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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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과 도준은 어색한 매점 데이트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그 때, 사람들이 밖으로 우루루 몰려 나왔다. 민정은 도준에게 인사를 하고 재빠르게 친구들 무리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도준도 아이들을 찾다가 그냥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 빠를 것이라 생각하고 8반자리로 향했다. 푸른 도포가 흩날리면서 걷는 모습은 정말 선비 같았다. 도준이 지나가자 그 옆에 있던 여고 학생들이 꺄악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모든 학생들이 자리로 돌아가자 진우가 다시 구령대 앞으로 나왔다. "자, 미션 달리기 차례입니다. 미션 달리기를 **한 학생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모여주세요." 끝을 달리고 있는 시간이라 그런지 아이들의 집중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선수로 출전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생생했다. 미션달리기에 이름을 적은 도준이 갓을 벗어서 수혁에게 맡기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에 여고 무리가 함성을 지르자 도준이 팬 서비스 차원으로 뒤를 돌아 손을 흔들어줬다. "나 봤어!“ "미쳤나, 나 보고 흔들어준거야!" 아이돌 콘서트의 새우젓 중에 한 마리의 새우가 된 여고 학생들은 서로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들어 준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도준이 운동장에서 몸을 가볍게 풀고 있었다. 가장 첫 번째 주자로 달려야 하는 도준은 출발선에 서 있었다. "미션 달리기 첫 번째 주자들 모두 출발선에 서 주세요." 곧 휘슬이 불고 튕겨 나가듯 선수들이 출발했다. 앞머리가 시원하게 까지면서 도준의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저 앞에 있는 미션지를 향해 달려간 도준은 긴 손으로 낚아 채 내용을 확인 했다. 미션지를 읽자마자 도준의 머리속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미션을 수행하기에 매우 적합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으니. 그래도 조금 고민하던 도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8반을 향해 뛰어갔다. 도준의 앞엔 민정이 있었다. 아까 대차게 까인 민정이었지만 잘난 얼굴로 웃으며 다가오니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민정의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민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더 난리를 피웠다. 어머, 어머! 너한테 오는 거 아니야? 미쳤다, 저 오빠. 선수네, 선수! 민정은 친구들의 말이 아득하게 들리며 도준의 환한 얼굴만이 시선에 가득 찼다. "쌤!" 하지만 도준은 민정의 뒷 뒷자리에 앉아 있는 이솜에게 손을 뻗었다. 민정의 시선은 여전히 도준에게 꽂혀 있었지만 더 이상 아득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민정의 귀에 대고 아, 실망이다 라며 속삭이고 있었다. 민정은 순간 설레였던 자신이 미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민정이 질투심으로 뒤를 돌아보자 이솜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선생님인데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예뻤다. 예쁨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민정은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저래서 날 거절했구나 싶었다. 도준은 아직도 멍하니 있는 이솜에게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계속 뻗었다. "빨리요, 늦어요!" 도준의 다급한 말에 이솜은 일단 허둥지둥 내려왔다. 이솜의 손목을 잡으려던 도준은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아, 자, 잠깐만!" 이솜이 도준의 달리기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자 뒤에서 헉헉 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도준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별안간 이솜의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이해 할 수 없는 도준의 행동에 이솜은 당황해했다. "뭐 해!“ "업히세요.“ "뭐? 미쳤어?“ "이러다 꼴지 해요!" 꼴지한다는 말에 이솜은 군소리 없이 바로 업혔다. 무겁지는 않을까? 뒤에서 볼 때 이상하면 어떡해. 복잡한 생각이었지만 이솜이 등에 업히자마자 도준은 벌떡 일어나 결승선으로 마구 달렸다. 다른 선수들은 미션지 안에 내용을 충족할 만한 것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꼴지를 할리 없었던 것이었다. 도준의 뒤에 매달린 이솜은 몸이 마구 흔들려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도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결승선을 통과 하자마자 이솜을 내려 준 도준은 몸을 돌려 그녀와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손을 들었지만 이마를 잡고 고통에 찬 숨을 내 쉬고 있었다. "쌔, 쌤! 괜찮으세요? 어떡해.