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아이들이 떠들며 교실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의 움직임에 태범은 울상을 유지한 채 교사 화장실로 들어갔다. 태범이 들고 있는 쇼핑백에는 도대체 아이들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여자 교복이 들어 있었다. 이런 걸 앞으로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진지하게 진로를 다시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갈아입은 태범은 정말 울고 싶었다. 다리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바람에 어찌 할 바를 몰랐고, 상의는 왜 이렇게 타이트 한지 단추를 잠긴 커녕 어깨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런 추억이라면 남기고 싶지 않은 태범은 그냥 다시 여자 교복을 벗고 원래 입고 있던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느라 시간을 보낸 태범이 운동장으로 급히 나가보니 아직 체육대회를 시작하기 전이었는지, 아이들이 운동장에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태범은 3학년 8반 쪽에 붙어 섰다.
"어? 쌤, 왜 안 갈아 입으셨어요?"
수혁의 물음에 태범은 뻘쭘 하게 웃었다. 너희가 제 정신이라면 나에게 그 옷을 주는 건 맞지 않는단다. 마침 옷을 갈아입은 이솜이 8반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큰 농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흰색으로 되어 있는 유니폼은 이솜에게 매우 잘 어울렸다. 게다가 헤어밴드까지, 정말 완벽했다.
"엥?“
"왜 쌤이 유니폼이야? 교복 아니었어?"
웅성대는 소리에 태범이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태범과 이솜의 쇼핑백이 바뀐 듯싶었다.
태범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이야, 애들이 날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어. 속으로 울음을 삼킨 태범이 살짝 웃었다.
그 때, 교장선생님이 나오면서 체육 대회를 즐기라는 말을 장장 10분에 걸쳐 이야기를 했다.
지루해 하는 아이들을 눈치 챈 부장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을 말리면서 훈화가 일단락되었다.
진우의 호령에 맞춰 준비 운동을 간단히 하고 나서 운동장 한 곁에 준비 된 자리에 팀을 맞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주변을 둘러봤다.
"쌤, 여고는 왜 안와요? 여고랑 같이 하는 거잖아요.“
"점심 먹고 같이 한다고 교장 쌤이 말씀 하셨잖아.“
"아……."
너무 들뜨기도 했고 훈화가 지겨워 교장 선생님의 말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은 아이들이 이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까지는 3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 때, 구령대에 잔뜩 신이 난 진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아- 일단 몸 풀기 게임으로 OX 퀴즈를 시작하겠습니다. 최후의 1인에게는 바나나 사의 최신 패드가 주어집니다!"
아이들은 진우의 말에 콧김을 뿜으며 재빠르게 운동장으로 모였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우월감을 느낀 진우는 핫핫 거리며 웃었다.
10번째 문제까지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풀 수 있는 문제로 이뤄져 있었다. 이미 패드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나 흥미가 없는 아이들은 일부러 틀린 답을 골라 탈락 했다.
"자, 11번 문제입니다. 지금 문제부터 난이도가 좀 올라가요. 우리 학교에서 다섯 번째로 어린 선생님은 한진우 선생님이다. 맞다고 생각하면 O 쪽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면 X로 가 주세요. 제한 시간 10초!"
아이들은 웅성댔다.
액면가로 보면 O가 맞는데 하는 짓은 X였다. 하는 짓이 이솜보다 훨씬 어려보였으니.
혼란스러운 학생들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반이 나뉘어졌다.
그 때, X쪽에 서 있던 한터가 나머지 8반 아이들에게 부르짖었다.
"여기야! 백퍼 X야!"
한터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도 8반은 꿋꿋하게 O 쪽에 서 있었다. 기찬은 한터에게 잘 가라는 듯 손 인사를 했다.
"정답은 O입니다!“
"아니, 진우 쌤이 5번째로 어리다고?"
맞은 아이들도, 틀린 아이들도 충격으로 가득 찼다.
정답을 맞춘 아이들은 호응을 일절 하지 않았다.
한터는 시무룩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패드가 자신의 것이리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8반자리에 있던 이솜은 한터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위로 해 줬다.
그 모습을 본 도준의 눈이 번뜩 뜨였다. 생각 해 보니 선생님들은 각 반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8반 자리엔 도준과 이솜이 있는 것이었다.
자리를 이탈하고 그냥 들어갈까 도준이 고민 했다.
"12번 문제는 한이솜 선생님 문제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오는 진우의 목소리에 도준은 일단 운동장에 남아 있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리 학교 인기인 솜 쌤은 올해 22살이 되었는데요, 솜 쌤의 손가락에는 점이 있습니다."
인기인 인데다가 나이와 손가락의 점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아이들은 침착하게 진우의 말을 기다렸다.
"그 점은 왼쪽 손에 있다. 맞으면 O, 틀리면 X!"
