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서 둘이서만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지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이 났다.
태범은 오늘이 나름 각이어서 언제 말을 꺼낼지 재고 있었는데, 불청객의 끼어듦이 마냥 반갑지 않았다.
영화관과 가까운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아 주문까지 모두 마치자 태범은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이 각인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아쉬운 듯이 손을 씻고 있을 때 도준이 뒤를 이어 들어왔다.
도준은 조용히 태범의 한발자국 뒤에 섰다. 도준의 시선을 느낀 태범이 거울로 그를 바라봤다.
"손 씻으려고? 옆에 세면대 또 있…….“
"쌤."
도준은 팔짱을 끼고 일부러 형형한 눈빛으로 태범을 바라봤다. 상영관 안에서 봤던 그 눈빛이었다.
순식간에 맹수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연약한 초식동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태범은 눈을 크게 뜨며 거울 너머로 도준을 바라봤다.
"응?“
"쌤이 좋아하는 사람, 솜 쌤 맞죠."
허를 찌르는 도준의 말에 태범은 재빨리 대답 할 타이밍을 놓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매력적으로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은 어디 못나지 않은 태범이 봐도 참 멋있어 보였다.
도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사연이 잔뜩 있어 보이는 그 모습에 그 누구라도 당장 도준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을 것 같았다.
태범은 몸을 돌려 도준을 마주봤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누군 지 알아요?“
"그, 글쎄…….“
"나도 한이솜 좋아하는데.“
"……뭐?“
"나도 솜 쌤 좋아 한다고요. 그래서 아까 영화관에서 기분 진짜 안 좋았어요."
도준의 선전포고에 태범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태범이 알기론 도준과 이솜은 그저 선생과 제자 사이일 뿐이었다. 졸업을 해야 그나마 태범과 동등 된 위치에서 경쟁이라도 벌일 수 있을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도준은 매우 당당했다.
그 모습에 괜히 기가 죽을 것 같아 일부러 가슴을 더 펼쳐 보았다.
"이솜은 너 남자로 안 볼 걸?“
"쌤도 딱히 남자로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묵직한 팩트에 뼈를 제대로 맞은 태범은 이미 속으로는 눈물을 잔뜩 흘리고 있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태범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건 도준이 아니라 자신이 가깝다고 생각했다.
도준은 저보다 살짝 작은 태범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려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태범은 잡아먹힐 것 같은 그 육식 동물 같은 눈빛이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을 나서니 이제 막 음식이 테이블 위로 세팅이 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태범은 제 앞 이솜의 자리에 있는 스테이크를 보고 썰어주려고 접시로 손을 뻗었다.
"쌤, 저 스테이크 먹어도 돼요?"
그 때, 도준이 재빠르게 이솜의 접시에 손을 댔다. 이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 먹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도준이 이솜에게 예쁘게 웃으며 접시를 가져가 자연스럽게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태범은 도준의 여우 같은 모습에 입술을 꾹 물었다.
"쌤, 제 필라프 조금 먹어 볼래요?“
"쌤, 스테이크 조금 더 먹을래요.“
"쌤, 이거 맛있어요. 이거 드세요."
태범은 식사 내내 이솜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자신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도준을 제외한 아이들에게 대답을 해 주느라 바빴다. 마치 이솜에게 말은 커녕 눈길도 주지 못하게 막는 협공 같았다.
어영부영 식사 시간을 끝내고 나오자 도준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태범은 진이 다 빠진 것 같이 다크서클이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도준은 몰래 큭큭 웃었다.
"난 이제 갈게.“
"어, 데, 데려다줄까?"
이솜의 말에 태범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이솜은 됐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 금방 사라졌다. 왜 저렇게 쿨하고 멋있는지 태범은 미련 없이 떠나는 이솜의 뒷모습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저런 여자친구라면 평생 끌려 다녀도 좋을 것 같았다.
도준은 이솜이 떠난 시점 이미 흥미를 잃어 집으로 가고 싶었고, 다른 아이들은 더 놀고 싶어 난리였다.
"쌤, 저희랑 PC방 가실래요? 게임 어떤 거 하세요?“
"쌤은 게임 같은 거 안 하실 것 같아!!"
옆에서 정신이 쏙 빠지도록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후진 빛의 태범의 얼굴을 보고 입을 합 다물었다.
"얘들아, 미안한데 나 먼저 가도 될까……?“
"그, 그러세요. 조심히 가세요, 쌤.“
"월요일에 봐요!"
태범은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고 사라졌다. 도준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형, 어디가! 더 안 놀아?“
"공부 좀 해, 새끼들아."