“ "으- 어지러워…….“ "죄송해요! 미쳤나봐, 김도준!" 도준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이솜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어깨나 손목을 잡고 안색을 살피려고 했지만 아까 보건실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어지러움이 해소 된 이솜은 고개를 들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준을 바라봤다. 명치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미션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기에 나를 데리고 와?“ "…….“ "뭐야. 뭐, 제일 싫어하는 사람 데리고 오기 이런 건가?“ "아, 아니요……." 도준은 순수하게 물어오는 이솜을 차마 바라 볼 수 없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솜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말 해봐.“ "제일 예, 예쁜 사람 찾아오기요…….“ "……." 도준이 얼굴을 폭 가리며 말 하자 이솜은 입을 벙긋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폭탄 발언을 한 도준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되돌아갔고, 이솜도 멍하니 있다가 도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부끄럽다는 얼굴로 제일 예쁜 사람 찾아오기, 라고 했을 때 솔직히 심장이 떨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 중에 이솜도 포함 됐다. 그 때 이솜의 머릿속에서 또 싸움이 일어났다. 너 지금 학생을 두고 뭐 하는 거야? 뭐 어때, 도준이는 성인이라고! 너 윤리교사 맞냐? 윤리교사는 사람 아니야? 조금 이상한 점이라고는 나쁜 마음이 윤리 교사의 신념을 지키고 있었고, 착한 마음이 도준이는 성인이라고 화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태범은 멍한 표정으로 돌아오는 이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멀리 있어 듣지는 못 했지만, 이솜의 마음에 태범이 들어 갈 일은 없을 것이라 짐작 되었다. 태범은 우울했다. 분명 자신에게 기회가 더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솜의 표정을 보아하니, 기회는 자신이 아니라 도준에게만 있었다. "자- 드디어 마지막 종목입니다. 체육대회의 꽃이라 불리는 계주인데요. 계주 선수들은 모두 모여주세요.“ "우리 반 계주 누구야?!“ "남일이?" 8반대표 발 빠른 남일이가 계주 선수로 운동장에 나갔다. 남일이의 여자 친구는 조심히 다녀오라며 남일이에게 손 인사를 해 줬고, 남일은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에, 몇 여자아이들은 설레어하기도 했다. 계주는 남일의 활약으로 1등을 거머쥐었다. 물론, 1학년 8반과 2학년 8반도 함께이긴 했다. 마지막으로 모두 운동장에 모여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순위권 발표가 이뤄졌다. "아- 다들 고생 많았어요. 가장 먼저 3등 발표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의 필두로 3등, 2등, 1등이 차례대로 호명됐다. 당연하게도 8반은 그 곳에 없었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했지만 크게 활약한 종목이 없었기 때문에 순위권에서 한참 밀려났다. 하지만 8반 아이들은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콘셉트에 미친 자로 인기상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인기상 되겠지? 도준이형네가 제대로 캐리 했는데.” “안 받으면 운동장에 그대로 드러눕는다.” “응- 혼자 해” "그럼 인기상 발표가 있겠습니다. 이번 인기상은 누가 봐도 시선을 잡아끄는 반에게 줄 건데요.“ 교장 선생님이 운동장에 있는 학생들을 쭉 둘러봤다. "와아아!!“ "조용, 조용! 자자- 그 선비 있는 반 어디죠?“ "3학년 8반이요오옥!!!" 교장 선생님은 8반을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너희가 타는 거야. 정말 우리가 인기상이에요? 두 눈빛이 교환이 이뤄졌고 마이크에서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이솜 선생님 반, 3학년 8반!“ "와아아악!!“ "축하합니다. 반장 있으면 나와서 상품 수령 해 가세요." 교장 선생님의 말에 도준이 기뻐하는 아이들 사이로 훌쩍 뛰어 구령대로 올라가 상금을 수령했다. 상금은 20만원으로 3등보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아이들은 그마저도 기뻐하고 있었다. 이것만 노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솜은 앞에서 아이들의 온갖 하이파이브를 다 받아주고 있었다. "소감 발표 해야지.“ "아, 네. 흠흠- 안녕하십니까. 3학년 8반 반장 김도준 입니다." 도준이 자신을 붙잡은 교장선생님의 말에 따라 마이크 앞에 섰다. 스탠드 마이크는 도준의 키에 한참 못 미치게 설정 되어 있어서 의도치 않게 연예인들이 상을 받을 때처럼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도준이 말을 하자 스피커에선 도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운동장은 자연스럽게 함성 소리가 퍼졌다. "꺄아악!“ "오빠 멋있어요!“ "고마워요." 그 목소리에 여고 학생들이 반응했다. 꼭 아이돌 콘서트 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도준은 들려오는 칭찬에 눈웃음을 치며 화답했다. 그 눈웃음에 몇 여학생들은 나 죽어, 하면서 쓰러지는 척까지 했다. "아무튼, 인기 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쌤들.“ "형! 콘셉트 유지 해야죠!