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가 얼굴에 웃음을 띠자 굳은 분위기가 풀리며 다시 이야기 소리로 가득 차게 됐다.
"자자, 오늘 태범씨 마지막 날이니까 마지막 얘기를 좀 들어야지?"
교장 선생님이 말 하자, 태범은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훤칠한 젊은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자 선생님들은 애인의 유무와 상관없이 입을 헤- 벌리고 태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이솜을 제외하고.
태범은 선생님들을 쭉 둘러보고 목을 가다듬었다. 선생님들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저 젊은 청년이 얼마나 말을 잘 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민망했는지, 태범은 뒷목을 긁적였다.
"흠흠. 어-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해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에게 배움을 주려고 왔는데 오히려 제가 더 배워가는 귀한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어색하지 않게 대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임용 한 번에 붙고 꼭 이 학교로 들어 올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태범이 인사를 꾸벅 하자 웃으며 선생님들은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들 태범에게 고생 많았다면서 술잔을 기울였고, 태범은 한 잔, 한 잔 모두 받아먹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솜은 체육대회 날, 고주망태가 됐던 태범의 모습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제발 오늘 또 같은 일이 일어나질 않길 간절히 빌었다.
회식자리는 점점 길어졌고 술에 취해 떡이 된 선생님들도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몇 선생님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솜이 원하는 대로 세상은 굴러가지 않았고, 여전히 막내 둘만 식당 앞에 남겨져 있었다.
"하. 인생 진심 기구하다."
지은이 떠나기 전 비웃듯이 바라보던 그 표정만 제외하고는 모든 상황이 다 좋았다.
아, 널브러진 태범도 제외하고.
이솜은 진지하게 태범을 두고 갈까 고민 했다.
태범을 발로 툭툭 차보기도 했지만 태범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 놓고 가자.
마침내 결심을 세운 이솜이 걸음을 옮기려고 했던 차였다.
"와우, 쌤. 여기서 또 뵙네요?"
"이정도면 우린 데스티니- 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쉽게도 이솜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까불거리는 목소리로 다가온 재하와 수혁이 형태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든 케이크 같이 흐물거리는 태범을 보고 흠칫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마치 보면 안 되는 메두사의 얼굴을 본 것 같이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와우."
두 사람을 본 이솜은 잘 됐다는 듯이 씩 웃었다. 길에 버릴 수 없다면 이 친구들을 이용하자는 속셈이었다.
"얘들아, 쌤 좀 도와줘. 거절은 거절할게."
이솜의 해 맑은 미소에 재하와 수혁은 일단 인상을 찌푸렸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태 살아온 눈치로 보아하니 저 시루떡을 맡기거나, 맡기거나, 맡길 것 같았다.
"으- 설마……."
"이 슬라임 같은 사람을 옮겨 달라는 건 아니겠죠?"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알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진심으로 싫어하는 재하와 수혁의 몸짓을 철저히 무시한 이솜은 길가로 나가 택시 한 대를 잡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솜의 애처로운 손짓에 택시는 단 한대도 멈춰주지 않았다.
망할 택시 같으니라고…….
그 모습을 지켜 본 수혁이 혀를 쯧쯧 차더니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어디야?"
[천국]
"우, 여기가 진짜 천국인데. 올래?"
번개 모임이 끝나고 잠시 차를 가지러 간 도준은 수혁의 말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든, 거기든 아직 죽지 않았으니 천국일리 없었다.
그 때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거기에 솜 쌤 있어?"
[내가 말 했지 천국이라고]
"위치 찍어서 보내."
도준의 말에 수혁은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수혁의 언변에 재하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최고의 달변가 상을 주고 싶었다.
수혁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쑥스럽게 웃으며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수혁은 여전히 택시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이솜에게 다가갔다.
"쌤, 도준이 형이 차 가지고 온대요."
"뭐?"
그 때 수혁이 이솜의 어깨를 톡톡 치며 입이 떡 벌어지는 소리를 했다.
아니, 학생이 무슨 차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느껴지는 이솜에게 수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성인이잖아요.
