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시험 문제 유출 조심하고, 문제 완성 되는 대로 결제 올리세요."
"네-"
"교무회의는 여기까지. 자, 다들 돌아가서 일 보세요."
부장 선생님의 말에 원탁에 모여 있던 선생님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담임을 맡은 선생님들은 출석부를 챙겨 교무실을 나섰고, 담임직을 맡지 않은 선생님들은 업무를 하거나 수업 준비를 했다.
"지은 쌤, 이거 드세요."
"뭐에요?"
"태범 씨가 저번 주에 못 줬다면서 오늘 아침 일찍 들러서 주고 갔어요."
민겸이 지은의 책상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태범이 감사의 뜻으로 간식을 담아 준비한 상자였다.
민겸은 지은의 표정을 슬쩍 보고 자리로 돌아갔다.
지은은 상자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 했다. 상자 뚜껑에는 작게 편지가 붙어 있었다.
[한달 반 동안 함께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교생 이태범-]
이런 것 까지 챙기나, 싶은 지은은 뚜껑을 다시 닫았다.
콧방귀를 뀐 지은은 수업 준비를 위해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그 때, 지은의 옆으로 이솜이 지나갔다. 보면 볼수록 이유도 없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례를 마치고 들어 온 건지, 이솜은 바쁘게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본 지은은 교과서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어우- 시끄러워."
지은의 말에 이솜은 순간 멈칫 했다.
교무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시끄럽다고 한 건지, 책상을 정리하는 자신에게 시끄럽다고 한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말투였다.
이솜은 손을 조심히 움직였다.
지은은 그 모습에 아무도 몰래 웃음을 지었다. 지은은 교과서를 챙기고 문을 나섰다.
지은이 교무실을 나가자마자 이솜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입술을 꽉 깨문 이솜도 교과서를 챙기고 교실로 향했다. 8반 수업이었다.
교실 안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저들끼리 모여 떠들고 있었다. 이솜이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자- 이제부터 시험 기간이라고 말 했지? 교무실 출입 주의하고. 오늘 수업부터 시험에 나올 가능성 높으니까 집중 하자."
"네-"
시험 문제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아이들은 군말 없이 이솜의 말에 따랐다.
45분 동안 수업을 진행 한 이솜은 5분은 질문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솜이 담당하고 있는 생활과 윤리를 수능 과목으로 볼 아이들은 많지 않은지 질문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난 이솜은 교과서를 챙기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범의 빈 자리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후우……."
이솜은 교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으며 자기도 모르게 긴 숨을 뱉었다.
눈가도 지끈거리는 것이 컨디션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 이솜은 중간고사 문제를 위해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았다.
기출 시험 사이트에 올라 온 자료를 참고하고 싶었지만 확실한 분별력을 위해 교과서를 펼쳤다.
*
"자자- 이제 곧 퇴근 시간이니까 마무리들 하세요. 나는 오늘 마누라 생일이라 일찍 좀 들어갈게요.“
"네- 조심히 가세요."
부장 선생님은 빠른 퇴근을 위해 밑밥을 깔아 두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나섰다.
그 모습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본 이솜은 시험 문제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종료 했다.
생일이라고 챙겨주는 사람도 있고, 부럽다 생각한 이솜은 휴대폰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들었다.
곧, 도준이 교무실로 들어왔다.
"쌤, 저희 청소 다 했어요."
"어, 갈게."
"휴대폰 제가 들게요."
도준은 이솜의 팔에 들여 있는 휴대폰 바구니를 들고 먼저 교무실 문을 열었다.
나가지 않고 이솜을 기다리자 이솜이 익숙한 듯이 먼저 교무실을 나섰다.
지은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쯧, 하고 찼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도준이 이솜에게 껌뻑 죽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은은 거울을 들여다봤다. 이솜 못 지 않게 남자 여럿 울렸을 것 같은 미모를 가지고 있던 지은은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이 온 몸을 덮었다. 지은은 거울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진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지은에게 다가갔지만 곧 대차게 까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솜은 종례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그 사이 꽤 많은 인원이 퇴근을 했는지, 교무실에 남아 있는 선생님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이솜도 퇴근을 위해 가방 안에 짐을 넣고 있었다. 집에 가서 조금 더 보충 할 시험 문제가 들어 있는 USB부터 시작해서 화장품, 휴대폰까지.
이솜이 자리에서 나가자마자 지은은 립스틱을 한 번 더 덧발랐다.
