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요, 저도.”
여자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태범에게 말 했다. 태범은 어이가 없어서 영혼이 탈출 할 것 같았다. 본인도 포함되는 요즘 사람들이지만 참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안하무인 같으니라고!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태범은 말을 아꼈다. 하지만 도준은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해 버리더니 빨대를 사용해서 커피를 마셨다. 빨대가 입에 물리는 순간이 모든 사람에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그저 빨대를 입에 무는 것뿐인데, 왜 침이 꼴닥 꼴닥 넘어가는 지! 하지만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도준에게 짜증이 났는지, 목표를 바꿔 태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그쪽이 주세요.”
“네?!”
“싫어요?”
“……저도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여자는 그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곧바로 입술을 꽉 깨물며 카페를 뛰쳐나갔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도준은 태범을 바라봤다.
“쌤,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응? 아- 응…….”
태범은 이솜을 떠올리곤 수줍게 웃으며 물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생각만 해도 이렇게 마음을 설레게 하니,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저 사람마저도 사랑에 빠진 수줍은 표정을 해 버리니 그 어떤 힘겨운 사랑이라도 응원 해 주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사실 여자는 페이크고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는 아닐까 하는 의심도 더러 했다. 도준은 살짝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누군데요?”
“아- 비밀이야.”
“전 쌤이랑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쌤은 아닌가 봐요…….”
도준은 일부러 목소리와 어깨, 눈꼬리까지 축 처지게 만들었다. 사실 도준도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 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태범의 입에서 '한이솜'의 이름만 나오지 않는다면야. 태범은 도준의 말과 행동에 당황했다.
그래, 저 아이는 나를 믿고 상담까지 했는데 나도 이 정도 비밀은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학생과 더 돈독한 사이가 된다면 나도 좋을 것 같고. 태범은 도준에게 속는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다. 태범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려줄게, 나 사실은……."
*
"집중- 이제 곧 체육대회다. 원래 3학년은 안하는 건데 불쌍하다고 박박 우겨서 넣어 줬으니까 앞으로 나 볼 때마다 절 하도록.“
"와아아악!!"
아이들은 이솜의 말에 미친 원숭이 마냥 날뛰었다. 사실 청운대학 부속 고등학교는 3학년도 수학여행을 제외한 모든 학교 행사에 참여했다. 이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솜은 흥분해서 날뛰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는지 태범까지 거들었다.
"진정하고 쌤 말 좀 들어. 아무튼, 다다음주에 하는데 대신 너희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쌤, 저희는 학생 신분이라서 공부는 당연히 열심히 합니다."
반에서 제일 공부를 하지 않는 민종이 유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 하자 아이들은 모두 폭소를 했다. 이솜도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참가 종목에 각자 이름 적고, 다 적으면 반장은 나한테 가져와. 종목 말 해줘?“
"네!“
"음, OX퀴즈, 줄다리기, 축구, 2인 3각..?"
종이에 적힌 종목을 줄줄 말 하다 눈에 띄는 종목에 이솜이 눈을 찌푸렸다. 2인 3각을 남고에서? 아이들은 종목 이름을 듣자마자 웅성거렸다.
"웩, 토 나온다. 남자랑 2인 3각?“
"잘 하면 그거 1등 각이다.“
"더 있어, 들어봐. 짝피구…….“
"쌤, 지금 들고 계신 종이, 여고에다가 줘야하는 거 아니에요?“
"짝피구래!! 캬하하학-"
아무래도 프린트가 잘 못 된 것 같았지만 분명히 짝피구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짝피구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팔뚝을 쓸었다. 이솜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다른 종목을 말 했다. 다행이도 그 뒤엔 나쁘지 않은 종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종이를 칠판에 자석으로 고정 시킨 이솜은 다시 교탁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 순위권 상품이 매우 좋다고 들었어. 공부는 못해도 건강한 우리 8반은 1등 할 수 있겠지?“
"저희는 1등 아니면 쓸모없다고 생각합니다, 쌤.“
"그래, 그럼 공부도 1등 한 번 해보자, 성현아.“
"조례 안 끝내주시나요, 쌤?"
성현의 넉살스러운 말에 이솜은 장난스럽게 성현을 째려봤다. 여기저기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솜은 조례 마무리를 하고 태범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선생님들이 나가자마자 아이들을 일어나서 칠판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으로 향했고, 아이들을 향해 말 했다.
"다 자리에 앉아.“
"힝- 형 저희 이거 보면 안돼요?“
"수업하기 전에 빨리 정하자. 휴대폰 바구니 돌릴 테니까 휴대폰 내고.“
"네에-"
아이들은 통솔력 있는 도준의 목소리에 수긍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도준은 칠판에 붙은 종이를 떼서 제목부터 천천히 살펴봤다.
"여고와 함께 하는 체육대회……?“
"여고요!?“
"와악! 여자애들이랑 한다!"