고개를 끄덕인 이솜은 택시를 잡으려던 손을 거두고 태범의 옆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근데 원래 술 마시면 이렇게 돼요?"
"술이 아니라 사회생활에 찌들면 이렇게 되는 거야."
"와, 진짜 싫다."
"처음에 좋을 걸."
부어라, 마셔라,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그런 멘트로 마구 술을 마시던 동기들이 떠오르자 이솜은 그냥 피식 웃었다.
그 내용을 알리없는 재하와 수혁은 조용히 핸드폰을 하며 도준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길가에 한 차가 스르르 멈추며 클락션을 울렸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자 몸을 한껏 숙인 도준이 나타났고, 도준은 이솜을 향해 소리쳤다.
"솜 쌤!“
재하와 수혁은 보이지도 않는 지, 이솜만 찾는 도준에게 작게 눈을 흘긴 재하와 수혁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왔다. 야, 도재하. 쌤 팔 잡아.“
"흐, 무거울 것 같아."
도준은 비상 깜빡이를 켜 놓고 차에서 내려 태범이 뒷좌석에 탈 수 있도록 뒷좌석 문을 열었다.
이솜은 차로 가까이 다가갔다.
재하, 태범, 수혁이 차례대로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문을 닫고 돌아서니 이솜은 여전히 차 근처에 서 있기만 했다.
도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솜을 바라봤다.
"쌤은 안 타세요?"
"나? 내가 왜?"
"저 태범 쌤 집 어디 있는지 몰라요."
"나도 모르는데……."
"……."
잠깐의 정적이 일어나자 일단 도준은 이솜을 조수석에 태웠다.
집을 모르면 누군가가 재워줘야만 했다.
"어어-“
"이러다가 과태료 물어요. 일단 타세요."
도준의 말에 이솜은 조용히 안전벨트를 착용 할 수밖에 없었다.
도준은 운전석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매고, 드라이브 기어를 넣어 엑셀을 조심스럽게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꽤 많이 타 봤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처음 도준의 차를 탄 이솜은 꽤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 본 도준이 웃음을 낮게 흘렸다.
"일단 저희 집으로 갈게요. 집 물어 볼 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굳이 이솜에게 상황을 설명 한 도준은 제가 사는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실제로 정말 떡이 되어 버린 태범은 이미 쿨쿨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 때문에 아이들이 가끔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태범이 어디에서 잠을 청하든 아무 상관없던 이솜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전벨트만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도준은 이솜의 행동에 결국 웃음을 파- 하고 터뜨렸다.
"쌤, 저 운전 잘 해요. 하하-"
도준의 자신 만만한 말에도 이솜은 안전벨트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뒤에 있었지만 도준에겐 존재감이 1도 느껴지지 않았던 수혁과 재하는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도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 하자, 수혁과 재하가 낑낑대며 태범을 도준의 오피스텔 안으로 옮겼다.
"으- 힘들어."
"쌤 일어나면 뭐라도 받아 먹어야 돼."
결국 오피스텔 앞엔 이솜과 도준만 남아있게 됐다.
도준의 말 대로 그의 운전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던 일이었는지, 이솜은 도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 할 때 까지 안전벨트를 꽉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쌤, 시간도 늦었으니까 데려다 드릴게요.“
"괜찮아."
"아무리 치안 좋다고 해도 이 시간은 위험해요."
도준은 단호한 표정으로 제 선의를 거절한 이솜의 의견을 묵살시켰다.
실제로 방범이 잘 되어 있어도 1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거리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솜은 도준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무 대답하지 않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도준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웃으며 이솜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길 근처가 아니라 주택이 있는 곳이라 새벽 골목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쌤."
"왜."
별들이 쏟아 질 것 같이 하늘에서 끊임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쌤은 연하 어때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이솜은 걸음까지 멈췄다.
의심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니 도준이 눈길을 슥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그, 그냥 궁금해서요."
눈에 뻔히 보이는 질문에 이솜이 피식 웃었다.
"글쎄. 딱히 생각 해 본적 없는데."
"그럼 동갑이나 연상은요?"
"그것도."
