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피구, 그리고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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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 "응? 너도 보건실 가려고?“ "아니요. 저 아까 축구 하는 거 봤죠?“ "응. 잘 하더라." 이솜은 도준의 말에 잘 한다고 얼버무렸다. 계속 대화를 하면 이러다가 제 세레모니까지 봤냐고 물어볼 기세였으니. 도준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솜을 바라봤다. "쌤, 저 짝피구 나가요.“ "파이팅 해." 무심하게 느껴지는 이솜의 말에 도준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여고 학생들과 짝을 이뤄서 하는 게임이라 질투심이라도 일으키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던 탓에 질투심은 커녕 열심히 하라는 응원만 받았다. 운동장에서 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짝피구가 시작이 되었다. 4개의 코트에서 동시에 진행이 되는 게임이라 그런지 정신이 없었지만 꽤 흥미진진한 상황이 이뤄지고 있었다. 여자는 온 몸으로 남자를 막으면서 공을 마구잡이로 던졌고, 남자들은 자기보다 한참은 작은 덩치의 여자들의 뒤에 숨기 바빴다. "야, 도준이 형 봐!“ "으하하학! 저 덩치 어떻게 숨겨!!" 특히 도준은 꾸준한 운동 덕분에 몸이 컸던 터라 숨기는 커녕 공을 피하기도 어려웠다. 눈 감고 던지기만 해도 맞기 쉬울 정도였다. 그 때문에 상대편은 도준을 향해 공을 많이 던졌다. 그 순간, 도준과 짝을 이룬 민정의 얼굴을 향해 공이 날아왔다. "꺅!" 그리고 도준은 반사적으로 민정을 감싸 안아 등으로 공을 대신 맞았다. 공을 맞은 부위가 화끈 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공 깨나 던진 솜씨였다. 공에 맞는 도준을 보고 이솜을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등을 쓱 문지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코트로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때, 게임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불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8반은 이번 게임에서 졌다. 민정은 미안한 표정으로 공에 맞은 도준의 등을 쓰다듬었고, 도준은 괜찮다는 듯이 민정에게 웃어주었다. "진짜, 진짜 미안해요, 오빠.“ "괜찮아. 게임이었는데 뭐 어때.“ "아, 제가 빨리 피했어도 오빠가 안 맞았는데……." 민정과 도준은 둘이서 함께 걸으며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 그 때, 도준의 눈에 이솜이 들어왔다. 도준은 이솜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쌤! 저 봤어요?“ "…….“ "아- 진짜 멋있었는데, 그쵸? 나 영화 찍는 것 같았어요." "잘 했어. 다치진 않았고?" "저 김도준 이에요. 여자애들이 던진 공 가지고는 끄떡없습니다." 도준이는 짐짓 멋있는 척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솜은 그런 도준을 바라보다가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도준은 그런 이솜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킬킬 웃었다. "오빠, 제가 음료수라도 사 드릴게요." 민정의 목소리에 이솜의 귀가 번쩍 뜨였다. 아니, 게임 하다 보면 공에 맞을 수도 있지. 그런데 내가 왜 쟤네한테 신경 쓰는거지? 두 가지 마음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장 도준이한테 달려가서 반장에게 적합한 일을 시킨다는 핑계로 도준이랑 일을 해! 아니야, 도준이도 남고에 있다 보니 저 귀여운 여학생이 얼마나 마음에 들겠어? 두 생각이 머릿속에서 왕왕 울리자 이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준아.“ "잠시만. 네, 쌤!" 도준은 자신을 부르는 이솜의 목소리에 민정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이솜을 바라봤다. 이솜은 씩 웃었다. "따라와, 할 거 있으니까.“ "넹." 이솜이 훌쩍 체육관을 나서자, 도준은 망설임 없이 이솜의 뒤를 따라갔다. 민정은 그런 도준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구르며 갔다. "왜, 도준 오빠랑 잘 안됐어? 오빠 보니까 너한테 그래도 관심 있는 거 같던데.“ "나 영화 보는 줄 알았잖아. 아씨를 구하는 도련님! 크으-" "아, 조금만 더 꼬시면 넘어왔는데." 민정의 말투에 주변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민정은 아까 자신을 감싸던 도준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잘 생겼는데 덩치고 있고, 게다가 한복을 입고 있어서 청초한 느낌까지 주던 도준이 자신을 감싸며 공을 대신 맞아주던 그 순간! 민정의 머릿속에선 종이 뎅-뎅- 울리며 이 남자가 내 남자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공을 맞고 나서 괜찮냐고 물어봐주던 그 얼굴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진짜, 존잘이야…….“ "인정. 멀리서 봐도 잘 생겼는데, 품에서 보던 얼굴은 어때?" "야, 개 쩔었어. 그 오빠 땀 냄새도 안 나더라.“ "에이- 그건 오바다." 너무 뿅 간 민정의 말에 오바 떨지 말라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민정은 진심이었다. 한편, 이솜과 도준은 매점으로 가고 있었다. 