거울을 조금 더 들여다 본 지은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가방에 소지품을 넣고 교무실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응. 무슨 일이니?"
교무실을 나서자마자 교무실 앞에서 기웃대던 도준이 지은에게 인사를 했다. 지은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한껏 올리며 자상하게 말 했다.
"아……. 혹시 솜 쌤 가셨어요?"
도준의 말에 지은은 순간 인상을 확 찌푸릴 뻔 했지만 표정을 최대한 유지했다.
다행히 도준은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이솜을 바라 볼 때와는 다른 표정으로 무심하게 지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은은 도준 몰래 이를 부득 갈았다.
"한이솜 선생님? 가셨지. 왜? 쌤이 해 줄 수 있으면 쌤이 해 줄게.“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도준은 일말의 미련도 갖지 않고 몸을 휙 돌려버렸다.
이솜에게는 세상 제일 다정한 사람처럼 굴더니, 자신만 철저히 무시하는 도준을 보고 지은은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야구배트를 마구 휘둘러 뭐 라도 부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젠 하다하다 학생까지 자기를 무시한다 생각이 들었다.
지은은 초초하게 도준의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늘씬하게 빠진 신형 자동차는 주인의 성격답게 완벽하고 깔끔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다.
차에 올라 탄 지은은 핸들을 두 주먹으로 쾅쾅 내려쳤다.
“짜증나, 짜증나!”
이솜에게 엿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지은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씩 웃고 여유롭게 시동을 걸어 차를 움직였다.
입가에 미소를 띄고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는 지은의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
"이솜 쌤. 문제 다 내셨어요?"
"아- 아니요……."
"어머, 4일 뒤에 마감인데 언제 다 하려고? 자기, 빨리 해."
"네. 그래야죠……."
이솜은 우울 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진작 문제를 다 제출하고 결제까지 받았는데 신입의 패기인지, 신입의 아둔함인지, 아무튼 이솜은 내일이 마감임에도 불구하고 세 개 남은 문제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기출 문제 사이트에 들어가서 퍼올까 라는 유혹이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볼을 작게 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벌써 점심시간이 다 끝나 가고 있었다.
시험 문제 때문에 고민하느라 점심도 거른 이솜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이대로 기절 했다가 일어나면 방학식이길 바랐지만, 아직 5월 초였다. 어림도 없었다.
"자기, 식사는 했어?“
"아니요, 문제 때문에…….“
"어휴, 그러다가 몸 상해! 뭐라도 챙겨 먹어."
은지는 이솜의 어깨를 작게 토닥여주고 안쓰러운 눈빛을 내비쳤다.
막내라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몸도 걱정하라는 눈빛이었지만 이솜은 그 눈빛이 보고 싶지 않아 지갑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밥이라도 먹게?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 끝나는데.“
"아- 매, 매점이라도 가서 두유라도 사 먹게요.“
"……,그래 그럼."
고개를 끄덕인 은지는 이솜을 보내줬다. 이솜은 재빠르게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매점으로 향하니 아직 아이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밥을 방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점 안에 있는 아이들의 손에는 과자나 음료수 따위가 들려 있었다.
냉장고 쪽에서 두유를 찾은 이솜은 두유를 들고 매점 아줌마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선생님. 이런 것만 먹어서 되겠슈?“
“네?"
"밥을 먹어야지, 밥을. 다이어트 하다가 몸 다 상혀!"
"아하하……, 네. 감사합니다……."
의도치 않게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 된 이솜은 어색하게 웃으며 두유 값을 **했다.
빨대를 콕- 꽂고 바로 두유를 들이켰다. 고소한 맛이 입 안에서 확 풍기자 시험 문제 걱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매점을 빠져나와 운동장 쪽으로 걸어갔다. 운동장 벤치에 앉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이솜은 조금 밖에 들어 있지 않아 순식간에 다 먹은 두유갑을 접었다.
햇살이 잔잔하게 내려 쬐고 있었고,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대니 데이트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데이트는 개뿔……."
이솜은 작게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트고 자시고 지금은 시험 문제를 내야만 했다.
양치를 하고 돌아온 이솜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러다가 컴퓨터와 한 몸이 되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이솜은 갑자기 떠 오른 문제들을 컴퓨터에 재빠르게 옮겨 담았다.
꽤나 만족스러운 문제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저장 시켰다.