이솜의 대답은 도준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도준은 다행이라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중간고사인데, 준비 잘 하고 있지?"
"당연하죠. 쌤, 저 공부 잘 해요."
"알아."
"어떻게 알아요?"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는 도준에게 이솜은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이 바라봤다.
"생활 기록부 있잖아."
"아……."
도준은 이솜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고 살짝 기대 했지만, 완전 엇나갔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도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솜과 더 말 하다간 분위기를 타서 고백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솜은 조용해진 도준을 힐끔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제 다 왔어."
"……골목 안까지 가면 안돼요?"
도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강아지 같이 눈을 뜨며 말 했다. 이솜이 도준에게 환하게 웃었다.
도준은 생각했다. 된다고 말 하려나봐!
"응, 안돼."
하지만 이솜은 도준이 쉽게 뚫을 수 있는 창호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치사해."
이솜의 말에 도준은 어깨와 눈을 원상복구 시키며 입술을 툭 내밀었다.
그러자 이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솜을 바라봤다.
도준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살짝 뒷걸음질 했고, 이솜은 도준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너 자꾸 반말 한다, 은근히?"
"아닌데, 완전 대 놓고 하는 건데?"
"까불어."
이솜은 웃으며 도준의 팔뚝을 툭 쳤다.
먼저 가겠다고 한 뒤 골목으로 혼자 들어가는 이솜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본 도준은 아쉽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도준에게 이솜은 헤어짐이 참 아쉬운 사람이었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도준은 거실 한 구석에서 조용히 자고 있는 태범을 보다가 그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러자 태범은 흠냐 흠냐 잠꼬대를 하며 담요를 더 끌어당겼다.
태범을 옮긴 재하와 수혁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있는 치킨을 먹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처먹으러 여기 오나.
고깃집 이후 2차로 놀러 가려고 했지만 흐지부지 되어 도준의 집으로 오기로 한 재하와 수혁을 위해 도준이 시켜 놓은 치킨이었지만, 치킨을 시킨 당사자에겐 먹으라는 빈 말 한 마디도 없이 치킨을 먹는 두 동생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맛있냐?"
"치킨인데, 당연히 맛있지."
"어쩜, 우리 형아는 치킨 시키는 센스도 남달라~"
재하의 태평한 소리에 도준은 가슴을 펑펑 내려쳤다.
수혁은 그런 도준을 힐끔 보고 제 옆의 빈 자리를 가르치며 앉으라 눈짓 했다.
도준은 일단 냉수라도 들이키기 위해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물을 꺼냈다.
"어, 형. 콜라도."
이마의 핏줄이 절로 일어나게 만드는 재하의 발언에 도준은 심호흡을 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콜라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알아서 따라 마셔라. 형님 시켜 먹지 말고."
"헤헤- 감사합니다, 형님!"
장난스레 웃으며 말 하는 재하를 본 도준은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곤 수혁이 눈짓한 자리에 앉았다.
"기찬이랑 한터는?"
"기찬이는 외박 안된 댔고, 한터는 여자 친구 만나러."
"이 늦은 시간에 여자 친구를 만나?"
"게임 약속이지 뭐."
어깨를 으쓱인 수혁은 치킨에 집중했다.
냠냠 쩝쩝 잘도 먹는 아이들은 도준에게 정말 치킨을 먹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배고프면 알아서 챙겨 먹겠다는 생각이었다.
도준은 매정한 아이들의 행동에, 이솜이 은근 겹쳐서 보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시커먼 아이들에 몽실몽실한 이솜을 대입하다니.
"그나저나 솜 쌤은 잘 모셔다 드렸어?"
"뭐, 근처까지 같이 갔지."
"오- 그러다 사귀겠는데?"
재하가 팔꿈치로 도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도준은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물론 김칫국물 한 사발이었지만.
"아직 나한테 관심 없어."
"에이, 그래도 원래 데려다 주는 거 싫어하시잖아. 그 정도면 형한테 어느 정도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수혁의 말에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도준은 치킨을 뒤적거렸다. 많이도 먹었는지, 퍽퍽한 살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