도준은 이솜 옆에 붙어 이것저것 얘기를 건넸지만, 이솜은 대꾸만 해주고 딱히 이렇다 말 하지 않았다. "쌤, 근데 매점은 왜요?“ "8반한테 아이스크림 돌리려고.“ "와우, 화끈하시네요.“ "나도 알아." 새침한 이솜의 대답에 도준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분명 2살 연상인데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 지. 매점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8반 명수에 맞춰 아이스크림을 담았다. 이솜은 콘으로 된 아이스크림을 주고 싶었지만 도준은 막대 아이스크림이면 충분하다면서 이솜을 만류했다. 두 8반의 명수에 맞춰 봉지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도준이 번쩍 들었다. 결제를 마치고 매점에서 나오자, 다른 선생님들도 매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 솜 쌤!“ "쌤도 애들한테 아이스크림 돌리려고요?“ "네. 저희가 싼 아이스크림은 거의 다 샀……." 이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다른 선생님들이 앞 다투어 매점으로 들어갔다. 한, 두개의 아이스크림은 그렇게 비싸지 않았지만 개수가 많아지면 가격도 두 배 이상으로 뛰기 때문이었다. 이솜과 도준은 선생님들을 바라보다 웃으며 체육관으로 걸어갔다. "쌤, 근데 아까 피구 할 때 저 안 멋있었어요?” "왜 자꾸 물어봐?“ "아니, 쌤 눈엔 어떻게 보였나 해서요." 솔직히 말하면, 이솜은 그 순간이 그렇게 마냥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딱히 대답 할 말을 찾지 못한 이솜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별로였나……." 도준이 중얼거렸지만 이솜은 모르는 척 걸었다. 그 때, 태범이 갑자기 나타나 도준의 등을 탁 쳤다. "윽-" 태범이 세게 때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준이 아픈 소리를 내며 등을 굽혔다. 그 행동에 놀란 이솜과 태범은 도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세게 안 때렸는데, 괜찮아? 미안!“ "왜 애를 때려요, 태범 쌤은?“ "그게 아니라……." 이솜은 태범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이솜은 도준이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봉지를 태범에게 넘겨주곤 뒷 일을 부탁한다며 도준을 끌고 보건실로 향했다. 태범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든 채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되는 일이 없네." 도준과 이솜의 사이에 끼어 서서 체육관으로 가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에 태범은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태범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들고 힘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도준과 이솜이 보건실 안으로 들어가자, 보건실엔 아무도 없었다. 소독약 냄새만 잔잔히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많이 아파?" 이솜은 여전히 제 등을 쓸고 있는 도준을 향해 말 했다. 태범이 친 등은 아까 공에 맞았던 부위였다. 아프지 않다고 생각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극이 없어서 아픔을 느끼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도준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멋있지 않냐며 온갖 센 척은 다 했는데, 작은 건들임에 아픈 모습을 보여줬으니, 이솜이 자신을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부끄러웠다. 이솜은 구급상자에서 약과 밴드를 찾았다. "벗어.“ "ㄴ, 네?“ "옷 벗으라고. 그래야 약 바르고 밴드 붙이지.“ "아……." 도준은 훅 들어온 이솜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곧 수긍하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조용한 보건실 안에선 사르륵 소리를 내며 도준이 입고 있던 한복이 한 꺼풀 벗겨졌다. 도포와 저고리를 벗자, 흰 반팔티만 남았다. 이것도 벗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머뭇거리자, 이솜은 한숨을 푹 쉬었다. "도준아, 티도 벗어야 약을 바르지.“ "아, 네……." 도준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이솜에게 등진 채로 옷을 벗었다. 이솜은 면봉에 연고를 묻히고 도준의 등을 바라봤다. 도준의 등은 꾸준히 운동을 한 덕분에 근육이 고르게 붙어 있었고, 어깨가 매우 넓었다. 남자 등판을 보면서 설레긴 연예인 다음으로 처음이라 이솜은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에 맞아 새빨갛게 변한 도준의 등에 연고를 댔다. 갑작스럽게 닿은 차가운 연고에 도준의 등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 작은 움찔거림에도 등에 있던 온 근육들이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함께 움직였다. "으, 차가워요.“ "참아. 그러게 누가 다치래?“ "안 아팠는데…….“ "완전 빨갛게 부어올랐는데 안 아프긴." 이솜의 말에 도준이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는지, 이솜은 면봉에 힘을 조금 더 줬다. "아! 아파요!“ "웃음이 나와?“ "쌤이랑 둘이 있어서 그런가, 웃음이 막 나오네.“ "너 쌤한테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마라.