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간

5000
예쁘다고 했던 자신의 말에 너도 멋있다고 대답 해 준 이솜의 모습과 예쁜 사람 데려오기라고 말 한 자신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이솜의 모습이 겹쳐졌다. 어쨌든 둘 다 도준에게는 마냥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입에서 멍청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뜨거워!" 결국 이솜의 생각 때문에 제대로 다 피우지 못한 담배는 뜨겁게 타올라 도준의 손가락 가까이까지 갔고, 도준에게 뜨거움을 남겼다. 도준은 깜짝 놀라 급히 담배를 떨구고 발로 불씨를 꺼트렸다. 한숨을 푹 쉰 도준은 냄새를 빼기 위해 머리와 옷을 마구 털었다. 다행히 많이 피우진 않아서 냄새가 그리 심하진 않았다. 나름 만족한 도준이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 냄새.“ "요즘 누가 학생이 담배 피우지?“ "또, 또 까분다." 도준의 등장에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이죽이며 말 했다. 도준은 아이들의 장난에 웃으면서 받아줬다. 이미 몇 번이나 리필을 했는지, 가게 알바생들의 표정이 살짝 지쳐 보였다. 도준도 자리에 앉아 구워져 있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이솜과 함께 먹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건 다음에 기회를 엿 봐야겠다 생각을 한 도준이었다. 한편, 이솜은 인사불성이 된 태범을 난감하게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 연거푸 술을 들이키더니 제일 먼저 넉 다운이 되어선 회식이 끝날 때 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버리고 가고 싶었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솜은 후배를 그냥 버릴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가까운 벤치로 그를 질질 끌고 가서 앉혔다. 그를 끌고 가는 내내 욕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야, 너 진짜- 하아- 겁나 무거워." 남자인데다가 술까지 마셔 힘이 쭉 빠진 태범의 몸이 두 배는 무거워졌다. 이솜은 숨을 들이켰다. 나중에 일어나면 무릎이라도 꿇게 하고 싶었다. 태범의 옆에 털썩 주저 않은 이솜은 심통 난 마음에 태범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태범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깜짝 놀란 이솜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손을 잽싸게 내렸다. "정신 좀 들어?" 지극히 용사에게 말 하는 NPC 같은 말투였지만 태범은 멍하니 이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오묘한 눈빛에 이솜은 눈길을 피했다. 그러자 태범이 울상을 지었다. "야아- 너는 왜에!“ "……?“ "내, 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에- 그 사람이! 어? 인기가 많단 말이지!!" 이솜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차라리 그냥 잠이나 자는 게 취사였으면 했지만, 태범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침묵 수련을 마친 투머치 토커처럼 입을 나불대고 있었다. 술에 취해 발음이 부정확 했지만 이솜이 알아듣기론, 좋아하는 사람이 인기가 너무 많아서 포기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알게쒀? 엉?!“ "그래- 알겠으니까 집에 좀 가라.“ "그럼 악수 해!" 태범은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이솜에게 손을 뻗었다. 악수를 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그냥 자버리겠다는 눈빛으로. 이솜은 내키지 않았지만 대충 태범의 손을 잡고 위 아래로 몇 번 흔들고 손을 놨다. 그제야 태범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눈을 접어 배시시 웃었다. 멀쩡하게 잘 생긴 놈이 짝사랑이라니. 혀를 쯧쯧 찬 이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범 쌤, 이제 일어나시죠. 택시 잡아 줄 테니까 주소 부르세요.“ "네엡- 알겠습니다아-" 태범은 여전히 취한 목소리였지만 이솜의 말뜻을 모두 알아들었다. 이솜은 태범을 위해 택시를 잡았고, 곧 도착한 차에 태범을 욱여넣었다. 택시 기사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솜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차문이 닫히자마자 택시는 곧 출발 했다. 짐을 덜은 이솜은 가뿐한 마음으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려고 하다가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도준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쌤!] “어디야?” [여기요? 여기, 로데오 거리에 있는 노래방이요. 오시게요?] “아니, 너희 잘 들어갔나 확인 해 보려고 전화 걸었어.” [아- 여기 오시면 애들 다 있어요! 애들이 쌤 없다고 엄청 투정 부- 아! 쌤!! 쌤 여기 오세요!!] 분명 도준과 통화를 했는데, 수화기 너머로는 8반 아이들의 아우성이 쏟아져 나왔다.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전화를 하려고 노래를 멈춘 듯 했다. 이솜은 아이들의 반응이 귀여워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오실 거예요?] “그 쪽으로 가기엔 내가 너무 멀리 왔다. 아무튼 잘 놀고 조심해서 들어가. 들어가면 애들한테 톡방에 인증샷 보내라고 하고.” [아…….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쌤!] “그래. 적당히 놀아.” [악! 쌤!! 조심히 가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음성에 웃어준 이솜은 곧 전화를 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약간 서늘한 바람이 이솜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 [20XX년 4월 XX일 날씨 겁나 좋음 체육대회다. 