닦으면 닦을수록 눈물은 더 많이 흘러내렸다. 서훈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는 지금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만약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절대로 참고, 그녀가 듣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리다.' 계속해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유영을 보며, 서훈의 마음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슬퍼 보이는데, 울음소리조차 꾹 참고 있네. 저렇게 여리고 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참을 수 있지?'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낮고 부드럽게 들리도록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요." 서훈의 말은 마치 그녀의 어떤 스위치를 누른 것 같았다. 유영은 손을 놓고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더니 작은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예전에 윤희정이 그녀를 버리고 경양을 떠났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희정이 그녀를 사랑하고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해가 갈수록 기다렸다. 철이 들 무렵, 주변 또래 친구들 중 누구의 엄마도 윤희정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고, 자신의 어머니는 어쩌면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었고, 윤희정에게 입원 치료를 받으라고 애원했고, 자신을 한 번이라도 더 봐달라고 애원했다. 희정이 입원 치료를 거부했을 때, 유영은 지난 10년간의 기다림과 기대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때 생각했다, 괜찮다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윤희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고. 윤희정이 죽었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훈의 말은 그녀를 깨어나게 했다. 윤희정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그녀에게 끼친 영향의 시작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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