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솜은 아이들의 빠른 하교를 위해 재빨리 교실로 향했다. 사실 종례를 언제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최대한 빨리 종례를 해 달라는 아이들의 피드백을 수용 했다. 별 내용 없는 종례를 마치고 아이들을 배웅한 이솜은 교무실에서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3월 초보다 확실히 길어진 해를 보고 잰 걸음으로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쌤!"
교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멀리 빼고 살펴보니 교문에는 도준과 기찬, 한터, 재하, 수혁이 서 있었다. 어딜 가든 항상 같이 다니는 멤버인지, 이솜은 저 다섯 명의 녀석들이 따로따로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하도 밝게 인사를 해서 이솜은 지나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에 서 있어?"
"간지 나잖아요.“
도대체 어디에서 간지를 추구 하는 건지 이솜은 재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별 이상한 애 다 보겠다는 이솜의 표정을 읽지 못한 재하는 그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아, 그래. 그럼 난 가 볼게."
"에헤이- 쌤, 쌤 네 집에 뭐 꿀단지라도 있어요?"
"꿀단지는 없고 소중한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와- 철벽 어쩜 좋아. 그렇지, 형?"
기찬과 한터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답을 해주고 재하가 도진을 툭 치며 물었다. 아무 말 않고 이솜을 쭉 바라보고 있던 도진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쟤 방금 네가 한 말 못 들은 것 같은데……. 이솜은 무심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 나 자라."
"저희 노래방 갈 거예요!"
"아니, 내 말은 안 들리니?"
"쌤도 같이 가실래요?"
"……."
벽이랑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 손을 휘휘 저은 이솜은 다시 원래 목표로 삼은 집 방향으로 걸음을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이솜의 뒤를 따라오더니 어느 순간 자신들 사이에 이솜을 넣어 놓고 함께 걷고 있었다. 뭐지? 왜 이렇게 자연스러워? 너무 당황스러워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 망아지 같은 자식들은 이솜을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얘들아, 집에서 침대가 외롭다고 울고 있단 말이야.’
지금은 침대가 아니라 본인이 울 것 같은 기분에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풀어 준 것 같아 이솜은 눈을 형형하게 뜨고 나름의 사자후를 내 뱉었다.
"야! 쌤이 만만해?"
"……."
"……."
좋아 먹혔어.
"……오~ 큰 소리도 내실 줄 아네요?"
"나 반 했나 봐, 심장이 쿵쿵 거려!"
먹힌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이솜이었다. 이솜의 말에 반한 것 같다는 헛소리를 하는 수혁의 머리에 도준이 꿀밤을 놓았다. 꿀밤 맞은 자리를 슥슥 문지르는 수혁은 이솜이 듣지 못하게 중얼중얼 딴 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도준이 급하게 수혁의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을 본 이솜은 그냥 무시하고 걷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학교랑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기도 하면서 은근히 거리에 위치하는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이솜은 한 블록만 더 가면 집에 들어 갈 수 있어서 아이들을 먼저 보내기 위해 돌연 걷는 걸 멈췄다. 덕분에 그녀의 뒤에서 걷던 재하가 이솜과 살짝 부딪혔다.
"아, 쌤.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요."
"너희 먼저 가."
"왜요? 학교에 뭐 놓고 오셨어요?"
"아니. 이제 곧 우리 집이거든.“
이솜의 말에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와- 집들이!"
"야,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우루루 들어가면 얼마나 이상해 보이겠냐."
웬일인지 정상적인 말을 하는 기찬이 아이들을 막았다. 그 모습이 기특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한 명만 대표로 들어가는 거로 하자."
아니, 내가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고 싶다고 했었나?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때 도준이 이솜의 앞을 막아섰다. 넓은 등 때문인지, 이솜의 앞은 도준의 등으로 세상이 막혀 그의 등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곤란해 하시잖아. 그러니까 내가 대표로 갈게."
아오, 나이 한 살 더 많다고 딱히 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한숨을 푹 쉬고 장난 식으로 도준의 등을 퍽 치니 이솜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옆으로 비켜서며 킬킬 댔다.
"쌤, 저희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제발 빨리 가."