도준은 더 놓고 싶은 아이들에게 나직하게 내 뱉었다. 그 말에 한터가 뜨끔 했지만 분위기를 띄워 모두를 PC방으로 이끌었다. 수혁이 도준의 행동에 혀를 쯧쯧 찼다.
어제 데이트 ** 거절당했다고 질질 짜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
모든 학생들이 기대하고 고대하던 체육대회가 다음 주면 시작 된다. 3학년 8반은 아침부터 시끌시끌했다. 교무 회의가 길어질 것 같아서 조례를 하지 못한다는 이솜의 연락에 도준이 대신 교탁 앞에 서 있었다.
"자, 우리 다음 주에 체육대회야. 1등 할 자신 있어?“
"형, 당연히 없죠!“
"우린 인기상이나 응원상 노려야 하지 않을까?"
교내에서 2학년 4반이 최고의 체육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소리에 1등의 꿈은 일찍부터 버린 3학년 8반은 도준의 질문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노리기 쉬운 쪽을 공략하자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
"그럼 의견 내 봐.“
"우리 콘셉트 잡자! “
"반티 극혐이다, 잘 생각해라."
여기저기에서 의견이 튀어 나왔다. 한참을 떠들던 8반은 결국 콘셉트에 지독히 미친 자들로 밀고 나가자며, 이것까지 졸업사진으로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결국 8반 아이들은 마지막 고등학교 생활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됐다며 매우 즐거워했다. 도준도 그런 아이들을 딱히 말리지 않았다.
"그럼 쌤은 어떻게 해?"
기찬의 물음에 시장통 같던 교실이 한 순간에 찬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한참을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때, 수혁이 손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솜 쌤, 중고등학교는 검정고시니까 교복 안 입어 보셨을 거 아냐. 그러니까 쌤한테는 교복!“
"오오-“
"쌤 극혐 하시는 거 아냐?"
수혁의 의견에 아이들의 찬반 논란이 쟁쟁 했다. 한 편으론 잘 어울릴 것이다, 또 한 편으로는 싫어하지 않을까, 이었다. 일단 선생님들에 대한 콘셉트는 천천히 정하기로 한 뒤, 도준이 자리로 들어갔다.
"형, 나 잘 했지?"
도준의 옆에 있던 수혁이 어서 칭찬 해 달라는 듯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도준은 피식 웃으며 수혁의 머리를 마구 털었다.
그 옆에서 턱을 괴고 사이좋은 둘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재하가 질린다는 듯이 교탁을 바라봤다.
한참을 떠들 던 때, 갑자기 교실 앞문이 열리면서 이솜과 태범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박수를 보냈다.
"오, 쌤!“
"역시 나이스 타이밍."
이솜이 출석부를 교탁 위에 올려두며 왁왁 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왜 이래? 얘들아, 다음 주에 체육 대회인거 알지? 여고랑 같이 준비해야 해서 회의가 길어져서 늦게 들어왔네.“
"괜찮아요! 쌤, 근데 교복 어때요?"
기찬은 일부러 모르는 척,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이솜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이솜은 그 질문을 그저 자신들의 교복이 어떠냐는 질문으로 받아 들였다.
"괜찮은데, 왜?“
"오케이, 접수 했습니다."
의미 모를 말에 이솜은 그저 무시하기로 하고 교무 회의 때 한 회의 내용 중 전달이 필요한 내용만 아이들에게 말 해줬다. 하지만 여고와 함께 하는 체육대회로 들떠 있는 아이들에게 체육 대회를 제외한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것을 눈치 챈 이솜은 피식 웃었다.
"가장 중요한 거. 여고 애들이랑 밀폐된 장소에서 따로 있는 게 발각되면, 바로 벌점 주신단다.“
"어우-“
"왜 야유 보내? 어차피 네 와꾸로는 들이대지도 못해."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물어뜯으며 여고 아이들과 눈도 못 마주치는 것은 너 라고 못을 박았다. 이솜의 눈엔 거기에서 거기로 보였다. 도준이나 그의 친구들 같이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진 아이들을 제외하곤. 문득 생각이 미치자 도준에게 눈길이 미쳤다.
도준은 이솜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지, 둘의 시선이 맞닿았고 그는 이솜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이솜은 순간 심장을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했다.
볼이 빨갛게 달아 오른 이솜은 헛기침을 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흠, 아무튼. 오늘 수업 잘 듣자."
