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솜.“
[무슨 일이야?]
"아니, 내일 영화 개봉하는데 혼자 갈 것 같아서. 너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지.“
태범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내 뱉었다.
[…….]
"……."
몇 초간의 정적 후 이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무슨 영환데?]
"어, '황태자의 비밀 선생님'“
[제목 진짜 별로다. 재미없을 것 같은데?]
"아, 아냐! 감독이 봉준오래!“
[그래?]
제목만 듣고 노잼 냄새를 풍기며 무심하게 말한 이솜이 재작년 히트로 유명세를 탔던 감독의 이름을 대니 목소리가 변했다. 그리곤 단번에 OK 까지 해 버렸다.
태범은 그럼 내일 오후 3시에 영화관 앞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데이트라니, 데이트라니! 물론 이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침대에서 이리저리 구르던 태범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꺄악-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동생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올 때 까지 소리를 질렀다.
한 편, 이솜은 휴대폰 메신저 목록을 곤란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태범과 전화를 끊고 나니 도준에게 한 통의 연락이 온 것이었다.
[쌤 저희 내일 노는데 쌤도 같이 놀아요. 애들이 놀자고 난리에요. 저는 절대 못 말립니다.]
물론 도준의 개 뻥이었지만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이솜은 긴 머리를 한번 털었다. 이놈들은 선생님이 놀이 친구인 줄 아는 거야 뭐야, 중얼거린 이솜은 분노에 가득 찬 손가락으로 답장을 했다.
[쌤 내일 약속 있음.]
[?? 왜요?]
[나는 약속 있으면 안 돼? 아무튼 너네끼리 놀아.]
"선생님은 너희의 놀이 친구가 아니거든."
이죽거리며 말한 이솜은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 한참 침대에 누워 있던 이솜은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냉장고엔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는 음식 종류밖에 없었다.
'항상 잘 챙겨 먹어야 해, 알겠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 하던 한 여자가 떠오르자, 샐러드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한숨을 푹 쉰 이솜은 결국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곳에 있는 마트로 향한 이솜은 저녁 시간이라 사람들이 꽤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 혼자 장을 볼 생각에 진이 빠진 이솜은 그냥 시켜 먹을까 하다가 생각을 고치고 마트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쇼핑카트를 끌고 식료품이 있는 1층을 왔다 갔다 거렸다. 쌀은 있으니 안 사도 되고, 간단하지만 적당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한참 고민했다.
"어? 약속 있으신 솜 쌤이잖아.“
"?“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니 도준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저 자취 하거든요.“
"왜?“
"저는 자취 하면 안돼요?"
아까 이솜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한 도준은 카트를 들이밀며 생긋 웃었다. 도준의 카트 안에는 기본적인 식료품들과 술이 들어 있었다.
잉?
"야, 김도준. 여기에 왜 술이 있어?“
"아, 엥? 왜, 왜 술이 여기 담겨 있지?"
도준은 매우 당황스러워 하며 카트 안을 살펴봤다. 저 것은 누가 봐도 술이었다. 도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이솜에게 아니라며 해명하려고 했지만 이솜은 표정이 잔뜩 굳었다. 당장이라도 와다다 하며 잔소리를 내뱉을 얼굴이었다.
"형- 과자 더 사도 돼?"
그 때 멀리서 수혁이 과자를 한 아름 들고 도준에게 다가왔다. 수혁은 앞에 있는 이솜은 보지 못 했는지 신난다는 표정으로 도준의 카트에 과자를 담다가 눈에 띄는 술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웬 술?"
수혁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도준을 올려다봤다. 수혁의 눈에는 표정이 잔뜩 굳어서 자신이 아닌, 앞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혁은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드는 싸한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준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 곳엔 이솜이 서 있었다.
수혁은 과자를 카트 안에 내려놓고 조용히 입을 막아버리더니 그 숨 막히는 자리를 떴다.
"김도준.“
"아, 아니……."
당황스러운 표정의 도준은 손까지 절레 저었다. 해명 할 시간을 주고 싶었으나 어쨌든 이솜은 도준의 담임 선생님이었고, 성인이었지만 학생 신분을 가지고 있는 도준은 미칠 것 같았다.
*
결국 도준은 술을 제외한 모든 건전한 것들만 구매 할 수 있었다. 도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수혁의 손에 들린 봉지를 바라봤다.