도준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눈이 번쩍 뜨였다. 여고랑 같이 체육대회라니! 이 무슨 경사스러운 일인가? 졸업 빨리 안 하길 정말 잘 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3년 내내 남자 냄새만 나는 곳에서 지내려다 보니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눈물까지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도준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종이를 바라보다가 왁왁 거리는 아이들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닥치고, 빨리 참가 하고 싶은 종목 정하자."
도준은 한 종목에 손을 드는 아이들의 이름을 차분히 적어 내려갔고 그 사이 휴대폰 바구니가 교탁으로 도착을 했다. 중간 중간 장난치는 아이들을 몇 번 째려봐 주고 작성이 다 되자 도준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축구는 토너먼트래. 다음 주에 중간 중간 한다니까 축구 참가하는 애들은 정신 잘 차려서 나가라.“
"네, 형님!“
"그리고 본인이 어떤 거 참가 하는지 까먹으면 죽는다."
도준의 살벌한 말에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종목에 손을 들었는지 곱씹어봤다. 곧 종이와 휴대폰 바구니를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간 도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무실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며칠 전, 태범과 진솔한 대화를 한 뒤 마음이 홀가분해졌기 때문이었다. 교무실에 다다르자 마침 교무실을 나서는 태범을 볼 수 있었다.
"쌤!"
도준이 신나게 손을 흔들며 태범에게 다가갔다. 태범은 자신을 반갑게 부르며 다가오는 도준을 보고 환하게 웃어줬다.
"그래, 도준아. 솜 쌤 심부름?“
"넹. 어디 가세요?“
"그냥 한대 피우러……."
태범이 머쓱하게 웃으며 밖을 가리켰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태범이 지나갈 수 있게 몸을 살짝 틀었다. 태범은 도준의 배려에 그의 어깨를 톡톡 치고 도준을 지나쳤다. 태범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 본 도준은 살짝 흥얼거리며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열심히 뭔가를 작성하고 있는 이솜의 뒤통수를 보니 웃음이 새어나왔다.
"쌤.“
"어? 어- 왔어? 고생 했다."
이솜은 도준의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도준은 이솜의 책상 위에 휴대폰 바구니를 올려놓았고, 그 위로 체육대회 종이도 함께 올려놓았다.
"쌤, 그런데 여고랑 같이 한다고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아- 난리 피울까 봐.“
"아마 체육대회 끝나고도 난리 피울 것 같은데요.“
"네가 잘 말려줘.“
"노력은 해볼게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말 한 도준을 툭 친 이솜은 어서 가 보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도준에게서 등졌다. 도준은 이솜의 책상 위에 사탕 하나를 올려놓고 인사를 꾸벅 하더니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솜은 도준이 올려놓은 사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딸기맛 사탕이었다. 그 때 부장 선생님이 코를 골다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어우, 어우- 피곤해.“
며칠 야자 감독을 했다고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아침부터 졸고 있던 부장 선생님은 산책이라도 해야겠다며 교무실을 나섰다. 부장 선생님을 빤히 바라보던 이솜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이놈의 공문은 도대체 줄어들지 않는다며.
그 사이 태범이 교무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담배 냄새에 이솜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봤는지 태범이 민망한 듯이 멋쩍게 웃었다.
"냄새는 최대한 빼고 오셔야죠, 선생님.“
"죄, 죄송 합니다……. 방향제를 못 챙겨서요. 지금 뿌릴게요."
지은의 날카로운 말에 태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방향제를 챙기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은은 태범의 뒤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튼 교생들은 저래서 문제야."
그 말을 들은 이솜은 순간 열이 받았지만 뭔지 모르게 자신을 보면서 중얼거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입을 꾹 다물었다. 지은은 그런 이솜을 보고 콧방귀를 뀌고 큰 발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
태범은 요즘 들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솜과 조금만 더 가까워지려고 말을 걸면 누군가가 나타나 이솜과 대화를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수업과 관련된 일이면 언제든지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사적인 대화는 일절 하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교생 시간에 이솜과 조금 더 친해져야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태범은 애가 탔다.
"아, 연락도 안 되네."
퇴근만 하면 휴대폰을 꺼 놓은 것인지 답장을 일체 하지 않는 이솜 때문에 더 애가 탔다. 보통 이런 상황이 오면 포기 하고도 남는데, 학교에서 보여주는 치이는 모습 때문에 쉽게 포기가 되지도 않았다. 왜 그녀가 학교에 다닐 때 자주 만나지 못 했는가 후회도 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은 것이었다. 전화라도 할까 생각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화를 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웹 서핑을 하던 태범이 곧 개봉하는 영화 예고편을 보고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었고, 영화 개봉은 내일이었다. 이 핑계면 괜찮지 않을까? 태범은 떨리는 손으로 이솜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고 나서 느긋하게 전화를 받은 이솜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태범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그는 날뛰는 심장과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냈다.