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다음 날 이솜의 책상 위에 두 장의 반성문과 초콜릿을 올려놓았다. 반성문이라고 하기엔 거의 일기에 가까운 내용이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솜은 초콜릿을 책상 한 쪽에 잘 두었다.
"어머, 웬 초콜릿?"
"아, 하하- 우리 반 학생이 저 먹으라고 줬어요."
"어머, 어머, 자기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네에? 아니에요~"
어느새 다가온 은지가 또 큰 소리로 초콜릿의 출처에 대해 물어왔다. 그 때 탕비실에서 나오던 지은이 좋은 먹잇감을 물었다는 듯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르는 척 물어봤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우리 솜 쌤한테 반 애가 초콜릿을 줬다네? 귀엽기도 해라."
"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초콜릿을 내려다보던 지은은 이솜을 향해 싱긋 웃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싸한 느낌이었지만 애써 그 느낌을 털어내고 출석부를 챙긴 뒤 교실로 향했다.
오늘은 보이지 않는 도준의 모습에 어제 지우의 말이 생각이 나면서 이솜의 마음속 세모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잔뜩 모를 세운 이솜의 세모는 마음을 따끔 따끔 찌르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남의 얘기를 쉽게 하니까'
지우의 말대로 선생님들은 확실히 얘기를 많이 하긴 한다. 특히 학생들 얘기를. 그래야 어떤 학생이 문제가 있고, 어떤 학생에게 뭘 조심해야 하는 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악용하는 선생님들이 더러 있긴 했다. 아마 지우는 악용하는 선생님들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리라.
'또 소문날까 봐 얘기 안 했다 고요!'
굳이 예를 들면 가정에 상처 받은 아이들을 면전에 놓고 무시를 한다 던지,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크게 얘기를 한다든지. 어른에게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학생들은 어른들에게 보호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욕감을 주는 매질을 당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우와 같은 부류의 아이들이 매질을 자주 쉽게 당했고, 도준이 같은 경우에만 보호를 받았다.이것저것 생각을 하다 보니 이솜의 발걸음은 저절로 느려졌고, 그걸 깨닫자마자 뒤에서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도준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재빠르게 빼서 공손히 앞으로 모아 놓기까지 했다.
"어, 그게 뒤 따라 걸은 건 아니고요……."
"……."
"하하-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쳐다보는 이솜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도준은 뒷목을 긁고는 교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하-, 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의 찔림이 점점 커져만 갔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얘기라도 해야 겠다, 마음을 먹은 이솜은 도준이 들어간 교실의 앞문으로 향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니 이제는 다들 제 자리에 앉아서 교실로 들어오는 제 담임 선생님을 바라본다.
"쌤, 안녕하세요!"
"오냐- 안 온 애들 없고, 휴대폰도 잘 냈지?"
"네에!"
"오케이, 오늘 학교 보수 공사 있어서 4층은 출입 제한이야. 4층에서 수업 하는 과목 있으면 그냥 교실에 있어. 쌤들이 오실 거니까."
"우오~"
2층에 위치 한 8반은 4층에서 수업하는 교실까지 꽤 거리가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은 건지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했다. 아이들을 쭉 둘러보다가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지우는 그 순간 흠칫 놀랐지만 곧바로 고개를 살짝 까딱 했다. 인사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하며 속으로 킥킥 대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다가 손에 턱을 괴고 나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도준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순간 이솜은 자신과 도준이 둘만 교실에 남겨져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나른한 도준은 눈빛은 이솜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급히 고개를 숙여 도준의 눈길을 피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을 뒤로 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쟤는 무슨 사람을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괜히 화끈거리는 목에 손을 대며 열을 식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업 말고는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교무 회의에선 공사 말고 다른 얘기가 없었고, 아직 새 학기라 어수선한 점을 빼고는 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이런 생각을 신입 교사인 이솜만 하고 있는 건지, 수업이 없어서 같이 교무실에 남아 있는 다른 선생님들은 마우스나 키보드들을 두들기느라 바빴다. 틈이 있는 덕분에 이솜은 편하게 도준에 대한 생각을 정리 할 수 있었다.언젠간 도준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를 해야 할 텐데, 솔직히 도준과 이솜이 만날 일이 딱히 없었……나? 이런 얘기를 하면 보통 카페에 가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솜과 도준은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라 밖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는 것이 더 이상했다. 누군가가 지나가다 본다면 어떻게 소문이 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얘기 할지는 정리가 다 됐는데 막상 만날 곳이 없어서 아쉬웠던 차에 순간 상담실이 생각이 났다.