"줘, 내건 내가 들게."
그 때 이솜이 도준의 손으로 제 손을 뻗었다. 수혁은 도준의 집으로 갈 짐을 들고 있었고, 도준은 이솜의 집으로 갈 짐을 들고 있었다.
“아니에요. 무거우니까 제가 들고 갈게요. 쌤 집 어디에요?”
“집까지 오려고?”
“그럼 무거운데 들고 가시게요?”
“응.”
도준은 짐을 들어 준다는 핑계로 이솜과 함께 집까지 걸어가고 싶었지만 이솜은 단호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도준은 괜히 어깨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이솜에게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어서 내놔. 너희 집은 어디야?”
"그럼 근처 까지만 갈게요!”
"……알겠어."
애원하듯이 말하는 도준의 말 때문에 이솜은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했다. 도준은 마냥 좋은 표정을 지었고, 이솜은 살짝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수혁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집 먼저 가 있을게. 애들 올 시간 됐어.”
"그래? 알겠어. 비번 알지?”
"응. 솜 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가려고? 알겠어, 조심히 가.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네, 안녕히 가세요."
수혁은 눈치껏, 아니 사실은 도준의 ‘당장 사라져’ 라는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빠져줬다. 수혁은 두 손 가득 들려 있는 짐을 가지고 도준의 집으로 향했다. 한 골목으로 빠지는 것을 보아하니, 꽤 좋은 오피스텔에서 머무는 듯 했다.
수혁과 헤어진 두 사람은 조용히 이솜의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는 이솜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쌤,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
이솜은 말 하라는 듯이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간간히 이솜과 눈을 마주쳤다. 마주칠 때 마다 심장이 왜 이리 간질거리는지, 당장이라도 날아 갈 것만 같았다.
"내일 누구랑 약속 있는 거예요?“
"비밀.“
"치사해."
도준은 툴툴거리면서도 비밀이라는 이솜의 말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솜은 그런 도준을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웃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이솜을 눈치 채지 못하고 도준은 입을 댓빨 내밀어 '나 삐졌음!'을 확연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어느 덧, 이솜의 오피스텔 근처 골목에 도착한 두 사람. 이솜은 손을 뻗어 도준이 들고 있는 짐을 제가 들었다.
"무거울 텐데.“
"……."
짐을 들자마자 도준이 툭 내 뱉은 말은 실제가 됐다. 이솜이 혼자 들기엔 꽤 많이 무거운 무게였다. 도준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냥 번쩍 들기에 그렇게 무겁지는 않은 듯 해 보였는데, 제 팔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솜은 억지로 웃었다. 분명히 표정은 웃음이 가득했지만 식은땀이 한 바가지는 쏟아지는 것 같았다.
"괘, 괜찮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식은 땀 나는 거 아냐?"
이솜은 은근슬쩍 말을 놓는 도준의 말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말투보다는 당장 도준이 사라져야 이 망할 무거운 짐 덩어리를 질질 끌고 들어갈 테니까. 이솜은 제발 도준이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낑낑대며 봉지를 안고 있는 이솜을 본 도준은 한숨을 푹 쉬고 이솜의 품에서 짐을 빼앗았다.
"어!“
"그냥 제가 들게요, 무겁잖아요.“
"괜찮다니까.“
"집 안까지 안 들어가요. 집이 어디 있는지 알아도 안 찾아가고, 애들한테 말도 안 할게요.“
"……."
이솜은 도준의 말에 그를 쳐다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이솜을 향한 걱정이 가득 느껴졌다. 도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솜에게 믿음을 줬다. 한참 망설이던 이솜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변을 내 준 적은 있지만 곁까지는 허용하지 않는 그녀로선 장족의 발전이었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인 이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이솜보다 조금 뒤에서 그녀를 졸졸 따라갔다. 한 건물 앞에 멈춰 선 이솜은 몸을 돌려 도준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줘도 돼.“
"여기가 쌤 사는 곳이에요?“
"……응.“
"그렇구나, 치안 나쁘지 않네. 알겠어요, 그럼 저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요.“
"고마워, 도준아. 조심히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며 치안을 운운한 도준은 제가 들고 있던 봉지를 이솜에게 넘겨주곤 미련 갖지 않고 몸을 돌려 단지를 빠져나갔다. 이솜은 제 품에 들려 있는 봉지를 한참 쳐다봤다. 분명 무거워서 들고 있기도 벅찼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
이솜은 평소와 다르게 종아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시폰 원피스와 얇은 재킷을 걸쳤다. 누가 보면 열심히 꾸민 줄 알겠지만, 그냥 보이 길래 주워 입었을 뿐이었다. 정말이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태범은 전희 그런 의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마 오늘이 고백하는 날인가? 나 아직 준비 안됐는데.