한 부를 출력해서 부장 선생님께 가져다주니, 마음이 매우 가벼워졌다. 마음이 가벼워지자 몸도 가벼워졌는지 두유 한 개로 버티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다행히도 수업이 없는 이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아- 빵이라도 사 먹게요…….“
"하하- 그래요. 다녀오세요.“
"네에-"
옆 자리에 있던 진우가 이솜의 움직임에 웃었다. 열심히 일을 하더니 점심도 거른 이솜이 식사를 챙기는 것이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아 마냥 귀여웠다.
이솜은 진우의 배웅을 받고 조용히 매점으로 향했다.
수업이 시작되어 복도는 그저 조용했다.
간간히 교실에서 선생님들의 목소리나 아이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분명 학교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이질감에 이솜은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매점으로 가는 길이 참 멀게만 느껴졌다.
"어, 또 오셨네."
"네에. 배가 고파서요……."
"내가 말 혔지, 다이어트 하다가 몸 다 상한다고!"
"하하. 그러게요."
차마 다이어트가 아니라고 말을 하지 못한 이솜은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빵과 우유를 골랐다.
테이블에서 먹고 가라는 아주머니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은 이솜은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 있는 빵은 이솜의 입맛을 제대로 저격했다. 곁들이는 흰 우유도 설탕이라도 타 놓은 것 마냥 달게 느껴졌다.
맛있게 빵을 먹는 이솜을 흐뭇하게 바라본 매점 아주머니, 미향은 매대를 정리하다 이솜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생님, 몇 살이유?"
"저요?"
"그럼 여기 선생님이랑 나 말고 또 누가 있다그랴."
"아, 저 올해로 스물 둘이요."
"스물 두우울?!"
어리게 보이긴 했지만 정말 어린 그녀의 대답에 미향은 까무러칠 뻔 했다.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32살의 교사직으로 살아가는 멋스런 아들과 연을 맺어줄까 했는데, 22살이라 들으니 미향은 자신의 아들이 벌써부터 도둑놈 소리를 들을까 염려가 되었다.
"네에-. 그나저나 이 빵 진짜 맛있어요."
"고럼고럼,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는 빵이여, 그게."
"그래요?"
"그럼. 그나저나 남자친구는 있는가?"
미향은 자신의 아들이 노총각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 보다 차라리 도둑놈 소리를 듣는 것이 더 낫겠다 판단 했다. 그러자 이솜이 민망한 듯이 웃었다.
"없어요. 하하…….“
"그으래? 아니, 우리 아들도 선생인디, 선생님이랑 만나면 차암- 좋을 것 같아서. 날 보면 알겠지만 우리 아들이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아니거든!"
미향은 손을 쫙 벌리며 이솜에게 자신의 아들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마구 늘여 놓았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 해야 할 지 모르는 이솜은 그저 조용히 미향의 말을 경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향은 그런 이솜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는지, 자신 아들의 번호가 적힌 메모장을 굳이 굳이 이솜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메모장과 볼펜 하나를 이솜에게 건넸다.
"선생님 번호 좀 적어줘봐요.“
"네? 제 번호는 왜…….“
"어휴, 내가 사랑의 큐파튼가 뭐시긴가 되 줄 테니껜, 적기나 혀!"
이솜은 미향의 강한 목소리에 얼떨결에 메모지에 번호를 적었다.
미향은 번호를 적는 이솜의 손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쩜, 우리 매느리(며느리)는 손이 저리 작은데도 야무지게 잘 쓸까.
벌써부터 아들을 장가보낸 미향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메모지에 번호를 다 적은 이솜은 미향의 눈치를 보고 슬쩍 일어났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려, 조심히 들어가유."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이솜이 고개를 갸웃하며 매점을 빠져나왔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부장 선생님이 이솜을 찾았다.
"이솜 선생, 결제 다 받았어. 문제 나쁘지 않네.“
"감사합니다."
이솜은 피드백 없이 한 큐로 결제 된 시험 문제를 받으며 헤실 웃었다.
오타 수정과 배점만 하면 끝나는 작업이라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실행시켰다.
미향이 번호를 가져간 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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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5월 XX일
살다 살다 매점 아주머니한테 번호 좀 적어 달라는 소리도 듣고.. 별 일이다. 그래도 시험은 문제 없이 잘 지나갔으니 다행이다! 게다가 문제가 나쁘지 않다는 칭찬까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