이솜은 조례를 마무리 하고 태범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졸업사진까지 가져가자는 게 진심이었는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어떤 콘셉트로 밀고 나갈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겹치지 않게 결정이 나면 먼저 얘기 해 주기로 해 놓고 정작 결정한 무리는 하나도 없었다.
"근데 솜 쌤이 입으실 교복은 어디서 구해?“
"우리 누나가 입었던 거 집에 있던데.“
"사이즈 맞을까?“
"……."
꽤 중요한 문제라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수혁이 사이즈는 괜찮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솜의 교복은 구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데, 진정한 문제는 본인들이었다.
다른 무리들은 어느 정도 길을 잡은 것 같았지만 도준이 속해 있는 이 잘난 5인방은 어떤 콘셉트를 할지 고민이었다.
솔직히 도준은 이솜과 맞춰서 교복으로 밀고 싶었지만 체육대회 때 교복을 입으면 가장 고생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우리 조선시대 하자.“
"기생?“
"미쳤냐. 선비 하자고, 선비!"
한터의 실없는 소리에 재하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선비를 외쳤다. 재하의 제안이 그다지 나쁘지도 않고, 딱히 다른 좋은 방법이 없던 덕에 도준의 무리는 조선시대 선비로 결정이 되었다.
재하는 아이디어가 뺏길 까, 바로 소리를 질러 선비 콘셉트의 임자를 알렸다. 개 중에 아쉽다는 탄식을 내 뱉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반 자체 콘셉트가 뭐다? 콘셉트에 미친자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비가 콘셉트이니까, 진짜 선비처럼 해야 돼. 뭐든지 진지하게."
재하가 진지한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말 했다. 뭐든지 태클을 걸어서 선비처럼 보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에 수혁과 기찬은 너무 좋다며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진지하게 받아쳐도 콘셉트라는 방패가 있으니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벌써부터 속 터져 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붕붕 떴다.
*
고대하고 고대하던 체육대회 당일, 콘셉트를 제대로 잡은 아이들은 소품부터 시작해서 분장까지 했다.
물론, 체육대회 종목에 출전하는 아이들은 운동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를 했다.
8반에서 제일 우락부락한 문용, 재관, 한별은 어울리지 않게 캐릭터가 들어간 티셔츠와 멜빵바지를 입었고, 그 안에 있는 몸집이 작은 성현이 정장을 입어 아빠와 아이들이라는 콘셉트를 했다. 그 콘셉트를 본 이솜은 기절하는 줄 알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이솜과 태범은 체육대회에 맞게 편한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 너무 콘셉트 세게 잡은 거 아니야?“
"솔직히 저희보단 도준이 형 네가 제일 세게 잡았어요.“
"맞아요! 뭐 말만 하면 쓸데없이 진지해요. 이래서 선비충이란 말이 나왔나봐요."
아이들은 이솜에게 도준의 무리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도준, 기찬, 한터, 채하, 수혁은 어디에서 빌렸는지 하늘하늘한 한복에다가 갓까지 쓰고 점잖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어울렸지만 아이들의 의견은 영 달랐다.
학교에 도착하고 옷도 갈아입기 전에 선비에 빙의가 됐는지, 마주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었다. 그 모습에 진절머리가 난 성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사람이면 한복을 입어야지, 양놈 옷을 입었다고 5명에게 한 소리를 들은 뒤였다.
"쌤, 저희가 준비한 거 있어요."
그 때, 한터가 쇼핑백 두개를 들고 교탁으로 향했다. 하나는 이솜에게, 하나는 태범에게 전달했다.
"이게 뭐야?“
"쌤들 콘셉트는 저희가 잡았어요."
이솜과 태범은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고 표정이 살짝 굳었다.
태범은 정말 이걸 입어야 하냐는 얼굴로 한터를 바라봤고, 한터는 두 사람에게 이 옷을 꼭 입어야만 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태범은 울고 싶었다. 이솜은 쇼핑백을 들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고 3이니까 맞장구라도 쳐 줘야겠다 싶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20분 뒤에 시작이니까 시간 맞춰서 운동장으로 나와. 쌤들은 먼저 갈게.“
"네!!"
아이들은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신나게 대답 했다. 그것이 체육 대회 자체를 향한 기대인지, 여고를 향한 기대인지 알 수 없었다. 태범은 교실 문을 나서자마자 이솜의 팔을 붙들었다.
"솜, 이거 진심 입어야 해?"
이솜은 울먹이며 말 하는 태범을 바라보고 손을 털어 제 팔에 대고 있는 태범의 팔을 떨궜다.
"앞으로 태범 쌤이 겪어야 할 일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세요."
이솜이 환하게 웃으며 말 하니 태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