“ "네? 뭐가 이상한데요?" 이솜은 도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밴드를 붙였다. 이솜의 치료 마무리를 느낀 도준은 재빠르게 티를 입고 이솜을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았다. 이솜은 그런 도준을 바라보지도 않고 구급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왜 대답 안 해줘요, 쌤.“ "대답 할 게 없으니까 안 하지.“ "내 질문은 대답 할 가치가 없나?“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말 해줘요." 도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손을 뻗어 이솜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이솜은 그런 도준의 행동에 한숨을 푹 쉬고 구급 상자 뚜껑을 닫았다. "이렇게, 스킨십 하지 말고.“ "…….“ "또 그렇게, 그런 눈빛으로 나 보지도 말고.“ "…….“ "아까처럼 나 좋아하는 듯이 말 하지 말고.“ "에이- 너무 멀리 갔어요. 근데 쌤한테 스킨십 많이 한 건 인정. 이제 조심 할게요." 그렇게 많이 티 났나? 도준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이솜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이솜이 도준을 향했던 몸을 벽 쪽으로 돌려 구급함을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구급함이 원래 꽤 높은 곳에 있던 터라, 이솜이 한껏 발뒤꿈치를 올렸다. 도준은 자신이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 했다. 이솜이 말 한 것 중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솜이 정리를 다 하자, 도준도 옷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하게 체육관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형, 어디 갔다 왔어? 형 아이스크림 녹을까 봐 내가 먹었어." 도준은 철없이 헤실 거리는 한터를 무시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한터가 진지하게 도준을 들여다봤다. "솜 쌤이랑 데이트 하고 온 거 아니야?“ "망했어…….“ "뭐? 왜!?“ "좀 조용히 해!" 도준의 윽박지름에 한터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앞에 있던 수혁이 뒤를 힐끔 돌아봤다. 꼴을 보아하니 묻는 말에 몇 시간 동안 대답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한숨을 쉬고 다시 아이스크림에 집중 했다. "저, 오빠!" 그 때, 민정이 볼을 붉히며 도준에게 말을 걸었다. 도준은 고개를 들어 민정을 바라봤다. 민정은 아까와는 달리 향수 냄새가 잔뜩 나고 있었다. "왜?“ "아, 그게. 아이스크림 못 드셨을 것 같아서요. 저랑 같이 매점 좀 가 주실 수 있어요?“ "……그래." 도준은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싶어서 민정과 함께 매점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기찬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형 언제 철들까.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도준은 우울한 표정을 감추고 민정과 함께 매점으로 향했다. 민정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거절 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수긍 한 것이 분명 저에게 관심이 있다고 확신이 들었다. "오빠, 반장이라면서요?“ "응.“ "3학년한테는 반장 잘 안 세우는데, 담임이 특이 한가 봐요.“ "……, 무슨 뜻이야?" 순수하게 헤실 거리며 말 하는 민정에게 도준이 날을 잔뜩 세워 물었다. 도준의 날카로운 말에 민정은 당황하며 손을 내둘러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아, 아니, 시험에 집중하라고 보통 반장 잘 안 세우잖아요…….“ "…….“ "죄, 죄송해요.“ "하- 아냐. 날 세워서 미안." 민정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도준의 눈치를 힐끔 봤다. 도준은 마음이 복잡했다. 이솜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돌아다니는 건데, 같이 걷는 아이가 이솜의 이야기를 꺼내니 나온 이유가 없어진 것 같았다. 그냥 체육관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 민정이 눈치를 보다 다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빠, 번호 알려 줄 수 있어요?“ "번호는 왜?“ "그, 그냥- 연락 하고 싶어서요……." 민정은 수줍어 웃으며 팔을 꼬았다. 그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내려다 본 도준은 뒷주머니에 버젓이 있는 휴대폰의 존재를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미안. 공부에 집중 하느라 좀 바빠서. 너도 그렇잖아." 공부에 집중하긴 했지만 바쁜 건 뻥이었다. 하지만 민정이 기분 나쁘지 않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민정이 민망한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렇죠? 네, 맞아요." 민정은 도준이 보지 않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에게 넘어온 줄 알았는데, 넘어간 사람은 정작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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