전국 8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모든 김칫국물은 다 쓸어 담아 마시는 태범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이솜은 태범이 영화를 쏘는 대신 자신이 팝콘을 사겠다면서 영화관 스낵코너에서 팝콘과 콜라를 받아 들고 있었다. 태범이 이솜의 손에 들린 콜라를 받아 들었다.
"아, 고마워.“
"뭘. 지금 올라가면 시간 딱 맞겠다.“
"그래."
이솜은 품에 팝콘을 든 채로, 태범은 양 손에 콜라를 든 채로 상영관 쪽으로 향했다. 순간 태범의 머리 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8반 아이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어? 솜 쌤 아냐?"
어쩜 태범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뒤에서 들리는 낮고도 명랑한 목소리에 뒤 돌아보려는 이솜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솜은 고개를 차마 다 돌리지 못하고 태범에게서 멈췄다.
태범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 돌아 보지 말라는 무언의 뜻에 이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범은 그런 그녀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7관 H열 7번, 8번입니다. 즐거운 영화 관람 되십시오."
안내를 받고 들어간 상영관은 막 불이 꺼져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도 이제야 속속들이 들어와 비어 있는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태범과 이솜도 제 자리를 찾아서 착석했다.
자리를 정비한 이솜은 품에 있는 팝콘을 들어 입에 넣었다.
"콜라 줘?"
태범이 이솜의 행동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콜라를 건넸다. 솜은 입 안에 있는 팝콘을 씹으며 태범이 건넨 콜라를 받을 때 손이 살짝 스쳤다. 그 때 태범의 심장이 목에서 뛰는 듯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이 각이라고.
"아, 죄송합니다.“
"으- 어두워."
익숙한 목소리에 태범의 심장이 아래로 쿵 가라앉았다. 제발 아니길 바랐다.
"어? 솜 쌤?“
"응?"
이솜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한터가 있었다. 그 때, 한터 뒤에 서 있던 도준이 한터의 어깨를 꾹 눌러 자리에 앉혔다. 도준과 태범의 눈이 공중에서 딱 마주치고, 타이밍도 좋게 영화의 배급사 인트로가 화면에서 흘러나왔다.
도준은 태범과 이솜에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도준의 옆에 있는 한터는 어버버 거리며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도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빵한 모습에 웃음이 터진 도준은 한터의 팔뚝을 주먹으로 툭 쳤다. 그러자 한터가 정신을 차리며 도준에게 속삭였다.
"형,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러게.“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 그러다가 뺏긴다!"
한터의 뼈 있는 말에도 도준은 그저 무심하게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태범은 아까 도준의 마주친 눈빛이 여간 신경 쓰였다. 분명 그 눈빛은, 뭔가를 빼앗긴 듯한 눈빛이 분명했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 생각에 설마- 하며 그 눈빛을 넘겼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그 형형한 눈빛이 살아 움직였다.
결국 영화도, 이솜에게도 집중을 하지 못한 태범은 멍한 표정으로 상영장을 빠져나왔다.
"으아- 존잼! 애들은 왜 다른 거 봤어?“
"공포 영화 본다고 그랬잖아.“
"으으- 공포 영화 진짜 싫어. 그런데 봄인데도 공포 영화가 나와?“
"글쎄."
뒤에서 쫑알거리는 두 사람의 소리에 태범은 신경이 온통 그 쪽으로 향했다.
상영관에 들어오기 전에도 들려왔던 목소리였는데, 지금도 들리다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솜과 함께 이 영화관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솜은 이미 그들을 향해 몸을 돌린 뒤였다.
"어, 쌤! 이제 가세요?“
"그래야지. 근데 너희 공부 안 해?“
"에이- 공부는 학교에서 열심히 하잖아요!"
당당한 한터의 말에 이솜은 헛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진지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도준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했다.
딱히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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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4월 XX일
태범이랑 영화를 보러 갔는데 반 애들을 만났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고3이 탱자탱자 놀기만 하다니..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