날이 좋아서 참 다행이었다. 우리 반 애들은 컨셉충으로 잡아 계속 그 컨셉을 유지하더니 결국 인기상까지 타 버렸다. 그런데 도준이가 자꾸 나한테 추파를 던지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도끼병이었으면 좋겠다.(사실 잘 모르겠다.)] * 체육대회가 끝나고 며칠 뒤, 태범의 마지막 교생 실습 일이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교실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자는 거야.“ "아니, 여기에 불을 붙이라고!“ "아- 오바죠? 완전 산으로 가버렸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딱 3학년 8반을 보고 하는 소리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뻗어오는 손길들을 도준이 계속해서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끈덕지게 손들을 뻗쳤다. 결국 본 모양을 잃어버려 차라리 죽여 달라는 모습으로 처참하게 망가진 케이크가 교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와.. 와아-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는 사람?“ "……." "……." 기찬의 맥 빠지는 소리에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자신들이 새롭게 빚어낸 케이크를 바라봤다. 분명 이렇게 하면 더 예쁠 거라면서 자신 있게 뻗은 손들은 다 어디로 도망갔는지, 멀리서 훈수를 두던 그 입들은 어디 갔는지 숨소리만 들렸다. 결국 도준이 한숨을 푹 쉬고 케이크를 들었다. "버리려고?“ "이거라도 써야지.“ "와우. 쌤한테 정말 최고의 추억이 될 것 같네." 도준은 아이들의 걱정스러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교탁에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가까이서 봐도 끔찍했지만, 멀리서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자 해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재하의 말마따나 태범에게 최고의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좋지 않은 쪽이겠지만. 아무튼,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저 케이크를 자신들이 먹어 치우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차라리 하지 말자. 쌤 울겠다.“ "아니면 내가 외출증 끊고 케이크 새로 사 올까?"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했지만 태범에게 파티를 해 주는 시간은 지금이 제격이었다. 반 울상이 된 아이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이솜과 태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꼭 부모님의 꾸중을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그 때, 이솜이 다름없이 앞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교탁 위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 순간을 포착한 아이들은 망했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뒤이어 태범이 들어오다가 교탁 위에 있는 망가진 케이크를 보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쌤.“ "감사합니다!“ "그 동안 즐거웠어요." 아이들은 태범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교실 안은 엉성하게 풍선들로 꾸며져 있었고, 칠판은 틈이 없게 아이들이 마구 낙서를 해 놓았다. 게다가 교탁 위에는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는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고, 그 옆엔 아이들이 저번 주 부터 작성한 롤링페이퍼가 있었다. 태범은 그 모습을 보고 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가르치는 것이 자신이 없어 고민을 많이 하던 중이었는데 아이들이 이런 서프라이즈 파티를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준의 손길에 따라 교탁으로 온 태범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흐엉- 고마워, 흑-“ "와- 운다!“ "찐으로 우는 거야? 대박이다.“ "울지 마세요, 쌤!" 아이들의 놀림과 환호 속에 태범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 본 이솜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교생 실습이 떠올랐는지 바로 웃음을 띄웠다. 사실 태범의 파티를 하겠다고 아이들이 비밀로 해 달라고 했지만, 태범이 울 줄은 몰랐던 이솜은 휴지를 가져와 태범에게 건넸다. 아이들은 앞에서 스승의 노래를 자기들 멋대로 부르고 있었다. "쌤, 이제 촛불 끄세요!" "흑, 응응-" 태범은 겨우겨우 눈물을 삼키고 초를 향해 입김을 후 불었다. 그 러자 얇게 타오르던 불꽃이 꺼져버렸다. 불꽃이 꺼지자마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태범은 아이들을 향해 울먹이며 환하게 웃었다. * 단체 사진까지 찍고 엉망이 된 케이크를 들고 교무실로 돌아온 태범은 눈가에 아직도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그 때, 지은이 탕비실에서 나오면서 태범의 책상 위에 놓인 케이크 박스를 눈에 담았다. "어머, 웬 케이크?“ "아- 애들이 오늘 마지막이라고 작게 파티 해 줬거든요." 감동이라는 표정으로 지은에게 대답 한 태범은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그 표정을 본 지은은 떨떠름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태범은 아까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서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잘 새겨두고 있었다. "태범 쌤, 추억 회상 하는 건 좋은데 수업 가야 하거든요.