아이들은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의 신체 부위에 찍힌 점까지 알아야 하나 자괴감까지 들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리 속에 박힌 바나나 사의 패드는 아이들의 발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도준은 심각했다. 여기에서 틀려서 탈락하게 되면 이솜에게 점수를 깎이는 격이 되는 것이었다.
이솜도 8반 아이들에게 나름 기대 했다. 꼼꼼하게 보지 않으면 모를 손가락에 있는 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자- 3, 2, 1! 그만! 움직이지 마!"
꽤 많은 아이들이 X쪽에 서 있었다. 진우는 그 모습을 보며 신나게 웃었다.
"정답은 O입니다!“
"와아아악!!!"
정말 많은 아이들이 이번 문제에서 탈락했다.
자리로 들어가면서 이런 문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진지하게 고민 하는 아이들까지도 생겨났다.
도준은 어영부영 O에 있다가 얼떨결에 정답을 맞혔다. 뒤를 돌아 이솜을 보니 이솜은 도준에게 관심은 하나도 없고 탈락해서 시무룩하게 앉는 아이들을 위로 해 주기 바빴다.
도준은 볼에 바람을 넣었다. 나는 맞췄는데.
결국 OX 퀴즈는 1학년 3반 아이가 1등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평소에 패드를 가지고 싶어 했는지 최후의 1인이 됐을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다음 종목으로는 남자들의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반 대항 줄다리기였다.
출전 선수가 20명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힘이 센 사람들 위주로 나왔다.
8반에서 힘이 센 사람 중 한명이었던 도준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줄 옆에 서 있었다.
줄을 잡으라는 소리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던 도준은 뒤에서 들리는 아우성 소리에 조심스럽게 줄을 잡았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한복에 목장갑을 낀 도준의 장착에 이솜이 웃음을 터뜨렸다.
"솜 쌤, 여기 물드세요."
"아, 고마워요."
그 때 태범이 이솜에게 시원한 물을 건넸다. 아이들에게 물 한 병 씩 돌리고 나니 진이 빠지는 듯, 이솜의 옆에 털썩 앉았다.
"남고에서 줄다리기라니.“
“태범 쌤, 남고 나왔어요?“
"네. 남고에서 줄다리기 하면 난리 나요.“
"왜요?”
"보면 알아요."
태범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운동장을 바라봤다.
이솜도 고개를 돌려 운동장에 시선을 뒀다. 정확히 말 하면 한복을 입고 있는 점잖은 도준을 바라봤다.
곧 휘슬이 불며 힘 대결이 시작됐다.
왼쪽, 오른쪽으로 기울던 가운데에 묶인 빨간 천은 점점 8반이 서 있는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 것을 본 학생들은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심판의 판정에 따라 8반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줄다리기에 출전한 아이들이 제 자리에서 콩콩 뛰며 소리를 질렀다. 8반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놀란 이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이거 하나 이겼는데 이렇게 좋아하기 있음……?
줄다리기 최종 우승 반은 2학년 4반이 가져갔다.
3학년 8반도 나름 고전 했지만 체육인들로 가득 차 있는 그 반은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아이들에게 태범이 시원한 물을 건넸다.
"다음 종목은 축구입니다. 결승 축구로 출전하는 학생들은 모두 나와 주세요."
"와- 형 겁나 힘들겠다."
"그래도 형은 운동 꾸준히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이들이 줄다리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또 뛰어 나가는 도준을 보고 걱정스럽게 말 했다.
첫 게임부터 계속 출전하고 있는 도준은 힘들다는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세상 혼자 산다 생각 했다. 저런 얼굴에 피지컬, 높은 성적, 게다가 금수저 집안까지. 사기 같은 캐릭터였다.
심지어 지치지도 않아 보이는 표정에 아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분명 도준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헬창 일 것이라며.
체육대회를 시작하기 전, 토너먼트로 진행 된 축구 대회에서 결승으로 올라 온 홍팀과 백팀이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각 반들이 모여 있어서 눈에 띄게 옷이 조잡 했지만 학교에서 나눠 준 조끼로 색을 나눴다.
"오우, 형님. 선비이신 것 같은데 뛸 수 있으세요?“
"자고로 선비란, 뛰지 않는 법이지.“
"와- 8반 리얼 컨셉충이었네."
도준의 점잖은 말에 같은 홍팀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휘슬이 불기 전, 팀이 서로 마주보고 인사를 하고 각자 포지션에 자리를 잡았다.
곧 휘슬이 불고 축구가 시작되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이라 아이들은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가까이 붙어 축구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훈수를 두었는데 결국 공통 된 말은 '축구를 발로 하냐'. '내가 뛰어도 그것 보단 낫겠다.' 였다.
실제로 축구는 발로 하는 것이어서 그 말이 나오면 질타를 받기도 했다.