마침 도준이 반장이었으니 반장이라는 명목으로 불러서 얘기를 나누면 되겠다 싶었다.
"아 맞다, 이번 주에 저희 반 상담 기간이에요."
"아- 자기네 반 상담 ** 했었지?"
"네. 그래서 이번 주 상담실 저희가 계속 사용해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되는 일이 없었다.
*
결국 점심시간에 도준이를 상담실로 불러내려는 이솜의 야심찬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눈물을 머금고 어디가 좋을까 생각 하고 있는데 마침 4층에 사람이 없음을 깨닫았다. 상황을 살피러 계단을 타고 4층까지 올라갔다. 보수 공사는 몇몇의 교실 안에서만 이뤄지고 있어서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 말고는 복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솜은 만족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음, 매우 마음에 드는군.
“여기면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겠다.”
이솜은 복도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곤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마침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2층으로 올라오고 있는 도준과 우연처럼 딱 맞닥뜨렸다.
"어, 도준아. 혹시 지금 시간 돼?"
"지금요? 네. 무슨 일이세요?"
"잠깐 얘기 좀 하게."
내 말에 도준이와 함께 있던 아이들이 오오- 하는 소리를 냈고, 도준이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장난스럽게 수혁의 어깨를 툭 쳤다. 수혁이는 혼자 당한 것에 심통이 났는지 재하의 어깨를 툭 쳤고, 그 것이 화근이 되어 4명의 아이들은 서로의 어깨를 투닥 거리며 교실로 향했다.
이솜은 저 아이들이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기다리는 도준을 봤다.
"여기선 좀 그렇고, 4층으로 가자."
"거기 지금 공사 하고 있지 않아요?"
도준은 조례 시간에 이솜이 했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
"아까 확인 해 보니까 괜찮았어."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이솜은 4층으로 올라갔다. 도준은 이솜의 뒤를 쫄랑쫄랑 쫓아왔다. 복도에서 대화를 할까 하다가 영 어수선해서 지리사 수업을 하던 교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교실엔 창문을 통해 햇빛만 교실을 밝히고 있었다. 전등이라도 켜 볼까 싶어 스위치를 눌렀지만 혹시 모를 화재 사고 때문인지, 전등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상상 못할 상황에 살짝 당황 했지만 애써 표정을 유지하고 교실 문과 떨어져 있는 책상에 엉덩이를 대고 기댔다.
도준은 그런 이솜의 건너편에 있는 의자 등받이를 향해 앉았고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솜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주봤다.
"그, 도준아. 네가 청운 재단 이사장님 외손자라고 들었어."
"아-“
도준은 이솜의 말에 원하지 않은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 행동을 본 이솜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곧 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행동이 조금만 달라져서 네 마음에 안 들면 교사 생활 끝이라고 생각 하니까 좀 무서워서 피했거든……."
참 세속적이면서도 염세적이었다. 지금 당장 도준이 화를 버럭 내고 잘라버린다고 해도 이솜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명백히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을 내린 이솜의 잘 못이었으니까. 이솜은 자꾸 떨어지는 눈동자를 억지로 도준의 눈에 맞췄다.
"근데 계속 생각 해 봤는데, 잘리는 것 때문에 무서워서 피한다는 건 말이 안 되더라고. 게다가 네 입으로 직접 들은 얘기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판단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 했어. 혹시 내가 도준이 널 피하는 걸 느꼈으면 진짜 미안해."
"……."
"솔직히 잘려도 할 말 없다."
말을 끝맺자마자 억지로 힘을 주던 고개에 힘이 탁 풀리면서 땅에 처박힐 듯이 고개가 숙여졌다. 의자에 앉아 이솜을 올려다보던 도준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이러다 잘리면 어떡해! 어렸을 때부터 품어 왔던 오랜 꿈이 드디어 이뤄졌는데,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무너질까 봐 노심초사 하면서도 잘려도 싸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도준은 자신과 이솜의 사이에 있던 책상에 손을 탁 짚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솜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 덕분인지, 때문인지, 이무튼 둘 사이의 간격은 꽤 많이 좁아졌다. 도준의 돌발 행동에 놀란 이솜은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졌다. 도준의 키는 많이, 조금 많이 커서 이솜을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의 그 눈빛을 가지고.
