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은 유영의 손에서 떨어진 우산을 받아 들었다. 그는 팔을 뻗어 말없이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반 아이들 대부분보다 키가 컸지만,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우는 모습은 그저 작고 연약한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서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위로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수렁이 있는 법이다. 그는 자신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처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빗소리와 함께 소녀의 울음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주위는 고요해졌고,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너..."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서훈에게 닿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는 그녀에게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정하게 흘러나왔다.
"나 좀 일으켜 줄 수 있어?"
유영은 고개를 들었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쉰 상태였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조금 멋쩍은 듯 덧붙였다.
"다리가 저려서..."
서훈은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우산을 내려놓고,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유영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고,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일어서자, 그는 손을 놓고 팔을 내밀었다. 다리가 저려 서 있기 힘든 유영은 곧바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균형을 잡고 나서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고마워."
서훈은 그녀의 어색함을 눈치챘고,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문제 다 풀었어?"
유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오늘 거는 다 풀었어."
학교에서는 마지막으로 방학 분위기를 느껴보라며 주말 동안 학교 수업은 쉬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집과 숙제는 줄어들지 않았다. 방학이나 방학이 아닌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적응 잘하는 것 같네."
유영은 잠시 생각한 후에야 그가 그녀가 새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라는 걸 알아챘다.
"전에 다니던 학교는 숙제가 이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늘 여러 학원을 다녔어. 수업이 많은 날에는 밤늦게야 집에 들어갔지."
그녀는 그의 팔에 기대고 있던 손을 놓았다. 서훈은 아무렇지 않게 팔을 내렸다.
"난 아직 숙제 안 했으니까, 먼저 갈게."
요 며칠 강유영이란 사람과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유영는 이쯤에서 분명 고맙다는 말을 할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에 질릴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유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돌아서서 걸어갔다. 유영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닥에 놓인 우산을 집어 들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이미 멀리 걸어갔던 서훈은 그때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유영은 그날 밤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밤새도록 꿈을 꿨다. 꿈에는 온통 윤희정 뿐이었다. 희정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고, 대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공인하는 캠퍼스 여신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람둥이 강태수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녀를 쫓아다니며 결혼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영의 꿈에 나타난 희정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희정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똑같은 말을 섬뜩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나는 네 엄마야.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집 안은 마치 찜통처럼 뜨거웠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확인해 보고 나서야 정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어컨은 이미 작동을 멈춘 지 오래였다. 유영는 창문을 열었다. 바깥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그녀는 창턱에 기대어 바람을 쐬며 정신을 차렸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들 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그녀는 아래층 골목길에서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서훈이 가방을 메고 이어폰을 끼고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저렇게 일찍 어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걸까? 곧이어 유영은 어젯밤 그의 앞에서 엉엉 울었던 일이 떠올랐고,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진짜 창피해 죽겠네!
서훈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텅 빈 창턱만 보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길거리 공사 인부들이 땅속에 묻혀 있던 전선을 건드리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이 거리는 정전이라고 했다.
이런 날씨에 에어컨도 못 틀고, 저러다 제 짝꿍이 더위 먹는 건 아닐까?
다음 순간, 그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유영도 얼추 다 큰 성인인데, 날씨가 더운데 정전이 됐으면 알아서 방법을 찾겠지. 왜 내가 나서서 걱정하는 거지? 서훈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는지 노래도 듣지 않고 이어폰을 확 빼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영은 한참 동안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창문 밖을 내다보며 골목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방금 너무 겁먹었던 건가?
숨을 게 뭐가 있다고?
고작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짝꿍 앞에서 한 번 운 것뿐이잖아!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설마 임서훈 그 자식이 날 놀리기라도 하겠어?
만 만약에 그가 날 놀린다면... 그땐, 한 대 때려주면 되지.
…
오후가 될 때까지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유영은 문제집과 연습장을 챙겨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방금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근처에 KFC 매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그곳에 가서 에어컨 바람을 쐬기로 했다. 매장에 도착한 강유영는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주문하고, 가방에서 문제집과 연습장을 꺼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몇 문제 풀지 않았을 때, 옆쪽에서 너무나 익숙한 사람의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8 더하기 7은 대체 몇이야?"
유영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서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옆에 앉은 남자아이가 손가락으로 답을 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깊은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언제든 주먹을 날릴 준비가 된 듯한 험악한 표정이었다. 남자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14!"
서훈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표정이 평온을 되찾은 상태였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너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다녀와서 콜라 사줄게."
임서훈은 평소에 다혈질적인 성격이었지만, 지금 남자아이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콜라라는 말에 남자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응!"
유영은 서훈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문에 화가 나서 주먹까지 꽉 쥐었던 그의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형, 저기 예쁜 누나가 형 쳐다보고 있어!"
남자아이는 눈치가 빨랐고, 유영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서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유영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미처 지우지 못했다. 상대방에게 웃는 모습을 딱 걸린 그녀는 오히려 더욱 대담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훈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언제 왔어?"
"좀 됐어."
"……"
서훈은 침묵했다. 초등학생에게 8 더하기 7이 15라는 것을 가르쳐줄 수 없었던 자신의 흑역사가 결국 들통나고 말았다. 유영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참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뭘 그렇게 웃어? 잘났으면 네가 가르쳐 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