한참 설전을 벌이다가 전반전 경기가 끝나기 전, 도준이 한 골을 넣었다.
홍팀에 속한 반은 환호했고, 상대편 팀은 자신의 팀에게 욕을 마구 내 뱉었다.
도준은 세레머니로 이솜을 향해 손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반은 이솜을 향한 진심이었고, 반은 태범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솜의 근처에 있던 많은 학생들이 서로 자신에게 한 것이 아니냐 추측을 내 뱉었지만 도준이 바라보고 있던 것은 이솜 뿐이었다.
이솜도 그 모습을 보고 순간 흠칫 했지만 8반에게 한 것이리라 넘겨짚었다.
하지만 태범은 도준의 속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축구는 도준이 속한 홍팀의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도준이 계속해서 골 행진을 이어간 덕분이었다.
도준은 골을 넣을 때마다 다른 포즈로 이솜에게 하트를 날렸고, 태범은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축구가 끝난 뒤, 급식실에 모여 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어쩜, 도준이는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해?“
"그러게 말이야. 자기, 도준이 봤어?“
"네? 아- 네. 당연하죠."
선생님들 사이에서 식사를 하던 태범이 조용히 밥을 입에 넣었다.
자신도 운동을 잘 해서 이솜에게 어필 하고 싶었지만 상황 상 교사인 태범이 끼어 들 수 없었다.
이솜은 계속되는 도준의 칭찬에 본인이 도준이라도 된 것 같이 민망해졌다.
*
점심시간이 지난 뒤, 남녀고 체육대회의 진정한 의미인 여고 아이들이 남고 운동장으로 몰려들어왔다.
풋풋한 청춘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서로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학년, 같은 반으로 팀을 이루기로 한 두 학교는 팀끼리 자리에 앉혔다.
몇 커플들은 언제부터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는지 구석에서 몰래 조용히 손을 잡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눈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도준의 무리였다.
잘 생긴 5명이 모여 앉아 있는데, 한술 더 떠서 한복까지 입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여고는 주변을 서성거리며 자기들끼리 꺄악 거리고 난리가 났다.
"아- 여고 학생분들 환영합니다. 호칭만 다르고 학교 이름은 똑같으니 같은 학교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하핫! 이번 종목은 2인 3각입니다. 각 팀에서 선수들 나와 주세요!"
남녀고 각 반에서 1명씩 나와 운동장에 섰다.
팀끼리 남녀 짝을 이뤄 두 발목을 하나로 만들었고, 그 결과 첫 만남부터 인사는커녕 발을 맞대어버린 사이가 되었다.
그 중엔 미리 말을 맞춰 놨는지, 커플끼리 참가한 경우도 있었다.
8반에선 한 번도 이름을 적지 않은 수혁이 어쩔 수 없이 출전이 이뤄져 있었다. 여고 8반에서 출전한 하나는 땡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안녕?“
"……안녕."
하나의 반가운 목소리에 수혁도 괜히 밝은 척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 주자였다.
멀리서 재하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표수혁 멋있다, 남자답다! 선비의 힘을 보여줘잉!"
그 목소리에 수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하나의 어깨를 둘러 잡았다.
하나는 갑작스럽게 이뤄진 스킨십에 깜짝 놀랐다. 수혁은 하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곧 우리 순서야. 내 허리 잡아.“
"어?“
"불편하게 뛰려고?“
"아, 아니……."
하나는 수혁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 모습에 8반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잘 생긴 수혁와 예쁘장하게 생긴 하나의 조합은 망상을 일으키기 제격이었다.
수혁은 제 허리를 두르고 옷자락을 꽉 잡고 있는 하나의 작은 손을 힐끔 봤다.
그리고 곧 바톤 터치가 됐고, 두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수혁은 하나의 페이스에 최대한 맞춰주되 뒤쳐지지 않게 적당한 속도로 달렸다.
결승선에 제일 먼저 도착한 팀은 수혁과 하나가 아니라 꽤 오랜 시간 동안 만남을 가져와 호흡 만점이었던 3학년 7반이었다.
아쉽게도 2등으로 들어왔지만 꽤 좋은 성적이라 두 사람은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너 잘 뛴다.“
"고마워. 앗!"
하나는 갑작스럽게 풀린 끈에 따가움을 느껴 말을 하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끈을 너무 세게 묶었는지, 하나의 발목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왜?“
"아, 보건실을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다쳤어?"
"응, 끈에 쓸려서 빨갛게 됐어. 살 까진 것 같기도 하고."
"데려다줄게."
수혁의 말에 하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보건실의 위치를 모르는 하나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수혁은 결국 하나와 동행하기로 했다.
이솜은 발목을 다친 하나를 보건소로 데려다 준다는 수혁에게 알겠다고 했고, 도준은 이솜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