당장이라도 잡아 먹힐 것 같은 배고픈 맹수의 그것 같이 형형하면서도 당장이라도 졸음을 토해 낼 것 같기도 한 나른한 눈빛이었지만 이솜은 차마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할 수 없었다.
"선생님……."
낮고 낮은 도준이의 목소리가 이솜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비어 있는 교실에 울렸다. 등이 오싹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도준은 겁에 질린 것 같은 이솜의 눈동자에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푸하-"
도준의 말에 언제부터 숨을 참았는지는 몰랐지만 이솜은 급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도준은 몸을 일으켜 킬킬대며 웃었다. 이솜은 그런 도준을 바라보다 갑자기 창피한 기분이 들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쌤, 울어요?”
“…….”
도준은 장난스럽게 말을 걸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우기 위해 이솜의 손목을 잡았다. 이솜은 도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힘을 줬고, 도준은 이솜의 힘을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도준과 이솜이 교실 안에서 한참 그러고 있을 때, 하나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슥 지나갔다. 물론, 두 사람 아무도 그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했다.
*
도준에게 확실하게 얘기를 하고 나니 이솜의 마음이 한결, 매우 많이 가벼워졌다. 사람은 역시 솔직해야 해. 마음에 포만감이 들자 며칠 동안 긴장으로 굳어졌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솜이 도준과 인사를 하고 교무실에 들어서니 몇 몇 선생님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가 다가간 것을 느꼈는지 선생님들이 고개를 홱 돌려 이솜을 쳐다본다.
"왜, 왜요?"
"솜 쌤, 우리 학교에 교생 오는데 윤리 전공 이라네?"
"엥?"
"청운 대학교에서 온다는데, 윤 쌤 청운대 졸업 했지?"
"네, 거기 졸업하긴 했죠……."
어머, 어머, 너무 잘 됐다 하며 호들갑을 떨던 은지는 같이 보던 공문을 이솜에게 건네 줬다. 4월 초에 교생이 두 명 오는데, 한 명은 영어 교생이었고 다른 한명은 윤리 교생이었다. 이솜 본인도 처음 교직 생활 하는 건데 후배까지 잘 챙겨 줄 수 있을까 막막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차라리 다른 선생님들한테 부탁 해 볼까 하다가도 일부러 붙여 준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공문을 받아 들었다. 공문 안에는 교생 실습이 진행 되는 시간과 교생의 간단한 신상 정보가 들어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서 내용을 꼼꼼하게 보고 있는데 남자임을 깨닫고 입가에 소리 없이 웃음이 맺혔다. 남고에 단비 같은 존재인 여자 교생이 아니라서 많이 실망 할 것 같네.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데 옆 자리 진우가 파티션 너머의 이솜 자리를 기웃거렸다.
"이솜 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아- 교생이 여자가 아니라서 실망 할 것 같아서요."
"에이, 쌤이 있는데 여자 교생이 왜 필요해요? 다른 반은 8반 엄청 부러워해요."
체육을 담당하는 진우는 학교의 웬만한 소문을 다 알고 있었다. 체육 과목의 특성 상 아이들과 몸을 부대끼는 일이 많아서 아이들과 유대 관계가 제일 돈독했는데, 그 점이 아이들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돌고 있는 소문은 '3학년 8반은 복 받은 반'이라는 소문이었다.
여자 선생님, 그것도 본인들과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예쁜 여자 선생님이 무려 담임으로 가게 되었으니 남자만 가득한 학교에 얼마나 기쁜 소식이겠느냐, 라는 것이다. 그 말에 괜히 부끄러워진 이솜은 진우를 향해 하하 웃어줬다. 진우는 믿지 않는 눈치의 이솜에게 ‘진짜인데…….’ 하며 입맛을 쩝 다시곤 시선을 돌렸다. 진우의 행동에 이솜은 다시 공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식 실습은 4월 둘째 주였고 다음 주에 오리엔테이션으로 교생이 학교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습은 언제 시작이래요?”
제 자리에서 뭔가를 하던 진우가 다시 고개를 빼고 이솜을 향해 물었다.
“정식 실습은 4월 둘째 주 부터라네요.”
“음, 그럼 교생분들 자리를 좀 만들어야겠네요.”
혼자 중얼거린 진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