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스캔해서 돈을 **했다. 기계에서 영수증이 나오는 소리가 났다.
유영은 짐을 챙겨 식당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보니 서훈도 따라오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그는 말하는 동안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준상 마트에는 언제 다시 출근해?"
"금요일 저녁에."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마트에 사람이 많아서 박 사장님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내 계산 좀 해줄 수 있어?"
"?"
"사장님이 나한테 문구류를 주셨는데, 돈을 안 받으셔서."
사장님은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해서, 그녀는 그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에 서훈도 박 사장님이 그녀에게 문구류를 준 일이 생각났다.
"그럼 금요일에 마트으로 와."
"고마워.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가 성큼성큼 급하게 걸어가자 유영은 종종걸음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서훈은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먹어."
이 새 친구는 정말 신세 지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마침 길가에 작은 매점이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유영은 말을 마치고 매점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샀다. 작은 골목길에 있는 매점이라 아이스크림 종류가 적었는데, 가격표를 보니 가장 비싼 것은 7000원이였다.
서훈은 고개를 살짝 돌려 유영이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 바구니에서 두 개를 집어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꽤 통이 크네.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함께 황각로에 들어섰다. 어둑한 불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발걸음을 맞추어 걸을 때면 그림자도 함께 겹쳐졌다. 두 사람은 모두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 집중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영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서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구르트 고마웠어."
서훈은 뒤돌아보지 않고 손만 들어 올려 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낡은 집들이 늘어선 어두컴컴한 골목길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 순간 유영은 그의 그런 뒷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 …
다음 날,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개학 후 첫 시험을 맞이했다. 마지막 시험에서 유영은 시험지를 먼저 제출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에 있던 서훈도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시험지를 제출하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유영이 먼저 가도록 양보했다. 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험지를 제출하는 것뿐인데, 뭘 하라는 거지? 내가 마치 무례하게 구는 것처럼 보이잖아.
유영이 움직이지 않자 서훈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조차 이유를 모르는 그들만의 대치 상태에 빠졌다.
감독관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강유영, 임서훈, 너희 둘 뭐 하는 거야?"
다른 학생들도 모두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유영이 먼저 교탁으로 걸어갔고, 서훈은 바짝 뒤따랐다. 교실 밖으로 나온 유영은 그를 계단 입구에 막아섰다.
"너 아까 무슨 뜻이었어?"
서훈은 여학생에게 가로막힌 것이 처음이라 신선하다고 느꼈는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라고."
"그럴 필요 없어."
"아, 그럼 점심시간이나 저녁 방과 후에 밥 먹으러 갈 때도 굳이 네가 먼저 갈 필요 없다는 거지?"
"……."
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문제 푸느라 머리를 너무 써서 그런지, 요즘 유난히 쉽게 배가 고파져서 시간이 되면 밥부터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유영은 심호흡을 하고 마지못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서훈은 그녀를 따라 마지못해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만에."
"……."
… …
저녁 식사 시간, 유영은 여전히 가장 먼저 식당으로 달려갔다. 오늘 시험 때문에 다들 긴장했는지 그녀를 구경할 여유가 없었고, 모두 시험 이야기로 수군거렸다. 평소 같으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지창민마저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는 친구가 많아서 남녀 학생들을 데리고 와 유영과 합석했다.
창민은 밥을 한 숟가락 떠먹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유영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한숨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입맛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유영은 고개를 들어 창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시험 잘 못 봤어?"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방금 답 맞춰 봤는데, 하나도 안 맞아."
유영은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어쩌면 걔네가 다 틀렸을 수도 있잖아?"
옆에 있던 수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반장이랑 답 맞춰 봤대."
"……."
유영은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연민을 가득 담았다. 앞서 치른 몇 과목 시험이 끝났을 때, 그녀는 많은 학생들이 반장을 찾아가 답을 맞춰보는 것을 보았다. 아마 반장은 공부를 꽤 잘하는 모양이었다. 창민이 반장과 답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답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영의 침묵에 창민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나 이번에도 꼴찌하면 우리 아빠가 나 진짜 죽일 거야!!!"
옆에 있던 아이들이 달래기 시작했다.
"설마, 그래도 네가 자식인데, 아버지가 목숨만은 살려주시겠지."
창민은 주먹을 쥐고는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유영은 매우 진지하게 제안했다.
"너 서훈이한테 과외 받는 게 어때?"
수지는 그녀에게 서훈이 전교 1등이라고 말해 주었다. 서훈이와 창민이는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서훈은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느라 시간이 없을 것이다. 유영은 자신이 말을 꺼내자 모두 침묵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몇 초 후, 모두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창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한테 맞아 죽거나 형한테 맞아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차라리 아빠를 선택하겠어."
"푸하하하하하하—"
모두 더 크게 웃었다.
수지는 웃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전에 서훈이가 창민이 과외해 준 적 있는데, 문제 하나 이해 못할 때마다 창민이를 한 대씩 때렸거든. 그때 교실에서 다들 봤어… …."
유영은 그 장면을 상상해 보더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서훈이라면 그럴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훈이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그에게 문제를 설명해 주었다니, 의리가 있는 친구였다. 유영은 웃음을 멈추고 창민에게 말했다.
"열심히 복습하고, 문제 많이 풀면, 분명히 성적 오를 거야."
창민은 감동받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나 진짜 열심히 복습하고 문제 많이 풀게!"
새 친구는 정말 얼굴도 예쁜데 마음씨도 착했다.
다음 날은 금요일이었다.
유영은 방과후 집에 가는 길에 준수 마트을 지나갔는데, 마트 안에 손님이 거의 없었고, 서훈은 계산대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거래명세서를 보고 있어서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와 받았던 문구의 포장 상자를 가득 담은 채 슈퍼마켓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슈퍼마켓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유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산대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손님이 없을 때 서훈이 시간이 나면 계산을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다. 유영은 줄을 서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계산대 앞에 줄이 점점 줄어들고 나서야 서훈은 유영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발견한 것을 알고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말했다.
"먼저 일 봐."
서훈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손놀림을 빨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