“ "아, 맞다." 8반에서 들려온 충고에 목을 흠흠 가다듬은 도준은 갓을 고쳐 쓰며 다시 허리를 숙여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큰 상을 주신 것에 감사하오. 내 비록 부족했지만 그대들이 기뻤다면, 나도 한 없이 기쁘구려.“ "꺄아악! 오빠아아!!“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오. 그럼 이만 물러나겠소." 도준은 예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유지하며 내려갔다. 도준의 움직임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과 소리가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자리로 돌아간 도준은 옆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환호 소리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마저도 멋있어 보이는 게 탈이었지만. 그렇게 체육대회는 도준이의 지독한 콘셉트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후에 여고 사이에서 도준을 찍은 영상과 사진들이 나쁘지 않은 가격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 체육대회가 끝나고 8반에서 번개 모임이 형성 됐다. 주최자는 기찬으로, 기찬을 중점으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참가했다. 장소는 로데오 거리 근처 고기 뷔페 집이었다. 받았던 상금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 부분은 담임과 함께 상의 후 결정하자는 도준의 말에 아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이솜과 태범이 오지 않았음에 불만을 살짝 터뜨렸으나, 그 둘은 선생님들의 회식자리에 참석해야만 했다. "자- 다들 고생 많았다. 인기상 받았으니 만족하지?“ "당연하죠, 형님.“ "너희가 아직 학생이라 같이 짠 할 수는 없지만, 사이다라도 따르자." 도준의 말에 아이들은 낄낄 대면서 컵에 사이다를 가득 담았다. 도준이 사이다가 든 컵을 높이 들며 외쳤다. "형 말을!“ "잘 듣자!!" 도준의 선창에 아이들이 웃으며 후창을 외쳤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이다를 넘겼다. 탄산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목을 치는 아이들도 있었고, 재빠르게 고기를 입에 넣는 아이들도 있었다. "……너희 지금 뭐하니?" 갑자기 들려온 이솜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순간 행동을 멈췄다. 이솜은 도준이 컵을 높이 드는 시점에 고깃집에 들어왔고, 그 뒤에 아이들이 컵에 든 무언가를 마시고 난 뒤, 괴롭다는 듯이 목을 두드리거나 급하게 고기를 집어 먹었다.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그 때, 기찬이 벌떡 일어나 굳어 있는 이솜에게 다가갔다. "쌔, 쌤. 술이 아니라 저희,“ "너희 술 마셨어?! 미쳤어!?!?“ "아니요!! 사이다에요, 사이다!" 기찬이 억울하다는 듯이 컵을 이솜에게 건넸고, 이솜은 그 컵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코를 박아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달달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보아하니 술이 아니었다. 이솜은 순간 머쓱해져서 미안하다며 기찬에게 컵을 돌려줬다. 기찬은 웃으며 이솜을 자리로 안내했다. 이솜이 안내 받은 자리 옆에는 도준이 있었다. "아냐, 나 잠시 나온거라 다시 가야 해.“ "아- 쌤. 저희랑 같이 먹어요!“ "나도 사회생활은 해야지.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어. 사이드 메뉴 정도는 쌤이 쏜다!“ "와아아아!!" 모든 아이들이 밥값을 내 주기엔, 이솜의 통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솜의 말에 아이들은 신난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무언갈 더 추가하지 않았다. 이솜은 정말 잠시 나왔는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의 질척거림은 덤이었다. 이솜은 그 질척거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 피해버리고 나가버렸다. 미련 없어 보이는 그 행동에 도준은 입을 삐쭉였다. 그래봤자 이솜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형, 이번만 기회는 아니잖아.“ "맞아. 근데 아까 운동장에서 뭐라고 했길래 그렇게 부끄러워 한 거야?“ "애들은 몰라도 돼.“ "……형도 딱히 어른은 아니거든." 수혁의 말에 도준은 못 들은 척 하며 상추를 뒤적거렸다. 아, 완전 술 각이다. 도준은 자신의 볼을 몇 번 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수혁은 별안간 일어난 도준을 올려다봤다. 도준은 샐쭉 웃으며 가슴팍을 살짝 두드렸다. "식전 땡.“ "어우, 냄새 다 빼고 와!" 수혁이의 짜증에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짧은 시간에 이솜은 사라졌고, 도준은 근처 골목으로 들어가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체육대회 덕에 교복을 입지 않아서 아무도 도준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후-" 입에 머물러 있던 연기를 밖으로 내뿜자, 연기가 하늘로 곧게 치솟더니 곧 사라졌다. 그러곤 아까 미션 달리기를 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곱씹어 봤다. 왜 미션 내용을 솔직히 말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기 초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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