“ "아, 네.“ 이솜이 태범의 뒤로 다가와 책 한 권을 건넸다. 요즘 교사들에게 알음알음 퍼져나가 많은 교사들이 읽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책이었다. 태범은 그 책을 받아들었다. "이건 내 선물.“ "감사합니다……." 태범이 갑작스럽게 건넨 이솜의 선물에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모습에 이골이 난 이솜은 태범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로 돌아가 교과서를 챙겼다. 이솜이 태범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을 본 지은은 혀를 쯧쯧 찼다. 도대체 왜 저러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임 첫 날 부터 모든 선생님들의 관심을 독차지 하더니, 이제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이솜에게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이 있던 지은은 툭하면 이솜에게 시비를 걸었다. 게다가 지은이 직접 대단한 걸 목격 한 이후로는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버렸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솜은 교과서를 챙기고 걸어 나갔다. 뒤 이어 태범이 허둥대며 이솜을 따라 나갔다. 그 마저도 참 꼴 보기 싫었다. "자기, 무슨 일 있어?" 지은이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는지, 은지가 지은에게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지은은 화들짝 놀라면서 아무 일도 없다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인상 쓰면 주름 져~ 웃으면서 다니란 말이야, Smile~" 스마일은 개뿔, 작게 중얼거린 지은은 은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지은의 웃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은지는 곧 제 자리로 돌아갔다. 지은은 손톱을 입 가까이로 가져갔다. 이렇게 선생님들의 관심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쏠려야 했다. * 종례까지 마치고, 태범을 위한 작은 파티가 회식 겸 이뤄졌다. "크으- 태범씨 온 지 별로 안 된 것 같은데, 시간 참 빨라." "그러게요. 선생님들하고 정 다 들었는데 아쉬워요." "하하! 임용 보고 우리 학교로 지원 해! 어차피 사립이라 웬만하면 다 계실거야! 하하하!" 아쉬워하는 태범의 등을 두드린 진우가 호탕하게 웃었다. 태범은 꼭 그러마 하고 약속 하곤 진우가 건넨 술을 받아 마셨다. 그 옆에서 조용히 회를 집어 먹던 이솜이 눈에 들어온 지은은 이솜에게 나지막이 말 했다. "어머, 이솜 쌤. 회를 초장에만 찍어 먹어요? 먹을 줄 모르네-" 별 같지도 않는 트집이었다. 지은은 아직 어려서 뭘 모른다는 둥- 꼰대 같은 말만 내뱉고 있었다. 체육대회 이후의 회식이었어도 함께 먹는 저녁은 오랜만이어서 많은 선생님들이 지은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솜은 지은의 공격을 아무런 수비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 제가 회는 많이 안 먹어서요.“ "회도 많이 안 먹어보고 여태 뭐 하고 살았대? 재미없게 산다." 이죽이는 지은의 말에 이솜은 그냥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발끈 해 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시답잖은 말에 하나하나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솜은 자세가 불편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은은 흐리멍덩한 이솜의 반응이 짜증이 났는지, 일부러 이솜의 움직임에 따라 컵을 툭 쳐서 엎었다. 물이 가득 담겨 있던 컵이 넘어가면서 지은의 바지를 흥건하게 적셨다. "아, 차가워!“ "어머, 어머! 이모님, 여기 수건 하나만 주세요!" "괜찮아요, 지은 쌤? 차갑겠다." 지은의 반응에 순식간에 모든 이목이 지은에게 집중 되었다. "하- 이솜 쌤. 조심 좀 하셔야죠." 지은이 짜증난다는 듯이 그러나 이해 한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솜에게 말 했다. 이솜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컵을 쳤나? 지은은 민겸이 건넨 수건을 받아들고 바지를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은지는 이솜을 바라봤다. "자기가 테이블 건드렸어? 어휴, 물 다 쏟아서 지은 쌤 바지가 다 젖었어.“ "아…… 진짜요? 죄, 죄송해요.“ "됐어요. 앞으론 조심 해 주세요." 은지의 나무람에 이솜은 일단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지은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지은은 사과 하는 이솜을 바라보지도 않고 바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솜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이솜의 모습과 자신에게만 집중 해 주는 분위기를 읽은 은지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대충 닦은 바지는 어느 정도 수건으로 물기를 흡수 시켰는지, 찝찝함이 많이 가라앉았다. 지은은 곱게 접은 수건을 한쪽으로 치운 뒤 선생님들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저 때문에 놀라셨죠, 죄송해요.“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바지 괜찮겠어?“ "네. 수건으로 닦아서 괜찮아요." 은지는 차분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신규 회원 꿀혜택 드림
스캔하여 APP 다운로드하기
Facebookexpand_more
  • author-avatar
    작가
  • chap_list목록
  • like선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