"내일 학교에서 봐요!"
다행히 장난이었는지 아이들은 먼저 우루루 몰려갔다. 아이들을 바라 본 이솜은 눈에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준은 뒤를 힐끔 바라봤지만 이미 없어진 이솜의 모습에 아쉬워 입맛만 쩝 다셨다.
"형, 쌤 진짜로 좋아해?"
재하가 도준을 툭 치며 물어왔다. 처음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한 것 같다면서 밀어 달라고 한 도준의 설렘 가득한 표정이 재하의 머리속에서 영 잊혀지지 않았다. 도준은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표정으로 저보다 작은 재하를 바라봤다. 재하는 오랫동안 봐 온 형이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아 속으로 짧게 애도를 표했다.
"여고에서도 형의 빛나는 와꾸를 보러오는데, 이런 갓 와꾸를 보고도 안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니. 형 미모도 이제 끝인가봐."
한터의 장난스러운 말에 기찬이 한터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아프다며 몸을 배배 꼬던 한터는 도준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준은 한터의 말이 마음에 못내 걸렸다.미인계로 사람을 꼬시는 쪽은 아니었지만, 넘어온 사람들의 증언을 듣자하니 모두 도준의 얼굴부터 시작된 호감이었다. 본능적으로 예쁜 것을 찾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이솜은 영 쉼게 넘어 오지 않았다. 도준은 애초에 이솜과 이성적인 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시작점을 잘못 짚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은 이솜을 제외한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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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3월 XX일 날씨 선선
도준이에게 사실대로 모든 것을 고백했다. 잘 풀려서 다행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섭게 말을 했을까.. 솔직히 말 하자면 바로 잘리는 줄 알았다ㅠㅠ 게다가 이제 곧 교생이 오는데, 내가 잘 챙겨 줄 수 있을까? 지금도 잘 못하는데 후배 앞에서 더 못하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을 거다. 심란해..]
*
"안녕하세요, 청운대학교에서 온 교생 이태범이라고 합니다. 두 달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싹싹한 교생의 인사에 식당에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환호를 하며 태범에게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태범은 그런 반응이 부끄러운지 씩 웃으며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래요, 태범씨. 실습이긴 해도 실전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달 동안 열심히 해 주세요."
"네, 교장 선생님!"
저녁 시간, 아이들도 석식이라 다음 주 부터 출근 할 교생을 데리고 학교 근처로 회식을 왔다. 두 명의 교생이 오기로 했지만 다른 한 명의 급작스러운 휴학 행 루트 때문에 결국 청운 고등학교에는 태범만 교생 실습을 오기로 했다. 금요일이긴 해도 야자 감독을 하는 선생님들은 식사만 하고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낀 이솜은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있었다. 이솜의 옆 자리에 앉은 태범은 이것 저것 얘기를 하다가 그가 이솜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됐다.
“어머, 어떻게 알고 있어요? 둘이 만날 접점이라도 있었나?”
은근한 눈빛으로 이솜을 바라보던 은지는 다시 태범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아, 4년 전액 장학생인데 나이도 2살이나 더 어려서 유명해요. 아마 지금 학번까지 알고 있을거에요.”
“와- 자기 전액 장학생이였어?"
은지의 큰 목소리에 다른 선생님들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솜을 바라봤다.
“아하하- 네.”
“성적 좋았나 봐.”
딱히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에 이솜은 더 이상 학교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게끔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태범과 이솜을 둘러 싸고 앉은 선생님들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신나게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 호기심 많은 진우가 둘을 번갈아보며 쳐다봤다.
“그나저나, 태범씨랑 이솜 선생님이랑 나이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건가?”
“솜 쌤이 22살이라고 했었나?”
“어, 저도 22살이예요.”
“와우, 어쩜 이런 우연이!”
나이 얘기로 시작한 대화는 둘이 우연이라느니, 인연이라느니 두 사람을 점점 커플로 몰아가고 있었다. 태범은 이솜과는 오늘 처음 봤다면서 몰아가는 분위기를 깨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본 놀잇감에 재미를 붙인 선생님들은 이 때가 기회다 싶어 물고 늘어졌다. 그런 선생님들을 버거워 하는 이솜과 태범을 대신해 은지가 맥을 끊었다. 그러자 두 사람을 힘들게 했던 주제가 넘어가고 자연스럽게 다른 선생님이 대화를 주도했다. 이솜은 태범을 향해 민망한 듯이 말 했다.
“미안해요.”
“선생님이 미안 할 게 뭐가 있어요. 괜찮아요.”
두 사람은 같은 학교, 같은 나이를 계기로 사석에선 서로 반말을 쓰기로 했다. 물론 태범은 처음엔 거절 했지만 강요에 가까운 이솜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선생님은 술 안 드세요?"
교장 선생님에게 술잔을 받은 태범이 이솜에게 작게 물어봤다.
"아, 저는 술은 좀……."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휘어 보이니 태범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이솜에게 술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고 교장 선생님을 필두로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이솜에게 카드를 맡긴 덕에 계산은 이솜이 하게 되었다. 영수증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오니 행정 실장도 제 정신이 아닌 듯싶어 영수증과 카드는 월요일에 되돌려줄 생각에 가방에 잘 넣어 두었다.
도로는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저녁 시간이라 한산했다.
"어우- 오랜만에 마시니까 조오타!"
학생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라 오랜만에 알딸딸하게 들이 부었는지 몇몇을 제외한 선생님들은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택시에서 몇 번 퇴짜를 받았다. 결국 팁까지 쥐어 주며 취객들을 승차 시켰고, 자 차가 있는 선생님들은 대리 기사를 불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솜과 태범이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다.
"넌 안가?"
"나 술 조금 깨면 들어가려고. 데려다 줄까? 집 어디야?"
"술 마셨는데 날 어떻게 데려다 줘. 여기 근처에 산책 할 만한 곳 있으니까 거기 좀 같이 걸어 줄게."
이솜의 말에 태범은 미안하다는 듯이 쌜쭉 웃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나눠 먹으며 산책로를 걷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걷지 못하겠다는 태범을 위해 근처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제야 살겠다는 듯이 엉덩이를 걸치고 몸을 늘어뜨린 태범은 당장이라도 잘 것 같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솜은 취객을 놓고 가야 하는 건가 하는 불안함에 태범에게 당장 말을 건넸다.
"설마 자는 건 아니지?"
"난 몸이 바닥에 다 누워 있어야 잘 수 있어, 너무 걱정 마."
단호한 목소리에 안심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일 비가 올 예정인지 하늘엔 별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보는 반짝이는 밤하늘이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분위기에 취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별만 바라보고 있는데 태범이 이솜을 바라봤다.
"나 잘 할 수 있을까?"
"그럼. 나도 하는데……."
"사실 선생님 하면 노후 보장 되는 것 때문에 결정 한 것도 있거든."
태범의 진지한 말에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이솜은 자신을 바라보는 태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하늘을 볼 차례라는 듯이 이솜에게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두고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쳐다봤다. 한참을 뭔가 생각 하던 태범은 머뭇거리며 진심을 내뱉었다.
"그래서 내가 준비 할 수업 들을 애들 한테 많이 미안해. 순전히 내 욕심 때문에 애들이 수능 때 점수를 덜 받으면 어쩌나 싶어."
"막상 학교로 출근하면 그런 생각 안 들 걸. 나도 원래 여고로 가고 싶었는데, 애들이 참 예뻐. 그래서 애정도 많이 생겼고. 너도 애들 하고 애정 생기면 그런 생각 안 들 거야."
"그렇겠지?"
"그럼."
이솜의 덤덤한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태범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폭 내 뱉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솜은 그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태범이 몸을 돌려 자신을 보고 있는 이솜에게 손을 뻗었다. 이솜은 킬킬 웃으며 태범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잡은 손을 또 자연스럽게 놓은 두 사람은 잠시 산책길을 또 걸었다.
"집에 가야겠다."
"그래야지."
"데려다 줘?"
"필요 없어."
데려다 줄 필요 없다는 단호한 거절에 태범은 그냥 씩 웃었다. 거리를 적당히 유지한 이솜과 태범은 유유히 산책길을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